[커버스타]
진짜 배우라 불린 사나이
2007-06-22
글 : 장미
사진 : 서지형 (스틸기사)
<검은집>의 황정민

‘좋은 사람’이라는 표현만으로 충분한 사람이 있다. 그 이상 주석을 달지 않아도 척 느낌이 오는 사람. 2005년 청룡영화제에서 “60여명의 스태프들이 차려놓은 밥상에서 맛있게 먹기만 하면 됐다”는 수상소감으로 마음을 건드리고 인터뷰마다 배우의 도리에 대해 진지하게 토로하는 황정민도 그런 사람이다. 하지만 세상에 어디 한 종류의 사람 뿐이던가. 먼지가 나지 않을까 살짝 털어보고 주머니도 한 번쯤 뒤적여야 직성이 풀리는 의심 많은 사람도 존재한다. 기자가 딱 그랬다. 황정민이 본격적으로 관객의 이목에 오른 계기가 순정을 온몸으로 설파하는 <너는 내 운명>이라는 것 역시 너무 그럴듯하다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그런 그가 인간에 대한 믿음을 놓지 않으려 하는 보험사정인 전준오를 연기한 <검은집>은 적절한 빌미가 됐다. 초여름의 기색에 물든 듯 조금 나른해 보이던 황정민은, 그러나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가치관이 또렷한 이 배우는 자칫 불순하게 들릴 “왜”라는 질문에도 온몸으로 캐릭터를 밀고 나가듯 그저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같은 의미에서 “만나고 나면 기분 좋아지는 사람”이라는 다른 기자의 평은 틀리지 않았다. 스스로 “다혈질 경상도 사나이”라고 순순하게 인정하는 황정민은 거짓말을 못하는 눈을 지녔기에 좋은 사람이자 또 그만큼 좋은 배우다.

-여러 장르를 오가긴 했지만 스릴러는 처음이다. 공포·스릴러 장르는 원래 좋아했나.
=기회가 없어서 못했을 뿐이지 심리를 다루는 영화들을 좋아한다. 배우들은 다 그런 영화 좋아할걸? 앨프리드 히치콕, 브라이언 드 팔마 영화들 많이 봤다. 우리나라에는 내세울 만한 것들이 딱히 없잖나. 왜 없지, 왜 없지, 몇년간 생각했다.

-장르적으로 뛰어난 공포·스릴러를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다는 뜻인가.
=그렇다. 내가 해서 조금 달라 보였으면 하는 바람 있잖나. 황정민이 하니까 괜찮네, 하는 말 듣고픈 욕심. 막상 해보니까 아, 이게 큰 잘못이구나 싶더라. (웃음)

-어떤 점이 어려웠나.
=관객의 숨통을 죄었다, 놨다, 죄었다, 놨다 해야 하니까. 철저한 계산이 있어야 한다. 배우의 감정 동선으로 움직이는 영화는 절대 아니다. 멜로나 휴먼드라마 같은 것은 배우 감정에 따라 움직이잖나. 새로운 장르에선 또 다른 화법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더 걱정하는 것 같다. 그 다음 배우만이 알 수 있는 계산인데 감정의 그래프를 그릴 때 멜로드라마를 할 때랑 다르더라.

-그래프라니?
=나는 그래프라고 이야기한다. 한 장르에 한신이라도 (손으로 굴곡을 그리며) 이렇게 해야 관객이 재미있게 보지 (직선을 그으며) 그냥 이렇게 하면 재미가 없잖나. 작품의 클라이맥스가 100이라면 차곡차곡 잘 쌓아서 100까지 도달하는 나름의 어떤 설계도가 필요하다. 그런데 스릴러물은 다르더라. 늘 무서운 게 있으니까 다 100, 100, 100이다. 매번 악, 악, 악, 악, 할 수는 없으니 어떨 때는 악, 어떨 때는 헉, 어떨 때는 휴. 공포에 대한 수많은 감정이 있을 텐데 막상 연기해보니까 아직 모자라더라. 너무 난해했나. (웃음)

-극중 보험의 혜택을 받아 공부한 것으로 나온다. 실제로도 보험에 가입했나.
=있다. 애도 있고 하니까.

-어렸을 때부터?
=아니다. 은행에 관련된 업무를 워낙 못해서 집사람이 다 알아서 한다. 집사람이 가입했을 거다. 그렇다고 이야기를 들었다.

-돈 계산에 약한 편인가.
=나는 아예 생각이 없다. 그러니까 은행일을 못 본다. 아예 안 간다.

-왜 그런가.
=두렵다. 번호표 뽑고 하는 것들. 통 모르니까 좀 창피해서 그런지. 아, 그냥 싫다. 은행, 병원가는 게 제일 싫다. 그냥 뭐, 집사람이 알아서 잘 하시니까. (웃음) 남자들 다 그렇지 않나.

-다른 작품할 때는 든든한 버팀목들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맞서는 사람은 있어도 같이 극을 이끄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좀더 어려웠던 것 같다. 외로웠던 것 같다.

-외롭다고?
=외롭다. 현장에서 되게 외롭다. 같이 이야기하고 고민하고 그럴 사람이 없으니까. 물론 그렇게 하긴 했지만 상대배우가 있다, 없다의 차이가 크다. 재미없어. (웃음) 성격인 것 같다. 같이 으샤으샤하고 그런 걸 좋아한다. 혼자서 하는 건 이번에 해보니까 힘들더라.

-<너는 내 운명>에서 같이 연기한 전도연이 칸에서 상을 탔다.
=멋지지 않나. 최고지, 최고. 연기 잘하고 열심히 하는 친구는 하늘에서 그렇게 재평가를 내려준다.

-얼마 전 인터뷰하면서 전도연이 같이 연기한 남자배우들에 대해 이야기했던데.
=나한텐 뭐라고 하던가. (웃음)

-“발톱을 숨기고 있는 무언가”라면서 “그게 호랑이였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무슨 뜻인가.
=나도 모르겠다. 도연이만 알고 있는 표현 같은데? 발톱을 잘 숨기고 호랑이처럼 되라? 여러 뜻이 있을 것 같다. 비수를 숨기고 있다는 게 멋지지 않나? 칠랄레팔랄레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작품이 없을 때는 뭐하나.
=그냥 집에서 쉰다. 할 일이 없는데, 뭐.

-취미는 없나.
=그러기에는 열심히 하는 편이 아니다. 하다 말고 하다 말고. 작품이 끝나면 모든 게 귀찮아서 그런 것 같다. 운동은 조금 한다. 산책을 워낙 좋아하고 달리기도 한다.

-달리기라는 게 도전의식이 있어야 하는 운동 아닌가.
=그런 거 있다. 재미없는 운동처럼 보이는데 달리기가 참 재미있는 운동이다. 어쨌든 내가 그만 뛰고 싶으면 안 뛰면 되는 거 아닌가. 이만큼 뛰어야겠다는 목표를 정하면 끝까지 뛰는 거다.

-이제는 <바람난 가족> 때 생긴 비호감을 떨치고 여성팬도 생겼을 것 같다.
=비호감?

-개인적으로 영작 캐릭터는 정말 싫었다.
=그렇지? 근데 어떤 사람은 그 캐릭터를 아주 좋아한다. 지금까지 본 것 중에서 주영작 캐릭터가 가장 멋있다고 그러더라. 나도 놀랐지. 물론 <너는 내 운명>의 석중이 같은 캐릭터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내가 여자라면 주영작이 나을 것 같다. 석중이 재미없어.

-왜 그런가.
=재미없잖아. 삶은 굴곡이 있어야 해. 고통도 있어야 하고.

-<사생결단>의 도 경장은 어떤가.
=도 경장은 불쌍한 사람이다. 보통 사람은 어떤 사건을 통해 자신을 이해하고 돌아보는데 그 사람은 그러지 못하잖아.

-아내가 작품이나 상대배우에 철저하게 빠져드는 모습을 보면서 질투하지 않던가.
=집사람이? 전혀. (웃음) 그건 일인데. 그걸 구분 못하는 사람이라면 결혼하지 않았겠지.

-버스나 지하철도 곧잘 타고 다닌다던데 요즘도 그러나. 사람들이 알아보지 않던가.
=알아보면 알아보는 대로, 못 알아보면 못 알아보는 대로.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얼마 전에 공연 보러 집사람이랑 지하철 타고 갔다. 집사람은 좀 불편한가 보더라. 나는 그런 것에 무심하고 무디다. 나만 편하면 되지, 뭐. (웃음)

-대학로에 공연 보러 갈 때는 친구들이랑 술을 마셔야 해서 차를 안 가지고 간다고 들었다.
=술 좋아한다. 사람들이랑 이야기할 수 있잖나. 작품 이야기 하니까 그래서 재미있다. 다른 이야기를 한다면 내가 그 자리에 있을 이유가 없겠지. 촬영 들어가면 감독이랑 배우랑 스탭들이랑 소주 한잔 하면서 이야기한다. 3개월 내내 늘 작품 이야기만 한다. 재미있지 않나? 나는 그게 참 좋다. 살면서 무엇에 그렇게 집중하겠나. 그나마 배우라는 직업을 가져서 가능한 거지. 정말 감사한다. 그래서 끝나면 다 싹 잊는 것 같다. 하얘져. 이걸 찍었나. 어떻게 찍었지. 사람들도 기억이 안 나고. 스탭들은 누구였더라. 그애들도 기억이 안 나고. 그렇게 티나게 형 동생 하면서 막 이야기하고 그랬는데 기억이 안 나.

-<검은집>의 전준오처럼 인간에게 치이고 데이고 실망하는 일은 없나.
=없는 것 같다.

-운이 좋았던 건가.
=내가 인복이 좀 있다.

-우연하게라도 실망하는 경우도 있잖나.
=그게 그 사람이 불쌍한 거지, 내가 불쌍한 건가.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린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그 사람이 언젠가 다시 와서 그 이야기를 꺼내게 된다. 자연스럽게. 너무 막 그래봐야 인생 짜쳐진다. (웃음)

-자라온 환경이 어땠는지 궁금하다.
=좋았다. 만날 애들하고 뛰어다녔다. 어렸을 때 경상남도 진동에서 자랐다. 진동국민학교 교장 선생님이 우리 외할아버지였다. 월령국민학교 다니면서 농구도 했다. 거기 계절이 참 좋잖나. 생각해보면 그런 자연환경에서 자란 게 연기자로서 감수성이 남들보다 예민한 이유이지 않을까 싶다.

-<와이키키 브라더스> 촬영할 때 류승범과 하도 장난을 쳐서 임순례 감독에게 크게 야단맞은 일화를 들었다. 어릴 때부터 장난기가 많았나.
=엄청 심했지. 만날 사고 치고. 자잘한 사고지, 뭐. 애들하고 싸우기도 하고 때리기도 하고.

-스스로 “전형적인 경상도 사내에 다혈질”이라더니 안 그래 보인다.
=보기에는 그럴지 모르지만 작업해보면 알겠지. 다혈질이다. 뭔가 끝까지 해결하고 넘어가야지, 그냥 설렁설렁 못 넘어간다. 되든 안 되든 끝까지 해야 아무리 해도 안 된다는 걸 깨달을 것 아닌가. 하지도 않고 포기하는 건 용납이 안 된다.

-<행복>은 <검은집> 전에 촬영을 마친 것으로 안다. 어떻게 선택했나.
=뭐, 대본이 왔다. (웃음) 허진호 감독님과는 한번 작업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었다. 게다가 허진호 감독님 영화에 나오는 남자들, 다 비슷비슷하지 않나. 내가 저 영화를 하면 절대 저렇게 가지 않으리, 그런 식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 친구를 하게 됐다.

-어떻게 달랐기에?
=대단히 외향적이고 감정적이고 내향적이진 않다. 속으로 삭히는 사람은 절대로 아니다.

-디테일하기로 유명한 허진호 감독과의 작업은 어땠나.
=행복한 작업이었지. 디테일하니까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도 감독님이 지적해주신다. 연기에 정답이 어디 있겠나. 도연이가 표현하는 이창동 감독님 스타일과 비슷하다. 테이크 스무번씩 가면 불편해하고 힘들어하고 그러는데 나는 오히려 재미있었다.

-함께 출연한 배우에게서 힘을 얻는 것 같은데 임수정에겐 어떤 에너지를 받았나.
=진짜 오래전 일이라서 까먹었다. (웃음) 수정이랑 하면서 좋았던 것은 대단히 편했다는 거다. <너는 내 운명> 때는 내가 여자를 사랑하는 설정이었기 때문에 달아나면 어쩌나 늘 조마조마했던 것 같다. <행복>은 그 여자가 나를 사랑하는 거여서 조금 편했다.

-눈매가 조금 복합적인 느낌을 낸다.
=늘 그런 말을 듣는데 마음이 변하면 눈도 변한다. 눈을 보면 이 사람이 거짓말하고 있는지 아닌지 다 알 수 있다. 그게 어디서 오겠나. 마음, 가슴에서 나온다. 주영작이라는 인물은 내가 너무너무 싫어하는 부류인데 그럼에도 연기를 해야 한단 말이지. 그럴 때 진심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마음에서 나오면 표정을 비롯해 모든 것들이 다 된다. 그게 어려워서 그렇지.

-근래 이마에 주름이 두줄 생겨서 깜짝 놀랐다.
=고등학교 때부터 있었다. 우리 어머니가 몹시 싫어하는데, 아무튼. 살이 빠지니까 다시 보이는 것 같다.

-그 사이 아이 아빠가 됐다. 세상이 조금 달라 보일 것 같다.
=모르겠다. 똑같은 것 같은데? (웃음)

-인간적이라는 평을 많이 듣는데 부담스럽진 않나. 사람들이 황정민에게 갖는 기대치가 있잖나.
=그건 사람들 생각인 거고 나는 나 나름의 생각이 있다. 전혀 부담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웃음)

-차기작은 무엇인가.
=정윤철 감독님하고 할 것 같다. 7월 말이나 8월 초에 촬영 들어간다. <슈퍼맨이라고 불리우는 사나이>라는 부제가 있었는데 제목이 바뀔 거다.

-어떤 점이 마음이 들었나.
=사연이 깊다. 매미라는 태풍이 와서 강원도가 완전히 쑥대밭이 된 적이 있다. 전국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 일 제쳐놓고 갔다. 어려운 사람들이 어려운 사람들 도우러. 그래서 한달 만에 다 정리가 됐다. 그걸 TV로 보면서 몹시 창피했다. 내가 왜 저길 못 가지? 반성도 많이 했다. 인생 잘못 살고 있구나. 이 나라 사람들이 그나마 사람답게 잘 살고 있는 것은 당신들 덕분이다. 당신들이 바로 슈퍼맨이다, 그렇게 말하는 휴먼드라마다.

-어떤 사람인가? 슈퍼맨 중 하나인가.
=그렇다. 슈퍼맨이다. (웃음)

장소협찬 by-r·의상협찬 Frankie Molleo by MSF, Collezioni, BOSS, G.I.L homme, 오니츠카타이거·스타일리스트 임영순(ladybug)·헤어 이범호(제니하우스)·메이크업 임미현(제니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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