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진짜와 가짜의 경계를 다루는 게 흥미롭다”
2007-06-27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사진 : 이혜정
<열세살, 수아>의 김희정 감독

폴란드 우츠국립영화학교 출신에 조용하고 나직한 감성의 영화 <열세살, 수아>를 연출한 여성감독이라 하기에 이상하게도 음성은 낮고 눈길은 느린 나른한 사람을 상상했다. 오해였다. “하하하, 팔짱 끼라고요. 아, 감독 포즈요”, “저요? 다들 세영이 엄마로 보죠!”, “술만 덜 먹었어도 몸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근데 질문이 뭐였죠, 까먹었네”.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말들, 넘쳐나는 에너지, 가식없는 행동. 의외다. 그녀의 말처럼 사람은 모두 다면적이니 그래서 더 흥미로운 만남인 셈이다.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자신의 슬픈 경험을 사춘기 소녀의 감성적 이야기로 영화에 풀어낸 <열세살, 수아>의 감독. 서른일곱 김희정은 활기찼다.

-성격이 쾌활한 것 같다. 촬영장 분위기도 좋았겠다.
=뭐, 소문 들은 건 없으시고? 하하하. 워낙 사람을 좋아한다. 타고나는 것 같다. 감독이란 직업이 카리스마가 있어야 한다고 하기에 나도 이 성격을 고쳐보려 했으나 지금은 그냥 생긴 대로 살기로 했다. 나는 현장에서도 모니터 앞에만 앉아 있는 스타일이 아니다. 보기에는 이렇게 무거워 보여도 뛰어다닌다. 라인을 여기 놓으면 감독님 달려나갈 때 넘어지지 않겠냐고 스탭들이 서로 회의할 정도니까 말 다했다. 다른 감독들에 비해 너무 벌떡벌떡 일어나는 것 아니냐고들 했지만, 배우에게 연기 코치를 할 때도 나는 그게 더 맞다고 생각한다. “거기서 더 부드럽게 해”라고 무전기로 얘기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 게다가 이 영화에서 주인공은 아이였기 때문에 곁에 달려가 말해주는 게 중요했다.

-폴란드 우츠국립영화학교를 나왔는데, 서울예대 극작과 나와 곧장 폴란드로 간 건가.
=그 사이에 배우로 아동극 같은 걸 좀 했었다. 돌고 돌아 영화까지 간 거다. 공연예술아카데미 연극연출과정을 다니기도 했다. 내가 다니던 그때 연기과에는 안내상, 김중기 등이 다녔다. 거기서 1년 과정 공부하고 94년에 폴란드에 유학 갔다.

-그럼 연극을 공부하러 갔던 건가.
=처음에는 그랬다. 그런데 거기는 언어가 완벽하지 않으면 연극을 시켜주지 않는다. 아예 서류 심사 자체가 통과 안 된다. 우연히 그때 내가 어학공부를 한 곳이 우츠였다. 뭐 안 될 거 있나, 그럼 영화를 공부하자, 그렇게 된 거다. 즉흥적인 것처럼 들리겠지만 꼭 그렇지도 않은 것이 오래전부터 영화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다만 영화는 카메라를 거쳐야 한다는 것 때문에 겁을 좀 냈던 것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바꾸길 잘한 것 같다. 내 감수성에 더 맞는다. 폴란드에서 영화 찍고 있을 때 어떤 술꾼이 우리 영화 현장을 지나가면서 “저거 다 거짓말이잖아. 그런데 진짜 같이 꾸미고 있네”, 그렇게 떠들었다. 그 말 듣고 재미있었다. 우리 아버지도 생전에 그런 말씀 많이 하셨다. 누가 시켜주지도 않겠지만 시켜줘도 나는 배우는 못할 거라고. 그런 거짓말을 어떻게 진짜같이 하냐고 신기해하셨다. 하지만 나는 보통 사람들이 헷갈려하는 진짜와 가짜의 경계를 다루는 게 흥미롭다.

-왜 폴란드로 갔나.
=객기가 좀 있었다. 정말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언어도 잘 모르고 사람들도 잘 모르는 생소한 곳에 대한 동경. 거기가 영화로 유명한 곳이었는지 처음에는 잘 몰랐으니까. (웃음) 24살 때였다. 아, 그리고 꼭 좀 알려달라. 자꾸 70년생으로 나가는데 호적이 잘못 돼서 그렇지 71년생이다. 나보고 나이를 속인다고 자꾸 그러는데 아니다. 여하튼 유명한 폴란드 실험극 연출가 그로토프스키의 이름 하나 머릿속에 새기고 폴란드에 갔던 것 같다. 말이 안 되니 처음에는 살이 쪽 빠지더라.

-그쪽 사람들 기질과 맞았나.
=결혼식 풍경이 생각나는데, 말 그대로 신부 웨딩드레스가 까맣게 될 정도로 밤새 논다. <아버지의 초상>이라는 내 단편영화가 결혼식에 관한 것이었다. 결혼식 날 딸을 시집보내는 아버지의 마음을 그렸던 영화다. 사실 그때까지 폴란드 결혼식을 실제로 한번도 못 보고 찍은 건데 이 영화를 본 폴란드 사람들은 내가 폴란드 결혼식을 마스터했다고 하더라. 폴란드 사람들은 사랑에 빠져도 확 빠진다. 한없이 인간적이고 그래서 치사스러운 면도 있고.

-본인의 러브스토리는 없었나.
=있었다. 다만 배우하고 사랑을 하면 안 된다는 걸 배웠지. 배우들이란 감정이 자유로운 반면 자기감정에 속는 이들이라 뭔가 실제로 좋아하는 원래 감정보다 허용도가 더 높다. 그게 낭만적이긴 하지만….

-폴란드 배우를 말하는 거겠지.
=그럼 폴란드 배우지.

-당시 한국 유학생들은 얼마나 있었나.
=그때 문승욱 감독은 이미 한국 간 뒤였고, 그리고 송일곤 감독하고는 인연이 깊다. 나보다 한 학년 위였는데, 일곤씨 광고 출연할 때 내가 통역했다. 그 아르바이트해서 술도 많이 먹었다. 내 다음 학년으로는 <말아톤> <Mr. 로빈 꼬시기> 촬영한 권혁준 촬영감독이 있었다.

-단편 중에는 <언젠가>가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사연이 하나 있다. 미쟝센영화제 출품했을 때 허진호 감독이 심사위원이었는데 내 영화를 좋게 보셔서 필름으로 보고 싶어 상영장에도 왔었다. 그런데 그때 프린트가 미국 어느 영화제 출품되어 있던 상태라 미국에서 와야 했는데 도중에 교통사고가 난 거다. 사람은 멀쩡했는데, 단지 프린트를 못 찾는 거지. 그래서 미쟝센 때는 그냥 DV로 틀었다. 아쉽긴 했는데, 그렇다고 내가 뭐 미국으로 날아갈 수도 없는 일이고. 부산에서는 필름으로 틀었다.

-늦은 장편 데뷔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다. 단편들 반응이 좋고 해서 데뷔를 좀 빨리 할 줄 알았지. (웃음) 마지막 단편 만들고 6년 됐으니까, 음… 정말 오래됐네.

-짧은 기간이 아니다.
=그러게, 산에 가서 도를 닦았나, 나 참. 무엇보다 시스템을 익히는 데 오래 걸린 것 같다. 원래 이 영화 전에 <킬러의 치킨집>이라고 부산 NDIF 지원작도 있었다. 그 작품으로 영진위에서 시나리오 개발비 지원금도 받았었고. 국내 영화사와 작업을 진행했는데, 내가 생각하는 것과 방향이 많이 다르다는 걸 깨닫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 것 같다. 지금은 그런 걸 깨닫는 시간이 점차 짧아지니 다행이다. <열세살, 수아>도 처음에 수필름이 아닌 다른 영화사와 얘기할 때는 장르적으로 접근하자는 이야기를 했었다. 그래서 관두게 됐다. 그 다음에 본능적으로 칸 레지던스 인 파리에 지원을 넣은 거다.

-레지던스 인 파리란 정확히 어떤 프로그램인가.
=칸영화제가 전적으로 신인감독에게 자유를 주고 시나리오를 쓰는 데 필요한 모든 걸 제공하는 프로그램이다. 몽마르트르 언덕 아래 있는 엄청나게 좋은 집을 빌려 감독 여섯명에게 각각 방을 주고 4개월 반 동안 시나리오 작업에 필요한 모든 걸 지원해주는 거다. 한달에 생활비도 900유로씩 주면서. 마땅히 해야 할 목표치가 정해져 있지는 않았다. 첫 장편과 두 번째 장편까지 지원이 가능하다. 재능있는 감독들을 보호해주는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다. 2005년 10월부터 2006년 2월까지 그렇게 파리에서 작업했고, 돌아와서 운좋게 제작사 ‘수필름’과 이야기가 잘된 거다. 수필름 민진수 대표가 민규동 감독 동생이고, 민규동 감독과는 때마다 얼굴 보며 지내는 사이고, 또 민 감독 와이프하고 나하고는 절친한 친구다.

-그럼 <열세살, 수아>에 대한 애초 생각은 어떻게 시작된 것인가.
=2003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다는 일이 서른이 넘은 나도 감당이 안 되는 일이라는 걸 알았다. 내가 아버지와 각별했던 사이라는 걸 아는 주변에서는 내 걱정을 많이 했다. 너무 사랑했던 사람이 그렇게 되니 눈물도 안 났다.

-그 느낌을 성인의 시각으로 표현할 수도 있었을 텐데 사춘기 소녀의 감성으로 동기화했다.
=이 영화는 표면상으로 서울로 엄마를 찾아가려는 아이의 이야기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아빠의 죽음을 아이가 받아들이고, 결국 엄마와 어떻게 살아가게 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극복의 과정이 아이이기 때문에 좀더 투명하게 보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이야기를 내 동생과 많이 했다. “우리도 이렇게 힘든데, 아이들이라면 얼마나 힘들까, 그들은 더 까칠해질 테고 모가 나겠지?” 하면서. 아, 내 동생은 영화에서 기차타고 서울 가는 축구 코치로 출연했다. 그리고 기차 안에서 수아에게 땅콩주는 아주머니는 내 친엄마다.

-이 영화는 딸과 어머니의 관계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영화에 출연까지 한 본인 어머니는 어떤 분인가.
=아빠 돌아가시고 나서야 엄마의 존재를 많이 느끼게 된 것 같다. 엄마는 워낙 용감한 사람이다 보니 그전에는 아빠보다 관심이 덜했던 게 사실인데, 내가 엄마를 깨닫는 과정이 있었던 거다. 여러 결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런 내 감정이 영화에도 들어가지 않았나 싶다. 프로듀서가 처음 시나리오 읽을 때 그 땅콩 아줌마를 나로 생각했었다고 하더라. 내가 그렇게 늙었나 하면서도 맞는다면 해야지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차에, 촬영 일정도 너무 빡빡하고 해서 도저히 못할 것 같아 촬영 전날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 한다고 하실 줄 알았더니 웬걸, 안 시켰으면 큰일날 뻔했다. 그럼 당연히 하지, 이러더라. 촬영 전날 밤에 시나리오 읽고, 그 다음날 촬영한 건데도 “땅콩 좀 더 먹어” 이런 애드리브까지 치더라니까. 그 애드리브에 사람들이 웃는다는 것에 얼마나 자랑스러워하시는지 원. 우리집이 워낙 무대 체질이라 동생도 매번 물어본다. “오늘도 김 코치 나오는 장면에서 관객이 웃었나”라면서.

-주인공 수아를 맡은 세영이는 처음 보고 같은 사람인지 잘 모를 정도였다. 감독의 의도가 작용했을 거다.
=민규동 감독이 똘똘한 애라고 소개했을 때 한 가지, 애가 너무 예뻐서 좀 망설였다. 그런데 만나서 처음에는 쑥스러워하더니 친해지고 나니 까불기도 하더라. 연예계에서 6년이나 있던 애가 그렇게 순수하기란 쉽지 않다. 의상과 분장의 협공 끝에 애를 그렇게 망쳐놓은 건데, 성공적이지 않나. 모두가 못 알아볼 정도로 평범하게 보이니까.

-나이 어린 주인공의 이야기와 그 나이 또래의 배우를 다룰 때 좀더 신경써야 했던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어제가 마지막 무대 인사였다. 근데 이 녀석이 울더라. 나도 울컥해지고. 화장실에 같이 갔는데, 세영이가 말하기를, “감독님 제 연기가 모자랐는데도 포기하고 그냥 넘어간 적은 없으세요”라고 물어왔다. 어머니 말 들어보니까 내가 시간없어 그냥 넘어가준 장면들이 있다고 세영이가 생각한다더라. 이렇게 말해줬다. “너는 어떤 감정을 너무 크게 느껴준다. 그 감정을 제어하고 죽이는 게 더 힘든 거다”라고. 영화 속 콘서트장 장면에서는 스탭들도 울었을 정도로 세영이 연기가 좋았다. 그런데 그 감정이 너무 폭발하는 게 도리어 조심해야 할 부분이었던 거다. 그래서 내가 생각한 건 이 아이는 뭔가 감정을 불러 일으켜주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제어해주는 게 중요하구나라는 걸 알게 된 거다.

-어떤 연출 스타일을 지향하는 편인가.
=HD로 찍는데도 테이크를 많이 안 가니까 스탭들이 감독님은 HD인데 왜 이렇게 테이크를 적게 가냐고 했다더라. 상미씨 김밥 써는 장면은 한 테이크 만에 오케이했다. 그때 미술팀이 나를 얼마나 미워했는지. 나는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것만 이루려고 한다. 유연성있게 하는 편이다.

-<씨네21>에 실린 추상미씨 인터뷰를 보니 독해야 할 감독이 많이 물러난 것 같다는 뉘앙스가 섞여 있는 것 같던데.
=나는 그렇게 읽지 않았다. 그 인터뷰하기 전날에도 우리는 서로 문자로 사전정보를 주고받아서 잘 알고 있다. 물론 스탭들 중에 의심했던 사람은 있었겠지만, 영화보고 나서는 그런 말 잘 안 한다.

-특히 흡족한 장면은 무엇인가.
=수아가 경찰서 갔다 와서 엄마에게 혼나고 나자 아버지 환상장면 나오지 않나. 카메라가 돌아가면 상복 입은 엄마가 등장하고. 그 장면이 시나리오 때 내가 느낀 감정과 똑같이 나왔다. 미묘한 감정을 느끼게 해주는 장면. 수아가 느끼는 괴리감이 잘 드러났다고 생각한다.

-삶의 어떤 점들에 관심이 자주 가는 편인가.
=현장에 놀러와서 본 권혁준 촬영감독이 이런 말을 했다. “이거 희정씨가 잘하는 거네”라고. 그건 바로 현실과 판타지를 오가는 거다. 기억을 잘 직조하는 것,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를 느끼는 것 등이다. 다음 영화도 그런 거다. 제목은 <청포도 사탕>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친구 세명 중 한명이 사고로 죽고 나머지 둘은 나중에 어른이 돼서 우연히 만나게 된다. 그런데 죽은 친구가 항상 이 둘 사이를 유지시켜주던 사람이다. 성인이 된 이들에게 죽은 친구가 예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이야기다. 천성에 대한 이야기랄까. 이번 영화는 내 인덕이 많아 잘됐지만, 이런 또 내 자랑이네. 하여간 다음 영화 역시 그럴 거라 보긴 힘들어서 이번에 배운 한국적 시스템을 바탕으로 다음 작품 때는 좀더 치밀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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