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그전에는 많이 놀았어요.” 밤을 꼴딱 새고 온데다 그 뒤로도 줄줄이 스케줄. 미처 눈을 다 뜨지 못하고 스튜디오 문을 여는 한지민에게 “너무 힘들죠? 쉬고 싶지 않아요?”라고 했더니 “이전에 충분히 쉴 만큼 쉬었다”며 도리도리다. 외려 촬영에 들어가선 사진기자를 도와 하얀 망사천을 들고 있는 기자를 힐끗 보더니 “NG 내면 안 돼요!”라고 호통까지 내리친다. 매번 똑 부러지고 야무진 캐릭터를 연기했던 것과 비교해 <해부학교실>의 선화는 한지민이 꺼내든 의외의 카드. 카데바의 저주 앞에서 흰 의사 가운 입고 벌벌 떠는 공포영화여서만은 아니다. 그의 표현처럼 “중심에 있되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그래서 더욱 묘한” 인물이다. <청연>에 이어 두 번째 영화로 공포심리극 <해부학교실>(7월12일 개봉)을 택한 한지민의 속마음을 조금 캐봤다.
-<경성스캔들> 촬영 끝내고 합천에서 곧바로 올라와서 피곤하겠다.
=한숨도 못 잤다.
-차에서 자면 되지 않나.
=드라마에서 입을 의상 고민 때문에 잠이 와야지.
-의상을 직접 결정하나.
=아니. 미워도 주는 대로 입는 편인데(웃음) 이번엔 좀 다르다. 굉장히 중요한 의상이다. 극중 여경이라는 인물이 커피도 안 마시는 아이다. 매번 유관순 복장만 하고 다니고. 그러다 모던걸로 변신해서 짠, 하고 충격을 줘야 하고 상대 남자의 넋을 빼놓아야 하다보니.
-촬영현장에서 봤을 때 먼저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해서 당황스러웠다. 누군지도 안 밝혔는데.
=인사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현장에서도 어린 친구들이 인사 안 하면 인사해야지, 감사해야지 가르치는 편이다.
-되게 반듯한 집안에서 자랐나보다.
=할머니, 할아버지랑 같이 살아서 그럴 거다. 어리광도 많고, 애교도 많다. 물론 막내라서 고집도 좀 있고. 집에서는 내가 대장이다. 어려서부터 엄마, 아빠가 싸우면 혼내는 편이고. 할아버지 누워 계실 때는 내가 안심시켜드려야 마음 진정하셨고. 언니 늦게 들어오면 혼내고. 언니는 매번 엄마도 가만있는데 왜 네가 난리냐고 그러고. 지금은 많이 나아졌는데 좀 고지식하고 답답한 편이다.
-스탭들을 살갑게 대하더라.
=한팀이니까. <부활> 때 감독님이 그러더라. 꼬마 스탭들 이름 외우라고. 이름 불러주면 그들이 힘을 낸다고. 이름 부르고 친해지면 배우와 스탭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친구, 동생, 누나가 되는 거다. 내가 꼽는 최고는 즐겁게 일하자다. 시청률이 안 좋고 흥행이 안 돼도 우울해하지 않는다. 아무리 결과가 좋지 않아도 마음맞지 않는 사람들과 하는 것보다 더 낫다.
-포스터 촬영 때는 스탭들이 대거 구경왔다던데.
=오랜만에 얼굴도 좀 볼 겸 다들 오라고 했더니 정말 다 왔다. 대부분 동갑내기 스탭들이다.
-<올인>에서 송혜교의 아역으로 데뷔했다. 실제 나이 차이는 1살밖에 안 나는데.
=어려 보여서 데뷔할 수 있었다. 물론 일을 하면서 너무 어려 보여서 불리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아무래도 멜로가 많다 보니까. 하지만 주위에서 너도 나이 먹어봐라, 배부른 소리 한다고 하신다.
-학교 선생님의 추천으로 데뷔했다.
=짧은 버전으로 듣고 싶나, 긴 버전으로 듣고 싶나. (긴 버전이라고 했더니) 다들 이야기해줘도 너무 길어서 안 쓴다. 신기해하면서도. 내가 봐도 무슨 만화책에 나오는 이야기 같다. 중3 때 갑자기 우리 학교가 남녀공학이 됐다… (어쩔 수 없이 중략)… 그 선생님 집에 놀러간 적이 있는데, 사모님의 친언니가 매니저였다. 지금도 같이 일하는데 이제 가족 같은 분이다. 신기하지 않나. 남녀공학이 안 됐으면 데뷔 못했을 텐데.
-연극영화과에 왜 안 갔나.
=연기를 못해서 못 갔지. 사회사업 관련 학과에 진학한 걸 후회하진 않는다. 사람을 다루는 학문이니까.
-<청연>에서는 조연이었다. 조연들은 대개 최종편집 과정에서 많이 잘린 것에 굉장한 불만을 표시한다.
=촬영 때는 잔뜩 겁먹었다. 자신감도 없었다. 그나마 장진영, 김주혁 선배님이 있어서. 저 뒤에 숨어서 연기하면 되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막상 개봉 때가 되니까 내가 힘내서 찍은 장면들이 기다려지더라. 그리고 잘려나간 컷들을 확인하면서 섭섭했다. 옆에서 꼭 필요한 장면이었다면 감독님이 넣었겠지, 라고 매니저 언니가 다독였지만 그때는 서운했다.
-<해부학교실>은 어땠나. 개봉이 한달도 안 남았는데.
=주연이라고 해도 잘렸을지 모른다. 편집실에 가서 감독님 옆에서 감시하고 싶었다. (웃음) <청연>과 비교하면 <해부학교실>은 반장 같다. 책임이나 부담이 더한 게 사실이다.
-잘하면 좋지만 못하면 두배로 혼나잖나.
=마흔 되고 오십 돼서 연륜이 쌓여도 마찬가지일 거다. 아무리 잘해도 누군가에게 손가락질받을 수 있다. 아무리 못해도 누군가는 박수쳐줄 수 있다. 물론 뼈아픈 지적이 있다면 달게 받아야지. 하지만 내가 좋은 점이 하나 있다. 어떻게든 좋은 쪽으로 밝게 생각한다는 거.
-감독들은 배우 입장에선 얄미운 존재들이다. 손태웅 감독은 어떤가. 잘 맞았나.
=녹음기 좀 꺼달라. (웃음) 극중 선화라는 인물은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인물이다. 사건을 해결하는 중심에 서 있지만 말이다. 대개 시나리오 받으면 내 것부터 뒤져보는 습관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앞에서부터 읽지 않으면 공포스런 느낌이 나지 않는다고 해서 처음부터 읽었다. 그런데 내가 잘 못하면 장면마다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게 아닐까 우려가 되더라. 그런데 감독님은 매번 나보고 자꾸 눌러서 가라고 하시고. 선화의 감정이 되게 중요한 부분이라고 봤는데 바스트를 잡는 게 아니라 감독님은 오버 더 풀 숏으로 바라보시니까. 내가 원하는 감정으로도 찍긴 했는데 그걸 쓰셨는지는 모르겠다. (웃음)
-본인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말하는 편인가.
=처음부터는 아니고. 지금이야 많이 씩씩하지만. 드라마 <좋은 사람> 때는 덜컥 주연을 맡긴 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저걸 어떻게 했을까, 왜 했을까 싶다. 내가 다른 인물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자신이 없었다. 인물 안으로 못 들어가고 한지민으로만 계속 남아 있는 거다. 잘 못하면 다른 사람 보기 미안해서 그냥 오케이 나서 이 순간을 모면했으면 싶고. 어떻게든 악착같이 덤벼서 오케이를 받아낼 욕심 같은 게 부족했다. <대장금>에서 다시 조연을 자청했던 것도 선생님들에게서 좀더 많은 걸 배우고 싶어서였다. <대장금> 끝내고 단막극 <드라마시티>를 김흥수씨랑 했는데 감독님이 내던져주시더라. 마음대로 해보라고. 욕심이 그때 조금 일었고, 이후 <청연>을 하면서 불붙었는데, 그게 <해부학교실> 하면서 더 터진 것 같다.
-<대장금>에서 가장 도움을 준 선배는 누군가.
=이영애 선배님. 매 장면 욕심 안 부린 적이 없었다. 완벽하고 싶어하면서도 남들과 잘 어울리는 게 프로 같았다. 너무 피곤한 상태인데도 짜증 한번 안 내고 스탭들과 장난치는 걸 보면.
-이영애가 현장에서 스탭들과 장난을 친단 말인가.
=노래도 하고 춤도 추신다. 몰랐나?
-<해부학교실>은 온주완, 오태경 등 동료 배우들이 또래여서 더 편했을 것 같다.
=통하는 게 많다. 나이 든 선배들에겐 여쭤보고 싶어도 눈치보게 되잖나. 비슷한 또래니까 터놓고 가는 부분도 있고. 솔직히 나 이거 잘 못하는데라고 말하기가 쉽지 않은데 이번엔 달랐다. 여기서 내가 ‘너무 못하지?’라고 서로 묻고. 얼마나 사이가 좋았냐면 자기 장면 끝나도 다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같이 식판에 밥 퍼서 먹었다.
-좀더 많은 경험을 해봤으면 연기에 도움이 됐을 것 같지 않나.
=나도 다시 살고 싶다. 저건 하지 말아야지가 아니라 당연히 안 하는 것인 줄 알고 지냈으니까. 지금 돌이켜보면 어리기 때문에 용서되는 것도 있잖나. 저거 하면 안 좋다고 짐작하는 것과 겪어보고 안 좋다고 말하는 것은 다르니까.
-좀더 젊은 나이라면 해보고 싶은 게 있나.
=좀더 어린 나이라고 해달라. 연애가 아닐까. 여대를 다니면서도 남자친구 만날 사람은 다 만나는데. 난 연애가 되게 유치한 거라고 생각했다. 지나고 보니까 좀 어린 나이에 누군가를 진지하게 만나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겠구나 싶다.
-앞으로 만나고 싶은 영화가 있나.
=무슨 장르라기보다 대배우라 불리는 선배님들과 영화작업을 해보고 싶다. 매니저 언니에게 그런다. 작은 역이라도 그런 거 하자고.
-그분들이 연기를 가르쳐주겠나.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 공부가 된다. 전도연 선배님이 촬영하다 말고 감정이 안 올라와서 촬영을 미룬 적이 있다고 들었다. 그때 정말 놀랐다. 그전까지는 자다가도 눈물 흘릴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눈물이 흐른다고 다가 아니구나. 눈물에도 감정이 있구나. 큰 배우들이 감정을 잡아가는 걸 옆에서 구경하고 싶어 죽겠다.
-콤플렉스가 있나.
=다 있지. 작은 체구 이야길 많이들 하신다. 5cm만 더 컸으면 좋겠다 싶고. 하지만 5cm가 더 작았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다. 어차피 난 배우다. 그걸 메우지 못하면 배우 아니잖나. 그래도 내 눈동자는 괜찮지 않나? 메이크업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지는데. 내 눈동자는 그 위에 뭘 입혀도 또 다른 색깔을 내는 도화지 같아서 좋다. 솔직히 내세울 게 없어서 한 자랑이니 눈감아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