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의 이매진]
[진중권의 이매진] 영원한 소년이 꾸는 꿈
2007-07-13
글 : 진중권 (문화평론가)
꿈의 해석에 반대하는 영화 <수면의 과학>, 소년의 꿈이 의미하는 바는?

동네에서 무당이 굿을 한다. 무릎 아래가 잘린 채 피를 흘리며 장단에 맞춰 미친 듯 춤을 춘다. 다리가 잘려나간 무릎에서는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흰자위를 드러낸 채 두눈은 이미 다른 세계를 우러른다. 뒷마당에는 화덕에 양은솥이 올려져 있고, 그 안에는 잘려나간 무당의 두 다리가 들어 있었다. 아직까지 머릿속에 남아 있는 어린 시절의 영상이다.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 하지만 꿈에서 본 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선명하다. 시각적으로, 청각적으로. 심지어 삶아지는 다리에서 풍기는 역겨운 냄새까지 코끝에 걸린다. 어린 시절의 기억에는 이렇게 현실이라고 믿을 수 없는 영상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때 세계는 꿈과 현실이 하나로 뒤엉켜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흔히 ‘백일몽’이라고 부른다.

아득한 옛날, 꿈은 현실이고 현실은 꿈이었다. 주술을 통해 꿈은 현실이 되고, 현실은 꿈속에 예고되었다. 프레이저는 주술을 동종주술과 감염주술로 구별한다. 주술의 이 두 형태는 프로이트가 말하는 꿈의 두 원리, 즉 전이와 응축을 닮았고, 이는 다시 야콥슨이 말하는 시작(詩作)의 두 원리, 즉 은유와 환유를 닮았다. 인류의 유년기에 현실은 ‘꿈’이자 ‘시’였다.

초현실주의

백일몽은 특히 예술가들에게 빈번히 나타난다. 살바도르 달리는 벌건 대낮에 꿈을 보곤 했다. 앙드레 브르통에게 공산주의 설교를 듣고 돌아온 어느 날, 그는 피아노 건반 위에서 화염에 휩싸인 조그만 레닌의 머리들을 본다. 달리의 작품은 온통 이와 비슷한 이미저리로 가득 차 있다. 어쩌면 초현실주의 전체가 어떤 백일몽의 시각화, 즉 꿈을 가시화한 것인지도 모른다.

<수면의 과학>은 ‘초현실주의적’이다. 꿈의 종류만큼이나 초현실주의에도 여러 방향이 있다. 스테판의 것은 어디에 속할까? 이 다 큰 아이의 백일몽은 달리보다는 마그리트의 것에 가깝다. 달리의 꿈에 성적 리비도가 넘친다면, 스테판은 여자친구에게 음담을 할 때조차도 어린아이다. 그것은 성이 뭔지도 모르면서 그저 어른들을 당혹시키기 위해 야한 소리를 하는 아이의 제스처일 뿐이다.

스테판의 이미저리 역시 마그리트의 것을 닮았다. 그의 손은 집채만큼 커져버리고, 욕조는 사무실의 책상 속에 박히고, 방에는 구름이 떠다니고, 수도꼭지는 셀로판지로 된 물을 토해놓는다. 이런 이미지 전략은 마그리트의 작품 속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가령 방 안을 가득 채운 커다란 꽃송이(‘크기의 변경’), 벽난로에서 튀어나오는 증기기관차(‘장소의 변경’), 거친 석재로 된 물고기(‘성질의 변경’) 등.

“아마도 초현실주의자나 다른 예술가들에게 받은 영향이겠지요. 하지만 당신도 꿈을 꿀 때 사물들의 자리가 뒤바뀌는 것을 많이 보잖아요. 두뇌는 정합성을 가진 수동적 세계지요. 하지만 두뇌가 엉뚱한 곳에서 뭔가 부적절한 것을 볼 때, 당신은 현실에 의문을 품게 됩니다. 바로 그때가 매우 창조적인 순간이죠.” 여기서 공드리가 말하는 것은 다다-초현실주의의 이른바 ‘낯설게 하기’ 기법이다.

해석에 반대한다

프로이트는 꿈의 다양성을 의미의 단일성으로 환원시킨다. 한마디로 꿈의 이미지는 검열을 피해 변장하고 나타난 억압된 욕망이라는 것. 하지만 꿈을 굳이 해석해야 할까? 마그리트는 거꾸로 나간다. 그는 일상적 사물을 낯설게 보이게 함으로써 의미의 단일성 속에 갇혀 있는 형상의 다양성을 풀어놓는다. 공드리도 마찬가지다. 그는 꿈을 해석하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다.

“나는 꿈의 신화학과 상징주의를 믿지 않아요. 나는 왜 모든 이가 똑같은 연상을 가져야 하죠? 나는 우리 모두가 각각 자신만의 연상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보편적인 연상이란 것도 있겠지요. 하지만 꿈에서 뱀을 보고 나서 사전을 펼쳐 설명을 찾는 것은 내게는 말이 안 되는 것 같아요.” 꿈에서 보편적, 신화적 원형을 읽는 것도 그의 관심은 아니다.

정신분석은 꿈을 개인적 무의식(프로이트)으로 ‘해석’하거나, 혹은 집단적 무의식(칼 융)의 ‘상징’으로 읽는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꿈은 욕망이나 상징을 표현하는 영화적 장치가 아니다. 미래를 예고하는 전조(前兆)도 아니다. ‘수면의 해석학’도 아니고, ‘수면의 신화학’도 아니고, ‘수면의 점성술’도 아니고, 굳이 말하자면 이것은 ‘수면의 과학’이다. “신화보다 과학이 더 재미있지요.”

꿈을 성욕의 은유(도상), 신화적 원형(상징), 혹은 미래의 전조(지표)로 푸는 것은, 꿈을 기호로 간주하는 것을 의미한다. 분석가나 점쟁이는 꿈을 기호로 간주하여, 거기서 하나의 의미(monosemie)를 확정하려 한다. 예술가는 다르다. 그는 거꾸로 일상의 사물을 꿈이라는 기계에 넣어 다양한 형상으로 변형하고 합성한다. <수면의 과학>은 ‘꿈의 기호학’이 아니다. ‘꿈의 제작학’이다.

꿈을 제작하는 스튜디오

“간단한 일이에요. 기억을 탐색해보세요. 그럼 언젠가 당신이 뱀과 접촉한 적이 있었던 게 생각날 거예요.” 공드리에게 꿈을 읽는 것은 심오한 의미(은유, 상징, 전조)를 찾는 게 아니라 그저 기억을 검색하는 문제일 뿐이다. “마치 머릿속의 지도를 보는 것 같아요. 거기에는 내가 태어나서 경험한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지요. 나는 매일 내 삶의 사건들의 바다 속으로 다이빙합니다. 아주 놀라운 체험이에요.”

머릿속의 지도 위에서, 기억의 바다 속에서 마주치는 모든 것들은 꿈의 재료가 된다. 스테판은 그것들을 냄비에 넣고 휘휘 저어 꿈의 스튜를 만든다. “우선 생각나는 것들을 모두 집어넣고요. 거기에 오늘 있었던 일들을 추가합니다.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조금 추가하세요. 오늘 무심코 들었던 노래들도요.” 스테판의 냄비는 연금술사의 포트라고 할 수 있다. 그 안에 들어간 잡다한 기억들은 화학적 변성을 일으켜 화려한 이미지로 다시 태어난다.

기억의 냄비에서 나온 꿈은 로테크(lowtech)를 이용한 저해상의 아날로그 영상으로 처리된다. 펠트 천으로 만든 인형들, 폐품으로 조립한 조잡한 장치들, 스톱모션애니메이션. 어린이 방송에 흔히 사용되는 것들이다. 이 유치한 이미지들은 여섯살에 고착된 스테판의 유아적 상상을 보여준다. 꿈의 세계를 고해상의 CGI로 처리했다면 영화는 초점을 잃었을 것이다.

꿈을 이루는 소품들은 직접 꿰매거나 조립해서 만든 것들. 거기에는 공작(工作)의 계기가 있다. 공작은 상상이 현실을 만나는 지점이다. ‘스테판TV’의 스튜디오가 상상과 현실을 잇는 통로이듯이, 공작은 상상에서 현실로 나가고, 현실에서 상상으로 들어가는 아이들의 인터페이스다. 스테판의 원체험을 이루는 기억에서도 그는 아버지와 납땜인두를 들고 뭔가를 만든다.

영원한 소년

이른바 ‘재난학’(disastrology)으로 스테판은 달력을 만든다. 끔찍한 참사를 달력의 소재로 사용하는 역설은 예상을 깨고 엄청난 성공을 거둔다. 난센스가 창의성의 원천이 된 것이다. 한편, 삼차원 현실을 3D로 보여주는 안경은 동어반복에 해당한다. 이 난센스 역시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유쾌한 조크가 된다. 하지만 이렇게 일상에서 벗어난(eccentric) 사람이 현실에 적응하기란 힘들다.

스테판에게 스테파니는 현실원리를 대변한다. “현실은 이미 3D야.” 그는 그녀를 통해서만 현실과 화해한다. 하지만 이 사랑은 결코 이루어질 수가 없다. 왜? 그것은 성애가 아니기 때문이다. 스테판에게 그녀는 “아버지를 생각나게 한다”. 게다가 타자애도 아니다. “너는 나의 창의성을 칭찬해줘야 해.” 스테파니에 대한 사랑은 자기애의 연장일 뿐이다.

자기가 두려워하는 상상을 실재로 둔갑시켜놓고 스테판은 강박적으로 말한다. “너는 나를 좋아하지 않아.” 토라진 아이처럼 울며 보채다 제가 원하는 것과는 반대로 행동하다 일을 그르치고, 이 모두는 스테파니를 지치게 한다. 스테판의 사랑은 현실에서는 벽에 부딪힌다. 심리적 방어기제일까? 이때 스테판은 꿈을 꾸기 시작하고, 거기서 비로소 ‘골든 포니 보이’를 타고 그녀와 하나가 된다.

<수면의 과학>이 자전적 영화임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영화에서 스테판은 감독처럼 창의성에 넘치는 어떤 인간 유형을 대표한다. 나이가 들어도 결코 늙지 않는 ‘영원한 소년’. 감독은 말한다. “나는 언제나 열두살이었다.” 그처럼 우리도 한번은 열두살이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슬프다. 어른이 된 피터팬을 다룬 어느 영화 속 대사만큼이나 무지 서글프다. “Peter, you’ve grown 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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