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과 열정 사이]
[냉정과 열정 사이] 익숙함의 울타리 안에서
2007-07-20
글 : 김은형 (한겨레 esc 팀장)
가족의 익숙함이 오히려 불편함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준벅>

가족은 왜 가족일까. 피를 나눠서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위로받을 수 있어서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나를 먹여살려주니까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준벅>을 보면 익숙해서 가족이라는 생각이 든다.

익숙하다는 건 친근하다는 것과 다른 말이다. 친근하지 않아도 거북하고 싫어도 익숙해질 수는 있다. <준벅>에서 메들린의 남편 조지네 가족들처럼 말이다. 조지의 동생 조니는 정서불안에 뭔가 심하게 뒤틀려 있는 사람으로 만삭의 아내, 애슐리를 힘들게 한다. 퉁명스런 어머니와 소극적인 아버지, 그리고 조증 기운이 있어 보이는 애슐리까지 어쩐지 물과 기름처럼 떠 보이지만 가족의 틀 안에서 그들의 삶은 일정한 속도로 흘러간다. 조지도 마찬가지다. 3년 만에 찾아온 집이지만, 그리고 한눈에 봐도 도시사람인 그와 가족들은 전혀 다르지만 그는 바로 이 가족 안에 스며든다. 하지만 메들린은 다르다. 처음 본 시댁 식구가 당연히 익숙할 수 없고 그녀는 친근해지려고 노력하지만 익숙함의 울타리를 무너뜨리는 건 쉽지 않다.

또 익숙함이라는 건 자석과도 같아서 한쪽의 기운이 너무 세면 중간지점에 놓여 있는 사람의 성격까지 바꿔놓는다. 이 영화에서 조지가 마을 사람들을 만난 자리에서 찬송가를 부르던 장면, 정확히 거기서 노래하는 조지를 쳐다보던 메들린이 잊혀지지 않는다. 보수적인 기독교 동네에서 자란 조지는 도시 생활을 하면서 아마도 교회에 나가지 않는 무신론자가 됐겠지만 식구들, 그리고 확장된 식구들인 오랜 이웃들의 요청으로 찬송가를 부른다. 그때 메들린은 세상에서 가장 가깝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한없이 낯설게 보이는 경험을 했을 것이다. 나의 무리, 내 편, 내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들과 기막힌 조화를 이룰 때 느끼는 난감함이나 당혹스러움, 이런 것처럼 사람을 외롭게 만드는 것도 흔치 않다. 메들린은 자신만 떼어두고 애슐리의 출산을 도우러 간 시어머니보다 시댁 식구나 이웃들과 어울려 행복하게 노래하는 남편에게 말로 설명하기 힘든 배신감을 느꼈을 것 같다.

가족이라는 말은 많은 것을 연상하게 만들지만 그 자체로는 가치중립적인 단어인 것처럼 익숙함이라는 단어도 마찬가지다. 처음에 이 가족의 익숙함은 무신경함의 다른 표현처럼 보인다. 폭파 직전의 히스테리 환자 같은 조니를 내버려두고, 그들 각자는 전혀 소통할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3년 만에 만난 가족들과 썩 어울려 보이는 조지조차 가족과 어떤 의미있는 대화를 나누는 건 아니다. 하지만 애슐리와 함께 병원에 몰려간 가족들은 아기의 죽음에 진심으로 슬퍼한다. 이 영화에서 가족간의 대화다운 대화를 보는 건 누운 애슐리와 간호하는 조지- 둘은 이 가계도에서도 가장 먼 관계다- 가 속내를 드러내고 위로를 건네는 장면이다. 물론 이것이 멀었던 가족들의 결속 내지 화해는 아니다. 조지는 메들린과 다시 떠난다. 익숙한 것은 역시 친한 것과는 다르고 내가 그곳에서 이미 멀리 이탈했을 때 익숙함은 오히려 불편한 것이 된다.

<준벅>은 낯섦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익숙한 것은 좋은 것이라는 관습적인 생각에는 낯선 것은 위험한 것이라는 편견도 포함돼 있다. 이를테면 애슐리의 낯선 행동과 친절은 초반 메들린을 당황하게 하고 관객을 불편하게 만든다. 하지만 가만 보면 이 영화에서 순연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의 진심을 보여주는 사람은 애슐리뿐이다. 그 낯선 행동들을 주책이나 덜떨어짐으로 보다가 그녀의 정확한 시선과 깊은 상처가 점점 더 크게 보일 때 가족을, 사람을, 관계를 한 종류의 단어로 재단하거나 설명하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무가치한 것인지 새삼 절감하게 된다.

애당초 가족이라는 특수관계를 어떤 형상으로 구체화하는 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엄마가 갑작스럽게 흐느끼는 장면 등 영화를 보면서 전혀 설명되지 않는 행동들은 우리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가족이 낯설어지는 순간이며 결국 그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겸허한 깨우침을 주는 순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영화는 그것이 무언가를 박박 우기지 않는 한 늘 새롭거나 흥미로울 수밖에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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