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 없이는 승리도 없다.” 인간과 오토봇의 연합은 이 빈곤한 청동기 철학으로 메가트론이 이끄는 디셉티콘 군대에 승리를 거둔다. 샘은 메가트론에게 큐브를 건네주는 대신 차라리 건물에서 떨어지기를 선택하고, 옵티머스 프라임 역시 파멸의 위험을 무릅쓰고 큐브를 자신의 가슴에 쏘아달라고 부탁한다. “로봇들에게서 영혼이 있음을 느낄 것이다.” 감독은 이렇게 말하나, 로봇에게서 느껴지는 영혼의 수준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어차피 주제의 견고함이나 플롯의 치밀함을 위한 영화가 아니잖은가. 포인트는 따로 있다. 그 동안 장난감을 모티브로 한 영화는 대개 저해상의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디지털 이미지는 손으로 그린 그림에 사진과 같은 생생함을 준다. 그리하여 이 영화는 과거라면 애니메이션으로나 봐야 했던 장면을, 실사를 방불케 하는 고해상으로 보여준다. 실제로 자동차, 휴대폰, 전투기가 로봇으로 변신하는 CGI는 꽤 봐줄 만하다.
‘변형’(transformation)은 디지털 시대를 이해하는 키워드다. 가령 컴퓨터로 스캔한 이미지를 사운드로 변환하여 출력하거나, 유전자의 배열을 바꾸어 생명체를 변형시키는 것은 이미 시대의 일상이다. 대중 역시 소프트웨어로 이미지의 변조와 합성을 오락으로 즐기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이 영화가 ‘변형’의 모티브를 어떻게 전개시키는지 잔뜩 기대하고 보았으나, 애초에 장난감에서 시작된 영화라 그런가? 생각보다 SF적 상상력은 외려 빈곤하다.
입체 애너그램
애너그램이란 게 있다. 낱말이나 문장의 철자를 바꾸어 새로운 낱말이나 문장으로 변형시키는 놀이다. 가령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빌라도가 예수에게 던지는 질문. “진리가 무엇이뇨?” (quid est veritas) 철자의 위치를 바꾸어놓으면, 물음에 대한 답이 얻어진다. “여기에 서 있는 그 사람이다.”(est vir qui adest) 이렇게 애너그램은 요소들의 배열을 바꿈으로써 한 낱말이나 문장 속에 감추어져 있던 잠재적 의미를 출현시킨다.
애너그램이 문장 속에 감추어진 잠재적 의미를 해방시킨다면, 사물 속에 감추어진 잠재적 형상을 해방시키는 놀이도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실제로 요소의 배열이 바뀌면서 새로운 형상으로 변신하도록 설계하는 것을 흔히 ‘변형 디자인’(transformative design)이라 부른다. 변신 로봇은 변형 디자인의 대표적 예라 할 수 있다. 가령 콜트 38구경이 부품들의 배열을 바꾸자 멋진 로봇으로 둔갑한다. 누가 권총 안에 로봇이 숨어 있다고 생각했겠는가?
트랜스포머처럼 스스로 몸을 움직이는 변신 로봇의 디자인은 기술적으로 훨씬 더 복잡하다. 외형만이 아니라, 내부 구동기관까지도 정합적으로 설계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동차로 작동하던 기계를 로봇으로 움직이려면 내부의 작동 메커니즘은 어때야 하는가? 영화는 이 난제에 어떤 기술적 해답을 제시할지 기대하고 보았으나, 감독은 그저 큐브에서 나오는 신비한 힘의 덕이라고 얼버무리고 넘어갈 모양이다. 기술적 문제에 마술적 해답?
로봇으로서 건축
최근 변형 디자인의 예를 곳곳에서 보게 된다. 가령 어느 미국의 건축가는 스스로 모습을 바꾸는 인도교를 설계한 바 있다. 이 다리는 바람에 반응하여 움직이는 여러 개의 터빈을 이용하여 다양한 모습으로 변신한다. 아직은 종이 위의 건축에 불과하지만, 최근 건축에서는 이처럼 사용자의 요구에 맞춰 형태를 바꾸는 변신건축(metamorphic architecture)의 실험이 활발히 일어나고 있다. 물론 디지털의 쌍방향성을 건축에 구현하기 위한 시도다.
“왜 건축은 우리와 함께 성장하지 못하는가?” 미국의 건축가 로버트 밀리스 켐프의 구상은 그보다 복잡하다. 그는 “스스로 복제하고, 스스로 유지하고, 스스로 적응하는” 건축을 실험하려 한다. 이렇게 건물을 “살아 있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의 방법은 건물 전체를 각자 자기 동력을 갖고 스스로 움직이는 작은 단위들로 모듈화하는 것이다. 각각의 모듈은 스스로 결합하고 분리하고 다시 결합함으로써 건물 전체가 매번 다른 모습으로 변신한다.
건물을 자라나게 하고 싶으면 시장에서 모듈을 구입해 첨가하면 된다. 마치 아이들이 추가로 레고 블록을 사서 제가 지은 건물을 더 정교하게 꾸미는 것과 마찬가지다. 각각의 모듈은 자기 동력을 갖고 스스로 움직이는 조그만 로봇이고, 그것들이 합쳐져 이루어내는 건물 역시 스스로 형성하는 거대한 로봇이다. 이 구상이 실현되면 우리는 인간을 닮은 로봇과 더불어(with) 사는 수준을 넘어 아예 건물을 닮은 로봇 속에서(in) 살게 될 것이다.
진화하는 로봇
트랜스포머들은 고도로 진화한 기계다. 사실 진화하는 인공생명은 주변에서 이미 흔히 접하는 현상이다. 가령 컴퓨터 바이러스를 생각해보라. 그것은 스스로 복제하고 증식하는 대표적인 인공생명으로 백신에 내성을 키워가며 끝없이 진화해간다. 진짜 바이러스와 다른 게 있다면, 인공 바이러스의 경우 진화의 단계마다 아직 인간의 힘을 빌려야 한다는 것. 하지만 언젠가 컴퓨터 바이러스 역시 아마도 스스로 진화하지 않을까?
인공생명은 대개 세포기계(cellular automaton)라는 소프트웨어로 존재한다. 켐프의 “움직이는 건축”은 이 세포기계를 하드웨어로 구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폰 노이만은 이미 수십년 전에 스스로 복제하는 로봇을 상상했다. 소프트웨어 세포기계는 가상공간에서 이미 스스로 진화하기 시작했다. 하드웨어 세포기계들도 언젠가 현실공간에서 스스로 진화하지 않을까? 이 상상력을 연장하면 스스로 진화하는 트랜스포머의 비전에 도달하게 된다.
진화에도 수준 차이가 있다. 가령 전갈 모양의 트랜스포머는 절단된 부위가 여전히 살아 움직인다. 하등동물이라 부분과 전체의 유기적 결합이 약하기 때문이다. 반면, 인간 형상을 한 트랜스포머는 다르다. 고도의 유기적 구조를 갖고 있어 절단된 부위가 자율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기계에 이 정도의 유기성을 부여하려면 아마도 나노로보틱스를 이용해 모듈을 세포수준의 극세 디자인을 해야 할 것이다.
인공지능과 DNA 컴퓨터
“인간을 죽여서는 안 돼.” 오토봇은 아직 아시모프의 로봇 3원칙에 충실하다. 어쩌면 디셉티콘이 더 진화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인간이 정한 원칙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살상을 금하는 게 오토봇의 자율적 판단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것은 인공생명이 도덕감까지 갖게 된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잔인성을 탓하는 동료에게 옵티머스 프라임이 말한다. “우리도 잔인하잖아.” 그는 반성능력까지 갖고 있다.
디셉티콘은 국방 네트워크의 방호벽을 단 몇 십초 만에 뚫는다. 이는 “슈퍼컴퓨터로도 200년이 걸릴 작업”이므로, 해커는 트랜스포머가 양자나 DNA 컴퓨터를 사용할 거라 추정한다. 메모리의 개발은 이미 전자의 한계에 육박했단다. 과학자들은 지금 양자 수준의 조작이 가능한 컴퓨터를 꿈꾸고 있다. 이미 빛에 반응하는 단백질에 정보를 저장하는 실험도 이루어졌다. 하드웨어에 DNA가 결합된 디지로그 컴퓨터가 탄생할 날도 멀지 않았다.
영화에서 트랜스포머는 큐브에서 동력을 얻는다. 영화는 이 에너지의 정체에 대해서는 별 얘기가 없다. 큐브와 접촉한 휴대폰과 자동차는 로봇으로 변신해 자율적으로 움직인다. 큐브가 에너지만이 아니라 작동 및 변신의 프로그램까지 제공하는 모양이다. 영화에서 큐브의 힘은 기술적 수행력이라기보다는 마술적 신통술에 가깝다.
현자의 돌
큐브는 ‘천상의 입방체’(lapsit exillis)에서 차용한 발상일 게다. ‘하늘에서 떨어진 돌’(lapsit ex coelis) 혹은 ‘현자의 돌’(lapis elixir)로 더 잘 알려진 이 돌은 다른 별에서 왔다고도 하고, 루시퍼의 왕관에서 떨어진 보석이라는 얘기도 있다. 어쨌든 이 돌로 연금술사는 평범한 재료를 금으로 변성하고, 마술사들은 사물 속에 든 마법의 힘을 발동시킨다. 영화는 기술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부분을 이 큐브의 마술에 맡겨버린다.
보슈의 환상적 그림에는 무기물과 유기물의 경계가 없다. 중세에서 르네상스까지 이어지는 이 우주적 변성이 디지털 시대에 기술의 힘으로 현실이 되고 있다. ‘마술적’ 상상력이 영화에서는 어떻게 ‘기술적’ 상상력으로 변성될까? 하지만 나를 영화관으로 데려간 이 기대는, 유감스럽게도 어린이용 완구에서 튀어나온 상상력에 걸기에는 지나치게 거창한 것으로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