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소식]
미국 독립영화의 잊혀진 정신을 발견하라
2007-07-13
글 : 이용철 (영화평론가)
<복수의 총성> <자유의 이차선> 등 회고전으로 만나는 몬테 헬먼의 세계

대부분 관객에게 몬테 헬먼은 존재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50년 가까이 영화를 만들어온 사람에게 혹독한 현실이지요. 일부 관객에게 헬먼은 싸구려 영화를 만드는 감독입니다. 데뷔작 <지하광산의 괴물 Beast from Haunted Cave>(1959)과 후기 작품인 <이구아나 Iguana>(1988)와 <고요한 밤, 끔찍한 밤 3 Silent Night, Deadly Night III>(1989)이 그나마 대중적으로 알려진 영화니까요(정작 판타스틱영화제에 어울리는 이들 작품이 이번 회고전에서는 빠졌다는군요). 유럽과 미국의 일부 평론가에게 헬먼은 중요한 미국 작가 중 한명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열렬한 후원도 지금껏 헬먼을 구원하진 못했습니다. 샘 페킨파에게 헬먼은 믿음직한 감독이었습니다. 그는 피터 보그다노비치의 영화를 지지한 평론가들이 헬먼의 <자유의 이차선 Two-Lane Blacktop>(1971)을 놓친 것에 화를 냈지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헬먼 영화의 회고전이 열린다고 합니다. 영화사에서 잊혀진 감독을 발견할, 기적 같은 기회가 아닐 수 없습니다.

로저 코먼 휘하에서 시작, B급영화 현장 누벼

1932년에 태어난 헬먼은 스탠퍼드 대학교와 UCLA에서 연극과 영화를 배웠습니다. 졸업 뒤에는 주로 연극무대에서 활동했고, 간간이 TV영화의 편집을 맡으며 영화와 관계를 맺기 시작합니다. 1957년, 로저 코먼과의 운명적인 만남은 그에게 감독 데뷔의 기회를 제공했죠. 그러나 두 사람의 만남이 꼭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어요. 코먼 휘하에서 영화를 시작한 프랜시스 코폴라, 마틴 스코시즈 등이 곧 둥지를 떠나 주류에 편입한 것과 달리, 헬먼은 코먼의 싸구려 영화들에 한동안 얽매였거든요. 헬먼은 기본적으로 작품을 가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이 원하는 작품을 연출하기 위해 그는 편집, 대타감독, 연기 등 다양한 일에 뛰어들기를 마다하지 않았어요. 그가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영화가 50편을 훌쩍 넘기게 된 사연은 그렇습니다. ‘큰물에서 큰 고기가 논다’는 말이 있지요. B급영화의 현장에서 벗어나지 못한 헬먼은 이 말을 뒤집기 위해 투쟁해야 했습니다.

헬먼이 대표작을 발표한 시기는 대략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 중반까지입니다. 당시는 평론가들이 아메리칸 뉴시네마를 주목하던 때였고, 영화제들은 미래의 작가를 미국에서 찾기 위해 혈안이던 시기였습니다. <LA 타임스>로부터 ‘할리우드의 숨겨진 보석’이라 평가받은 헬먼도 몇몇 영화제에 초청됐지만, 제작자와 얽힌 복잡한 사정은 그의 영화가 경쟁부문에 오르는 것을 번번이 가로막았습니다. 사실, 그의 영화가 세계는 물론 미국 내에서도 환대받지 못한 진짜 이유는 영화 안에 있을지 모릅니다. 미국식 작가영화를 표방한 작품들이 비평적 성공을 거둘 1970년 전후에, 헬먼이 내놓은 작품들은 전혀 다른 노선을 걷고 있었습니다. 다른 감독들이 장르영화의 전통에서 자유로워지고 있을 때, 그는 장르영화에 빚진 작품을 만들었고, 다른 감독들이 미국사회와 전통에 예리한 비판을 가할 때, 그는 보통 사람들의 목적 없는 삶을 주제로 삼았습니다. 그의 영화가 1970년대 미국 하층민의 삶을 진정으로 대변하고 있었다는 걸 눈치챈 사람은 적을 수밖에 없었죠.

이상향의 서부를 전복하는 ‘실존적 서부영화’

헬먼의 대표작은 서부영화이거나 서부영화의 관습을 따른 작품입니다. 존재의 위기에 처한 미국인을 서부영화에 투영했다는 의미에서, 혹자는 헬먼의 서부영화를 ‘실존적 서부영화’로 부릅니다. 미국의 서부는 단지 국토의 서쪽을 의미하는 곳이 아니에요. 유일한 미국 신화의 주체인 카우보이가 활약하는 공간이고, 개척정신을 꽃피운 공간이며, 미국인의 이상이 살아 숨쉬는 공간이지요. 헬먼은 신화적 공간 혹은 이상향으로서의 서부를 부정합니다. 죄 없는 카우보이가 도주의 여정에 오르고, (<바람 속의 질주 Ride in the Whirlwind>(1965)), 진실을 파악하지 못한 남자가 혼란을 겪고(<복수의 총성 The Shooting>(1967)), 어른들이 아이처럼 유치하게 경쟁하고(<자유의 이차선> <닭싸움꾼 Cockfighter>(1974)), 늙은 총잡이의 걸음은 느립니다(<차이나 9, 리버티 37 China 9, Liberty 37>(1978)). 그래요, 헬먼의 서부는 초라한 서부 사나이가 사는 공간이며, 헬먼은 서부의 진짜 얼굴을 보여주기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전복적인 서부영화를 본 적이 없어요. <바람 속의 질주>의 한 장면에서 카우보이가 늙은 여인에게 “서부는 여자에게 외로운 곳이 아닌가요?”라고 묻자, 그녀는 “남자에게도 그렇지요”라고 대답합니다. 결국 헬먼의 영화는 서부의 공간과 떠돌이 남자를 빌려, 인간이란 원초적으로 고독하고 고통받는 존재임을 기록한 게 아닌가 싶어요.

<자유의 이차선>
<바람 속의 질주>
<복수의 총성>
<닭싸움꾼>

헬먼의 영화는 목적지가 부재하는 로드무비이기도 합니다. 위에 언급한 서부영화는 물론, 전쟁영화인 <지옥행 비밀지령 Backdoor to Hell>(1964) 등 대부분의 영화에서 주인공은 길 위에 서 있습니다. 그들이 길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이상한 욕망이에요. <지옥행 비밀지령>의 주인공은 전쟁에 회의를 품으면서도 목숨을 건 작전을 감행합니다, <복수의 총성>의 주인공은 단지 호기심과 돈 때문에 여자가 계획한 복수에 동참합니다, <바람 속의 질주>의 주인공은 무죄를 밝히기보다 희망 없는 도피를 선택합니다, <자유의 이차선>의 주인공은 단지 길 위를 달리고 싶어 내기를 걸곤 합니다, <닭싸움꾼>의 주인공은 소유한 모든 것을 잃으면서도 닭싸움의 열정에서 빠져나올 생각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끊임없이 공간을 이동하지만, 안타깝게도 어느 곳에도 도착하지 못한답니다. 헬먼의 영화가 어떤 결론에 이르지 않고 항상 열려 있는 것은 그래서입니다. 헬먼이 고백했듯, 헬먼이 만든 모든 영화는 <고도를 기다리며>의 영향 아래 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등장해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는 내용은 그런 사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죽지 않고, 아무도 용서받지 못하며, 아무도 안식처를 찾지 못합니다. 헬먼에게 영화의 주인공들은 구원을 기다리며 제자리를 반복하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재현이었을 법합니다. <자유의 이차선>의 마지막 장면을 대표적인 예로 들게요. <자유의 이차선>은 정지 화면의 필름이 불타면서 끝납니다. 베트남전과 워터게이트로 대표되는 시절, 미국인은 폭동, 암살, 마약, 전쟁, 정치적 부패를 통과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방황하는 미국사회에서 정체성을 잃은 개인의 좌표를 <자유의 이차선>보다 잘 표현한 영화는 드물지 싶네요.

방황하는 미국의 정체성 그려낸 독립영화의 새로운 정신

헬먼 영화의 또 다른 중요성은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있습니다. 동시대의 미국 작가들이 실패한 부분이었지요. 아메리칸 뉴시네마의 작가들은 영웅적이고 낭만적인 주인공 대신 보통 사람들을 그리기는 했지만, 그들은 영화의 인물과 소통을 이뤄내진 못했습니다. 그들은 성적으로 억압받고, 반쯤 미쳐 있으며, 마약에 의존하는 캐릭터와 친구가 되진 못했으니까요. 반면 헬먼은 초라한 인물을 비웃지 않습니다. 겉으로 담담한 톤을 일관되게 유지하는 헬먼의 영화는 주인공의 감정을 충실하게 따라가고, 그들의 욕망이 작은 성취를 거두도록 응원하는 걸 잊지 않아요. 샘 페킨파와 돈 시겔류의 남성영화는 헬먼과 만나면서 전혀 새로운 결과를 낳았던 거죠. 헬먼이 이런 성과를 거둔 데는 워런 오츠가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헬먼의 원래 파트너는 잭 니콜슨이었어요. 니콜슨은 연극무대의 인연을 이어 네편의 헬먼 영화에서 각본, 제작, 연기 등을 맡았으나, <이지 라이더 Easy Rider>(1969)의 성공으로 스타가 되면서 헬먼의 곁을 떠나버렸지요. 니콜슨의 공백을 메운 사람이 오츠였고요. 결코 주류에 끼지 않았던 성향이나, 허세를 쓸쓸함으로 보상받을 것 같은 외모는, 오츠가 헬먼의 페르소나로 남기에 더없이 어울리는 것이었죠. 죽기 전날, 헬먼에게 전화를 걸어 심장마비에 걸렸다고 농담했던 오츠는 다음날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페킨파와 헬먼 등 일부 감독에게만 자신의 진가를 바친 외톨이 배우의 모습은 어찌 그리도 헬먼의 영화와 닮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쿠엔틴 타란티노가 데뷔작 <저수지의 개들>의 제작비를 구하지 못하고 있을 때 손을 내민 사람이 누군지 아세요? 그리고 빈센트 갈로의 데뷔작 <버팔로 66>에 영감을 주었으며, 갈로가 같이 작업하기를 희망했던 사람이 누군지 아세요? 바로 몬테 헬먼입니다. 현재 미국 독립영화의 양 진영을 대표하는 작가의 이력에서 헬먼을 발견하는 건 의미 있는 일입니다. 미국의 B급영화와 진중한 독립영화의 선배는 그렇게 부활하고 있습니다. 지금껏 그 자리에서 에드거 울머만 기억하고 있었다면 이제 몬테 헬먼의 이름을 더하길 바랍니다. 헬먼이라는 이름은 아메리칸 뉴시네마의 이면이고 B급영화의 새로운 세계이고, 독립영화의 잊혀진 정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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