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데릭 백의 선물> A Tribute to Frederic Back
프레데릭 백은 단순한 생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몸소 증명해온 사람이다. 철학자와 예술가는 우리가 몰랐던 걸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다.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걸 누군가가 표현하면 우리는 반응하고 지혜로 간직하는 것이다. 백은 ‘자연과 생명’의 중요성을 한결같이 믿었으며, 그의 작품은 아름다운 이미지에 소중한 메시지를 담아왔다. 백은 장 지오노의 소설 <나무를 심은 사람>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면서 원작에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직접 구상한 것들로 작업하던 백은 지오노의 원작에서 자신의 그릇을 채워줄 동지를 발견했다. 백은 <나무를…>의 주인공 엘제아르 부피에와 비슷하다. 말수는 적고 행동으로 실천한 두 사람이다. 불모의 땅에서 자연의 섭리에 맞춰 수십년간 나무를 키운 노인은 쉰을 넘긴 나이에 꿈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서두르지도 않았다. 라디오 캐나다 방송국에서 일하던 백이 대표작을 만들기 시작한 것도 쉰이 가까울 때였다. 고독에 싸여 일에 몰두하느라 부피에가 말을 잃은 것처럼, 한 작품에 몇년의 시간을 바친 백은 한쪽 눈의 시력을 상실했다(<크락>의 작업 도중 눈에 들어간 고정액과 피로와 스트레스가 겹친 결과였다). 백의 작품을 보며 배워야 할 또 다른 가치는, 삶을 대하는 그의 자세일 게다.
백의 대표작을 묶은 작품집이 나왔다. 네장의 DVD가 담긴 세트 이름은 <프레데릭 백의 선물>이다. 3D애니메이션의 득세 속에 인간의 손길이 따뜻하게 전달되는 백의 애니메이션은 그야말로 선물 이상의 진가를 발휘한다. 색연필 질감의 후기작들에 익숙한 사람에겐 전기 작품들은 발견이다. 세계의 아이들이 마법사를 무찌르고 태양을 구한다는 <아브라카다브라>(1970), 인간과 동물이 소통하던 시절에 그들이 힘을 합쳐 천둥의 신으로부터 불을 찾는 이야기 <이논 혹은 불의 정복>(1971), 인디언 꼬마들이 자연의 정령과 보내는 사계절의 스케치 <새의 창조>(1973), 자연을 파괴하는 어릿광대를 무찌르는 아이들을 그린 <환상?>(1974), 축제 퍼레이드의 이면을 다룬 <타라타타!>(1977)는 모두 아이와 자연의 교감을 다루고 있어 교육용으로 그만이다. 안시, 히로시마 등의 영화제와 미국 아카데미에서 수상한 후기의 유명작과 재회하는 기쁨도 크다. <투 리엥>(1979)은 전환점이 된 작품이다. 이전까지 주로 잉크와 물감으로 작업하던 백은 불투명 아세테이트에 크레용과 색연필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애니메이션에서 그림의 질이 희생되는 게 아쉬웠던 백은 그들 재료로 풍부하고 부드러우며 역동성을 살린 세계를 창조하게 된다. 백의 사상과 언어를 집약한 초기형태인 <투 리엥>은 신과 인간의 관계를 유머있게 그렸고, 의자의 일생과 가족사를 연결해 근대 전후 문명과 사회의 변화,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기록한 <크락!>(1981)은 짧은 애니메이션이 서사시로 완성된 드문 예이며, 백에게 제2의 고향인 캐나다의 원대한 자연 예찬이자 자연을 정복했다고 믿는 인간을 비판한 <위대한 강>(1993)은 규모나 주제 면에서 그가 이른 경지를 목격할 수 있는 작품이다. 특이한 건, 몇 작품의 영어판과 프랑스어판 영상을 따로 수록했다는 점이다. 그중 <위대한 강>은 도널드 서덜런드가 내레이션을 맡은 영어판이 낫고, <나무를 심은 사람>은 필립 누아레가 드라마틱하게 진행한 프랑스어판과 크리스토퍼 플러머가 다정다감하게 감동을 전한 영어판 둘 다 좋다(한국어 더빙도 지원되지만 두 배우의 역량에는 못 미친다). 단, 영상의 특성상 장시간 시청을 하지 않기 바란다. 부록으로는 백과 그의 든든한 후원자인 위베르 티종의 인사말(2002년, 5분), <위대한 강>을 주제로 한 인터뷰(1993년, 12분), 장 지오노와의 인터뷰(1960년, 22분), <나무를 심은 사람>의 아카데미 수상 기념 인터뷰(1988년, 7분) 외에 보기 힘든 원화, 스케치 등이 작품별로 제공된다. 그리고 별도 디스크에 백과 나눈 인터뷰 두편(1987년, 32분/1994년, 28분)을 모아놓았다. 애니메이션 예술에 혼신을 바친 그는 퀘벡 지방의 전원에서 가족과 숲을 가꾸며 살고 있다. 그의 말대로 행복하고 만족스런 삶이란 그런 모습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