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영화읽기] 장르의 몰이해가 빚어낸 코미디
2007-07-26
글 : 김봉석 (영화평론가)
원작의 이야기는 가져왔지만, 원작의 메시지와 장르적 규칙 무시한 <검은집>의 한계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일본에서 1997년에 출간된 <검은집>은 90년대 이후 서구에서 확립된 ‘사이코패스’라는 개념을 전면적으로 도입한 소설이다. 인간과 똑같은 외양을 하고 있지만, 인간과는 전혀 다른 마음을 가진 존재인 사이코패스. <검은집>은 사이코패스가 도대체 어떤 존재인지를 충격적으로 폭로한다. 사이코패스의 실체를 보여주기 위해 기시 유스케가 고안한 스토리도 탁월하다. 보험조사원은 한 아이가 목을 매 자살한 현장을 보게 되고, 아이의 아빠가 아이를 죽인 것이라고 의심한다. 예상대로 남자는 이상한 행동을 보이며 보험조사원을 위협하지만, 진짜 ‘악마’는 남자의 뒤에 있던 여자였다. 소설 <검은집>에는 남자의 기이하고 폭력적인 행동에 놀라던 보험조사원이 진짜 범인을 알게 되면서 충격에 빠지는 과정이 아주 긴박하게 그려져 있다. <검은집>은 무엇보다 기본 설정과 구성 자체가 탁월한 소설이다.

<검은집>, 장르소설의 걸작

이처럼 장르소설의 걸작인 <검은집>을 영화로 만드는 것에는 분명한 이점이 있었다. 일단 소설의 기본 설정만으로도 관객에게 어필할 수 있다. 요즘 관객이 영화를 선택하는 일차적인 기준은 ‘흥미’다. 내용이나 소재에서 뭔가 대중의 관심을 끌 만한 요소가 있다면, 시사회의 평이 어떻건 상관없이 일단 관객이 몰린다. <검은집>은 ‘사이코패스’를 강조한 예고편이 효과적이었고, 황정민이란 스타가 출연했다는 점에서 주목도가 높았다. 또한 소설을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영화를 흥미진진하게 볼 수밖에 없다. 보험금을 타기 위해 자신의 아이를 죽인 남자, 보험회사에 와서 보이는 기묘한 행각과 보험조사원에게 가해지는 갖가지 폭력 등등 파격적인 스토리가 이어지기 때문이다. 영화 <검은집>을 보고 이야기가 재미있다, 라고 말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것은 좋은 원작을 택한 덕이다. 약간의 설정을 제외하고는 원작의 구성이 바뀐 것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원작의 힘이다.

그러나 이야기를 가져온 것 말고는 영화 <검은 집> 자체의 성과는 없다.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 하나는, 아이의 아버지가 보험회사에서 벌이는 기괴한 행각이다. 그 장면을 읽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좍 끼친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있으면 그 장면이 너무나 평면적으로 펼쳐진다. 박충배라는 인물에게서 별다른 섬뜩함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영상이 가진 압도적인 사실감이 영화 <검은집>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단지 소설의 장면을 단순한 영상으로 옮긴 것뿐이다. 그리고 너무나도 빨리, 급작스럽게 진짜 범인이 아내인 신이화라는 것을 알려준다. 박충배를 섬뜩한 사이코패스인 것처럼 그리면서 관객의 긴장을 고조시키다가, 반전을 통해 한순간에 모든 것을 신이화에게 몰아가야 하는 것이 스릴러라면 취해야 할 정석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저 박충배의 손을 자르는 신이화의 모습으로 만족한다. 소설의 이야기를 장면으로 이어붙이는 정도로 <검은집>은 흘러간다.

사이코패스는 초인이 아닌데

하지만 전반부는 그런 대로 참아줄 수 있다. 장르적 긴장을 위한 별다른 테크닉도 없지만, 심하게 원작을 망치지도 않았으니까. 그런데 폭력으로 일을 수행하는 특별 보험조사원이 신이화에게 당하는 장면을 보면서부터, 웃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폭력에는 이골이 나 있는 건장한 남자가 한쪽 발이 덫에 걸린다. 철로 건너편에 있던 신이화가 덫에 연결된 쇠사슬을 끌어당기자, 남자가 질질 끌려가고 결국 철로 위에 쓰러진 채 달려오는 기차에 치어 죽는다. 대체 이 장면을 믿으라고 만든 것일까? 사이코패스라고 해서 초인적인 힘을 가진 것은 아니다. 한쪽 발을 덫에 걸려 쓰지 못하고 극심한 고통을 느낀다 해도, 역시 한쪽 발이 불편한 가냘픈 여성이 끌어당기는 힘에 그대로 끌려갈 수 있는 걸까? 앉아서 상체 힘만으로도 대등하지 않을까? 철로까지 끌려간다 해도 신이화쪽으로 몸을 움직여 기차를 피하는 게 정말 불가능할까? 도저히 공감을 할 수 없어, 긴장감이 드는 게 아니라 헛웃음이 나온다.

<검은집>의 후반부는 동일한 코미디의 연속이다. 검은집에 간 전준오는 신이화에게 계속 당하기만 한다. 생각해보자. 어렸을 때 동생이 자살한 것이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하는 전준오가 심약한 남자일 수는 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이 줄줄이 죽고, 애인이 납치된 상황에서 그토록 전준오가 수세적이고 나약한 것을 관객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게다가 신이화는 다리를 절어 속도도 느리다. 기껏 꾀를 써서 굴린 드럼통에 맞은 신이화가 쓰러진 상황에서, 열리지 않는 문을 열려고 애인과 함께 버둥거리던 전준오는 기어이 신이화의 칼에 베이고 만다. 그걸 어떻게 믿으란 말인가. 제이슨도, 프레디도 아니고 렉터도 아닌데. 심지어 <미저리>도 아닌데.

슬래셔영화에는 살인마가 여성을 쫓는 클라이맥스가 흔히 등장한다. 압도적인 힘을 가진 살인마의 추적을 피해 연약한 희생자는 겨우겨우 도망을 친다. 이 장면이 공식이 된 것은, 그걸 보는 것만으로도 스릴 넘치기 때문이다. 살인마의 눈에 띄기만 하면 저 여자는 살해당한다, 라는 불안감이 있기 때문이다. 요즘 슬래셔영화에 많이 등장하는, 살인마와 여성의 격투도 납득할 수 있다. 극한상황에 몰리면, 인간은 의외의 힘을 내게 되어 있다. 특히 무엇인가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없던 힘까지도 한껏 내게 되어 있다.

그런데 대체 전준오는 무엇인가. 그에게는 애인을 지켜야 하는 책임이 있다. 그런데도 그는 맞서 싸울 생각은 도대체 하지 않는다. 제이슨 같은 살인마라면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신이화는 그저 마음이 없는 사이코패스일 뿐이고, 다리를 저는 여성이다. 여성 프로레슬러도 아니고, 거대한 몸집을 가진 것도 아니다. 총을 가진 것도 아니고, 칼 한 자루를 들고 다리를 끌며 천천히 다가온다. 그런 신이화에게서 전준오는 애인을 끌고 도망만 치려 한다. 가냘픈 여성에게 쫓기며 마구 비명을 지르기만 하는 건장한 남자에게 과연 공감할 수 있을까? 그 남자의 공포심이 관객에게 느껴질 수 있을까? 나는 이 장면에서 웃을 수밖에 없었다. 살인마의 소굴에서 쫓고 쫓기는 장면은 슬래셔영화의 클리셰지만, <검은집>은 그 클리셰의 존재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원작의 이야기는 가져왔지만

그냥 끝나도 좋을 판에, <검은집>은 결국 원작의 메시지를 완전히 박살내버리고 만다. 전준오에게 ‘사이코패스도 인간이다’란 대사를 하게 하는 것이다. 신이화에게도 뭔가 상처가 있었을 것이고 그래서 결국 사이코패스가 된 것이다, 란 주장이다. 뭐 그럴 수도 있다. 사이코패스는 아직 20, 30년밖에 되지 않은 개념이고 앞으로 변할 여지도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나온 증거로는 사이코패스가 환경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이코패스는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타인을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밖에 생각하지 못한다. 자매가 장례식에서 한 남자를 만났다. 그에게 반한 언니는 다음날, 동생을 죽였다. 왜일까? 이 질문에 대부분의 사람은 질투 때문일 것이라고 답한다. 하지만 사이코패스는 ‘또 하나의 장례식이 필요해서’라고 답한다. 그것은 신이화가 돈을 위해 아들을 죽이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그들은 타인의 고통과 죽음의 의미를 이해하는 능력이 없다. ‘인간이 어떻게 그럴 수가’라고 한탄하는 많은 사건의 대부분이 바로 사이코패스에 의한 것이다.

이미 말한 것처럼 <검은집>이 충격을 준 것은, 사이코패스에 대한 직접적인 주장을 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을, 우리가 얼마나 심각한 위험에 처해 있는지를, 소설의 인물들을 통해서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화로 만들어진 <검은집>은 그들도 인간이에요, 라며 그들을 감싸안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럴 경우 사이코패스는 보통 사람들과 다를 게 없게 된다. 그들을 이 사회가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에, 상처를 주었기 때문에 그들이 ‘사이코패스’가 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상처받은 자들이 모두 사이코패스가 되는 것은 아니다. 또 그들이 보통 사람들과 다르다고 해서 ‘격리’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을 소설이나 영화에서 밝힐 필요는 없다. 다만 사이코패스란 존재가 지금 우리의 곁에서 점점 늘어나고 있고, 게다가 그들은 우리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을 경고하는 것뿐이다. 기시 유스케의 <검은집>은 바로 그런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장르영화라면 장르의 법칙을 지키자

영화 <검은집>은 그런 메시지를 무시하는 엄청난 잘못을 하고도, 마지막 장면은 원작을 그대로 답습한다. 우리 주변에 마음이 없는 사이코패스가 수없이 살고 있다는 것. 대체 영화 <검은집>은 사이코패스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건 아마도 휴머니즘적인 입장일 것이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보호받아야 한다는 선한 생각. 하지만 그런 어설픈 생각이 결국 <검은집>을 아무런 메시지가 없는 영화로, 장르적으로도 아무런 재미를 느낄 수 없는 영화로 만들어버렸다. 사이코패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하고 싶었다면 원작의 이야기 구조를 뒤흔들었어야 하지만, 나태하게 원작을 따라가다가 자신의 어설픈 주장만 툭 던진 결과가 공포가 아니라 코미디 <검은집>으로 나왔다. 제발, 장르영화는 일단 장르의 법칙만이라도 충실하게 지켜나가자. 그 다음에 어떤 메시지를 넣든 말든 상관하지 않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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