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의 이매진]
[진중권의 이매진] 디지털 시대, 시각이라는 절대반지
2007-08-02
글 : 진중권 (문화평론가)
<다이하드4.0>의 ‘사이버 테러’에서 보여지는 ‘보기’와 ‘보여짐’의 권력관계

‘세컨드 라이프’에도 테러가 발생한다. 몇명의 사이버 산보객으로 시작한 이 가상세계가 어느덧 수천 만명의 가입자를 거느린 거대한 대안세계로 성장했다. 현실에서처럼 그곳에서도 참가자들이 제작한 아이템의 거래가 이루어지고, 그곳의 상업적 가치를 인식한 기업의 돈도 흘러들어가고 있다. 아무리 버추얼해도 세계는 세계. 그러다보니 거기에도 정치적 문제가 생기는 모양이다.

스스로 ‘세컨드 라이프 해방군’(SLLA)이라 칭하는 해커들이 수백만 세컨드 라이프 주민들의 “기본권”을 요구하며 일어섰다. 그들은 투표권을 요구하며 이 세계의 개발자이자 지배자인 린든 랩을 향해 공격을 개시했다. 목표로 삼은 상점에 하얀 공 모양의 폭탄을 터뜨려 근처를 지나는 아바타들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물론 교란의 시간은 짧고, 세컨드 라이프의 아바타들에게도 큰 해를 끼치지는 않는다고 한다.

워낙 흥미로운 사건이니 당연히 말이 없을 리 없다. 재미있는 것은 사건을 전하는 어느 신문의 보도. 기사는 사건을 바라보는 다양한 견해를 깔끔하게 요약한다. “좌파의 시각: 사이버공간에 기업의 돈이 들어와서 문제가 생겼다. 우파의 시각: 사이버공간에 테러리스트들이 들어와서 문제가 생겼다. 자연주의자의 시각: 사이버공간에 인간이 들어와서 문제가 생겼다.”

버추얼 테러리즘

브루스 윌리스가 12년 만에 머리카락 빠진 중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4.0’이라는 부제가 암시하듯이, 이번에 그가 퇴치해야 할 것은 “버추얼 테러리즘”. 어떤 의미에서 이 명칭은 정확하지 않다. 영화의 테러는 아바타가 아바타에 가하는 버추얼(virtual) 테러가 아니라, 현실세계의 혈류를 교란하여 진짜로 해를 끼치는 현실적(real) 테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차라리 ‘사이버’ 테러라 부르는 게 옳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아예 ‘테러’도 아니다. 테러리스트들은 대개 정치적 성격의 거창한 대의명분을 내세우게 마련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가브리엘은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동지들을 사살하게 하고, 돈만 챙겨서 도주하려 한다. 그의 사이버 공격은 체제에 대한 도전을 가장한 아주 평범한 경제범죄에 불과하다. 진짜 테러리즘이 아니란 의미에서라면, 그것을 ‘버추얼’ 테러라 불러도 될 것이다.

영화에서 ‘버추얼 테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가브리엘은 FBI 통제본부의 스크린에 백악관이 폭파되는 장면을 띄운다. 현장으로 달려간 맥클레인 형사는 건물의 건재를 확인하고 휴대폰으로 “조작”(fake)이라고 외친다. 아바타에 대한 SLLA의 공격이 현실의 유저를 다치게 하지 않는 것처럼, 백악관의 이미지에 대한 공격은 백악관의 건물을 파괴하지 않는다. 이 고약한 비주얼 조크야말로 ‘버추얼 테러’라 할 수 있다.

판옵티콘의 무력화

푸코는 근대의 권력을 벤담의 ‘판옵티콘’에 비유했다. 시각을 권력으로 보는 것은 폴 비릴리오도 마찬가지. 시각장의 확보는 곧 지배권의 확보다. 비릴리오가 인용하는 메를로퐁티의 말대로 “국가와 전쟁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아는 문제는, 지각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과 정확히 동일한 본성을 갖는다”. 그리하여 전국의 교통, 통신, 에너지의 트래픽을 조감하는 FBI 본부의 대형 스크린은 곧 국가의 눈이다.

하지만 가브리엘은 그 위에 백악관이 폭파되는 장면을 띄움으로써 권력을 가볍게 조롱한다. 국가권력은 더이상 자신이 원하는 것을 보지 못한다. 국가라는 이름의 간수는 판옵티콘을 확보하고도, 감시하는 주체가 아니라 거꾸로 해커라는 이름의 수인에게 감시당하는 객체로 전락한다. 대형 스크린은 그들에게 권력을 주지 못한다. 그들이 스크린 위에서 무엇을 보아야 할지 결정하는 것은 가브리엘이다.

“목표물을 눈으로 발견하자마자 여러분은 곧바로 그 파괴를 기대해도 좋습니다.” 미 국방성 차관이었던 페리의 말이다. 가브리엘은 맥클레인 형사에게 정전으로 엘리베이터에 갇힌 딸의 얼굴을 보여준다. 가브리엘이 그녀에 대한 시각을 확보하는 순간 그녀는 곧 그의 인질이 된다. 스크린으로 딸의 이미지를 바라보는 맥클레인은 무력하다. 그 시각의 주체는 자신이 아니라 가브리엘이기 때문이다.

보기와 보이기

해커의 욕망은 아마 이것과 관련이 있을 게다. 상대의 시각장(스크린)에 자신의 메시지를 띄움으로써 상대가 자신의 지배권 아래에 있음을 알리는 쾌감. 지배하려면 보아야 하나, 지배당하지 않으려면 보이지 말아야 한다. 해커들은 국가의 눈은 피했을지 모르나, 가브리엘의 눈을 피하지는 못했다. 목표물을 눈으로 발견하면 곧바로 그 파괴를 기대해도 좋다. 그리하여 그들은 차례로 살해당한다.

맥클레인의 영웅주의는 여기에 예외를 만드는 데서 성립한다. 그의 첫 영웅적 행위는 위치를 파악당한 패럴을 가브리엘이 보낸 암살자들로부터 구해주는 것이다. 그 뒤에도 그는 차량에 달린 위치추적 장치로 인해 도주하는 내내 가브리엘이 보낸 헬리콥터의 추적을 받는다. 영화에서 가장 볼 만한 액션은 이 시각장의 추적을 따돌리는 방법이다. 맥클레인은 자동차로 공중에 떠 있는 헬리콥터를 파괴한다.

이 영화가 자랑하는 또 다른 액션신도 ‘발견=파괴’라는 법칙을 깨는 데서 성립한다. 가브리엘은 미 공군의 컴퓨터망을 활용해 F-35에 맥클레인 형사가 탄 화물트럭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트럭을 모는 영웅은 전투기의 추적조차 따돌린다. 이 영화에서 진정으로 비현실인 것은 맥클레인이 전투기의 날개 위에 올라타는 게 아니라, 전투기가 트럭을 발견하고도 파괴에 실패하는 장면일 게다.

“디지털 시대의 아날로그 형사”

“디지털 시대의 아날로그 형사.” 가브리엘은 맥클레인 형사를 비웃는다. 가브리엘은 디지털의 지배자이고, 맥클레인은 아날로그 세계의 영웅이다. 둘은 각각 다른 세계에 속하기에 직접 마주칠 기회는 없다. 가브리엘은 컴퓨터의 자판만 가지고도 맥클레인이 있는 건물에 가스 화염을 보내고, 맥클레인이 탄 트럭에 전투기의 미사일을 보낼 수 있다. <다이하드> 4편에서 범인의 존재감이 떨어지는 것은 아마 이와 관련이 있을 게다.

영화에서 웨스트버지니아의 송전시설은 손으로 조작해야 중단시킬 수 있는 것으로 설정된다. 전국의 교통망과 통신망을 마비시키는 마당에 송전시설 하나 키보드로 중단시킬 수 없다는 게 좀 이상하다. 하지만 이 설정이 없었다면 맥클레인은 거기서 가브리엘의 애인인 마이 린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고, 다. 쿵후로 무장한 이 여인과의 혈투가 없었다면 테러리스트들의 존재감은 더 떨어졌을 게다.

디지털 세계의 테러범과 아날로그 현실의 형사가 만나려면, 사이버 테러리스트의 현실적 좌표를 포착해야 한다. 이 과제는 매트 패럴의 친구인 워로크의 도움으로 해결된다. 이 디지털 오타쿠는 가브리엘의 시스템에 침입하여 그가 NSA 빌딩에 있음을 알아낸다. 이로써 가브리엘은 시각적으로 체포된다. 발견은 곧 파괴다. 시각장에 포착된 이상 그의 파멸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액션의 고전주의와 포스트모던

중년이 넘은 무거운 몸의 영웅은 이제 나 홀로 빛나지 못하고 디지털 세대의 부축을 받는다. 그는 매트 패럴과 워로크의 도움으로 테러리스트들의 좌표를 확보한다. 테러로 인한 교란은 아날로그와 디지털 세대의 연대를 통해 극복된다. 맥클레인은 매트 패럴이 PDA로 위성에 접속하는 것을 보며 놀라워하고, 매트 패럴은 거꾸로 맥클레인이 에어백을 단숨에 뜯어내는 것을 보고 경탄한다. 이 장면은 매우 상징적이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보족은 영화구조에도 반영되어 있다. ‘4.0’이라는 디지털스런 부제에도 불구하고 사실 액션에는 디지털이 어울리지 않는다. 액션의 본질은 물질적 신체의 물리적 충돌에 있으나 디지털 세계는 탈(脫)물질화되어 있다. 액션영화를 아바타와 아바타가 싸우는 <스트리트 파이터>로 만들 수는 없지 않은가. CG와 와이어의 사용을 절제한 것은 아마도 액션의 고전미를 유지하는 데에 아날로그의 중량감이 필요했기 때문일 게다.

비평가 데이비드 보드웰은 <다이하드>(1988)를 “고전적 할리우드영화의 귀환”이라 부른다. 하지만 단지 고전으로 돌아가는 것만으로 현대의 대중을 사로잡을 수 있겠는가? <다이하드> 1편이 액션의 새로운 전범이 된 것은 고전적 영화언어에 컴퓨터게임의 당대적 요소를 결합시켰기 때문일 게다. 이 혼성의 전략은 아날로그 액션에 디지털 내러티브를 결합시킨 4편으로 그대로 이어진다. <다이하드>의 고전주의는 모던 이전이 아니라 이후의 현상. 그것은 포스트모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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