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퇴폐의 요정, 강인한 여왕으로 돌아오다
2007-08-09
글 : 김도훈
<이리나팜>의 마리안 페이스풀

그녀는 소호로 왔다. <이리나팜>의 주인공 매기는 손자의 수술 경비를 벌기 위해 런던 소호의 섹스숍에 취직한다. 벽에 난 구멍으로 남자의 성기를 마스터베이션해주는 대가는 주당 600파운드. 꽤 짭짤하다. 동종업계에서는 천상의 오른손 ‘이리나’로 통하는 매기를 모셔오기 위해 경쟁까지 벌어질 판이다. 그런데 이거 좀 위험하다. <이리나팜>은 감동적인 소극이지만 예순이 넘은 마리안 페이스풀에게는 많은 기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모험이다. 60년대 런던 음악계의 ‘천상의 목소리’였던 페이스풀은 소호 뒷골목에서 마약에 중독된 노숙자로 살았던 경험이 있으며, 그 시절을 “잊어버리기 위해 갖은 애를 써야만 했다”고 종종 고백해왔다. 40여년 만에 ‘천상의 오른손’을 연기하기 위해 소호로 되돌아온 심정은 어땠을까. “예순의 나이에 매기를 연기하는 건 위험한 일이었지만 재미있었어요. 위험을 감수하는 게 좋거든요.”

대학교수인 아버지와 오스트리아-헝가리계 남작 가문의 외동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페이스풀은 롤링스톤스가 작곡한 <As Tears Go By>로 당대 최고의 여가수가 된 행운아였다. 팝의 스타덤에 오른 그녀는 장 뤽 고다르의 <메이드 인 U.S.A>(1966)에 카메오 출연하고, 알랭 들롱과 함께 심금을 울리는 싸구려 로맨스 <모터사이클을 탄 소녀>(The Girl on a Motorcycle, 1968)를 찍고, 토니 리처드슨의 <햄릿>(1969)에서 오필리아를 연기했다. 팝과 영화계를 아우르는 60년대의 공주였던 페이스풀은 곧 록의 악동 믹 재거를 만나 치열한 사랑에 빠지고, 런던 사교계의 왕과 사랑에 빠진 공주에게 인류 역사상 가장 방종맞게 아름다웠던 60년대는 영원히 계속되는 꿈과도 같았을 것이다. 하지만 한번의 유산과 믹 재거의 바람기, 헤로인 중독으로 어린 페이스풀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1970년에는 <이리나팜>의 매기처럼 돈 한푼 없이 소호의 거리로 쫓겨났다. “어쩌면 나는 완벽하게 익명으로 돌아가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어. 그냥 사라지고 싶었고, 그래서 사라졌어. 누군가(믹 재거)의 뮤즈로 살아간다는 건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거든.”

절정을 구가하던 스타가 완벽하게 잊혀진 채 2년간 마약중독자 노숙자로 살아가는 일이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연인 믹 재거는 뭘 했고, 그녀의 엄마는, 그녀의 팬들은 대체 뭘 했단 말인가. 60년대의 런던은 마약이었다. 그 압도적으로 무시무시한 괴물은 소녀들을 집어삼켜 명성과 쾌락에 중독시켜버린 뒤 비열하게 내뱉었다. 17살의 나이로 스타가 된 페이스풀로서는 세상의 차가운 섭리를 알 도리가 없었다. 그녀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모든 십대 소년소녀들처럼 “집에서 벗어나는 것”이었을 따름이다. “나는 스스로보다 더욱 어른인 양 행동했지. 믹 재거는 마치 날 구원해주러 온 것처럼 보였어.” 하지만 믹 재거와의 사랑은 결국 페이스풀을 마약과 명성의 세계로 침몰시켰다.

페이스풀의 이른 역경은 <팩토리걸>의 에디 세즈윅과 쌍둥이처럼 닮아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세즈윅은 죽고 페이스풀은 살아남았다는 거다. 2년 동안 소호의 홈리스로 산 페이스풀은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을 비롯한 몇몇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마약을 끊고 삶으로 돌아왔고, 펑크록이 군림하던 79년의 런던에서 재기 앨범 <Broken English>를 발표했다. 속삭이듯 사랑 노래를 부르던 소녀 가수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그동안 마신 위스키와 피워댄 줄담배의 효력으로” 걸걸하고 허스키한 떨림만을 토해냈다. 그건 이상하게도 펑크의 시대와 잘 맞아떨어졌다. “섹스 피스톨스의 조니 로튼은 나를 좋아한다고 고백했지. 걔가 원래 나이 많은 여자 취향이었거든. (웃음) 펑크의 정신은 누구든지 할 수 있다는 거야. 부자거나 멋지지 않아도 괜찮아. 펑크의 정신이 나를 많이 도왔다고 생각해. 그 덕에 죽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한 내가 앨범을 낼 용기를 가질 수 있었거든.” 흥청거리는 런던의 뮤즈는 펑크의 대모로 돌아왔고, 주름살과 거친 목소리는 세월의 아우라를 깊이 새겼다. 피부의 아름다움을 2년의 소호 시절과 맞바꾼 뒤 영혼의 아름다움을 얻은 것이다.

페이스풀은 예순에 가까운 나이에도 끝없이 세계를 돌며 공연을 하지만 최근에는 슬그머니 스크린에 얼굴을 내보이기 시작했다. <인티머시>(2001)와 <사랑해, 파리>(2006)를 통해 관객을 만난 페이스풀은 <마리 앙투아네트>에서 마리아 테레지아 역을 맡았고, <이리나팜>을 통해서는 마침내 스스로를 ‘배우’로서 받아들이게 됐다. “나는 이 영화가 자랑스러워. 이건 더러운 이야기가 아니라 삶에 대한 이야기니까. 나로서는 저절로 몰입할 수 있는 캐릭터였으니까.” 만약 <이리나팜>에 출연하지 않았더라면 페이스풀은 <모터사이클을 탄 소녀>에서 할리 데이비슨을 몰며 알랭 들롱과 사랑을 나누는 영국 소녀로 영원히 기억되었을 것이다. “그딴 영화들을 찍은 것도 감사해. 최소한 내가 얼마나 끝내주게 멋졌었는지만큼은 기록으로 남아 있으니까 말이야. 하하하. 그런 걸 찍지 않았더라면 나는 기억되지도 않았을걸.”

누군가는 페이스풀의 삶을 3부작 정도로 나뉜 전기영화로 만들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럴 생각이 없단다. “웃기고 있네. 나는 전기영화 따위 좋아하지 않는다. 내 삶은 내 삶이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내 삶을 살고 있다. 아직 끝나려면 멀었다.” 흥청거리는 60년대의 상처받고 박제된 아이콘이 된 지 40년이 흐른 지금, 마리안 페이스풀은 여전히 우리가 볼 수 없는 하늘을 향해 날고 있다. 그녀가 땅바닥을 딛는 건, 오직 죽을 때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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