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나비처럼 가벼워지련다
2007-08-09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사진 : 이혜정
<별빛 속으로>의 김민선

<별빛 속으로>의 황규덕 감독에게 살짝 물어봤다. 배우로서 김민선은 어떤 사람인가? “영화 끝나고 최근 떠오른 생각인데 미국 배우로 치면 조디 포스터 같은 사람이다. 조디 포스터는 출신부터가 제대로 된 문화예술 교육을 받은 사람이고 미국 상업문화권 안에서 활동하며 적응하고 있지만, 언제나 그 이상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뭔가가 있는 사람이다. 내 추측인데 김민선은 연기자를 넘어 연출에 대한 역량까지 꿈꾸는 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다.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걸 따진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본능적으로 그런 성향을 갖추고 있는 것 같다. 충무로 주연 여배우라는 틀이 요구하는 것을 정확히 찾으면서도 항상 그 이상으로 나아가고 싶어한다.”

김민선에게도 물어봤다. 촬영하면서 어떤 점이 힘들었나? “첫날이 좀 갑갑했다. (웃음) 대사도 많았고 동선도 복잡한 원신 원컷 촬영이었다. 물론 연기자로서 갑작스런 상황에 대비할 마음으로 뭔가 열어놓고 오긴 하지만, 감독님 스타일상 길게는 말씀 안 하시더라. 삐삐소녀가 누구인지 아직 감도 잘 안 잡히는데 어디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고 머리는 아파오고. 그래서 감독님에게 재차 물어보게 되더라.”

사실 같은 얘기다. 한 발짝만 움직이기 위해서도 본인이 납득이 되어야만 발을 떼는 타입의 배우들이 있는데 김민선이 그렇다. 그건 김민선의 오래된 완벽주의자 기질이다. “집안의 넷째다 보니 가족 사이에서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아이였고 자신감이 없었다. 그래서 되도록 완벽해지려고 했고, 어렸을 때는 혹시 내가 이런 말 하다 틀리면 상대방이 날 우습게 보지 않을까 생각하며 토씨 하나까지 준비하는 타입이었다.”

이상하다. 그렇다면 요즘 텔레비전 쇼 프로그램에 나와 허허실실 곧잘 재롱과 익살을 떨면서 보여주는 그 빈구석은 뭔가. 그런데 그게 바로 김민선에게 지금 중요한 변화다. “시키면 해야 하는데 생각은 안 나고, 게다가 어찌나들 애드리브가 좋고 데시벨들이 높은지 내가 얘기하면 다 묻힌다”며 다른 ‘여걸’들을 향해 부러움 섞인 볼멘소리를 하면서도 그 일이 즐겁다고 한다. “지금까지는 쇼 프로를 하지 않았다. 내 자신이 완벽해지고 싶어서 그런 쪽에 이미지를 소진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그녀를 곤란하게 하는 시선들을 깨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내가 너무 무거운 이미지고 그래서 그게 비호감으로 작용한다는 것(웃음)”이다. 김민선은 지금 좀더 가볍고 자유롭고 싶어한다. 이제 완벽에 대한 갑옷을 벗고 자신 역시 친근하고 또 대하기 편한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다. 다만 갖고 있는 걸 버리면서 가장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아직 못 보여준 한쪽을 열어놓는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별빛 속으로>의 삐삐소녀를 맡게 된 것도 비슷한 이유였다. “시나리오를 읽어보니 삐삐소녀가 참 밝더라. 이런 친구 역할을 한번 하면 나도 기운을 좀 받겠다 싶었다.” <별빛 속으로>의 삐삐소녀는 시대가 강제한 획일성을 뛰어넘는다. 죽음 같은 시대에 살다 죽었으나 다시 살아나 사람들 사이를 자유롭게 거닐며 펄럭거리면서 돌아다닌다. 김민선이 삐삐소녀에게서 받고 싶었다는 기운은 분명 그런 것일 거다. 영화에서 삐삐소녀는 그 시대의 ‘유일무이한 보헤미안이며 시대를 초월하여 나는 나비’ 같은 존재인데, 지금 김민선이 배우로서 꿈꾸는 것도 바로 그런 것이다.

김민선이 자로 잰 듯 너무 정확해 보여 도리어 무거워 보인다고 느꼈다면 한 가지 우스개 일화를 들려주고 싶다. “<하류인생> 때 일인데, 촬영 전에 테스트 촬영이 있었다. 임권택 감독님이 이런저런 연기 지도를 하시기에 이분이 나에 대해 걱정을 참 많이 해주시는 구나 고마운 생각이 들어, 감독님 어깨를 탁 잡고 감독님 걱정하지 마세요 하고 하하하 웃었다. 그리고나서 옆을 보니까 주변이 싸하더라. 다들 얼굴은 백짓장처럼 하얗게 되어 있고. 나중에 들으니 감독님 어깨에 손 올린 배우는 나밖에 없다고 그러더라. (웃음) 그런데 그때 감독님은 껄껄 웃으셨고 촬영 내내 예뻐해주셨다.” 감독 임권택의 어깨에 감히 덥석 손 얹고 나서 귀여움받은 사람이 과연 흔할까. 김민선에게는 우리가 몰랐던 그런 친근한 도발이 있다.

장소협찬 cafe maneuver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