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랜드 엠파이어>를 보면서 오금이 저렸다. 이렇게 무서운 영화인데 왜 아무도 그런 말을 안 했을까 싶었다. 올해 나온 공포영화 가운데 <디센트>와 <기담>이 좋았지만 <인랜드 엠파이어>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귀신, 괴물, 연쇄살인마, 좀비, 흡혈귀, 그 어느 것도 나오지 않지만 3시간 내내 온 신경이 두려움과 불안에 꽁꽁 묶인 것 같았다. 일반적 의미의 장르영화가 전혀 아닌데 공포의 효과가 이토록 강력한 이유는 뭘까? 그 비밀은 영화의 줄거리로는 설명이 안 된다. 내게 이 기묘한 이야기의 매듭을 풀 능력도 없기도 하거니와 영화 전체가 그 매듭을 풀어보라고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영화는 이야기의 매듭을 풀 수 없다는 점 때문에 무시무시하다. <인랜드 엠파이어>는 영상이 재현하는 의미의 법칙을 전부 빨아들여 어디로도 빠져나갈 수 없게 설계된 거대한 미궁이다.
<인랜드 엠파이어>는 영화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인식의 혼란을 유도한다. 폴란드의 어느 거리, 토끼탈을 쓴 인물들이 나오는 세트 같은 거실, 여배우의 저택, 영화 세트처럼 보이는 작은 집 등 영화 속 공간은 인물의 이동과 무관하게 변화한다. 공간이 자유로이 바뀌는 만큼 시간도 관객이 알아차리기 전에 바뀐다. 현재와 미래가 만나고 과거가 현재를 만나는 기묘한 비틀림으로 인해 사건이 일어난 시제를 알 수 없거나 착각하게 된다. 시간과 공간이 헷갈리는 동안 인물의 정체성도 혼란스럽다. <인랜드 엠파이어>에서 로라 던이 특정 장면에서 연기하는 인물이 누구인지 알아맞히기란 쉽지 않다. 그녀의 이름이 달라지는데다 시간과 공간을 자유로이 넘나들다보니 지금까지 본 것이 현실인지, 환상인지, 과거인지, 현재인지, 회상인지, 영화 속 영화인지 분간이 안 가는 것이다. 대사라도 의미전달에 충실한가 하면 그렇지 않다. <인랜드 엠파이어>의 대사는 얼핏 미궁의 출구를 가리키는 표지판처럼 보인다. 그걸 따라가면 출구가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게 만들지만 한참을 가도 제자리를 맴돌 뿐임을 느끼게 된다. 데이비드 린치는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도 이런 미로를 만들었지만 이번엔 더 극단으로 나아갔다. 혼란은 그가 인물의 형상을 왜곡하고 프레임의 견고한 틀을 허물면서 가중된다. 디지털카메라는 이 지점에서 대단한 효과를 발휘하는데 심도가 깊지 않은 이 카메라는 그 흐릿함으로 인해 우리가 보는 것의 진실성을 의심하게 만든다. 인물의 구분은 더 모호해지고 인물의 표정은 더 기괴해져서 영화에서 현실이며 현재라고 믿었던 대목마저 불안에 휩싸인다. 프레임의 경계마저 필름카메라처럼 확고부동한 버팀목이 되지 못해 화면 밖에서 금방이라도 뭔가 튀어나올 것 같은 긴장감이 팽팽하다(실제로 얼굴 클로즈업이 갑자기 등장하는 어떤 장면에선 관객 중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다). 그 무엇도 확정할 수 없는 이 불안한 세계는 정말 무섭다. 시간도 공간도 프레임도 형상도 모든 것이 녹아 흘러내리는 느낌. 프란시스 베이컨의 회화가 영화적으로 실현되는 순간이다.
2001년 칸영화제 기자회견에서 데이비드 린치는 “각각의 요소가 제대로 완성되면 모든 요소의 총합보다 거대한 총체가 드러나는 마법이 일어난다”는 말을 했다. <인랜드 엠파이어>에서 일어난 일이 그런 것이다. 대사, 연기, 촬영, 조명, 사운드, 세트 등 각 요소는 시간, 공간, 캐릭터, 형상, 프레임, 이야기 등을 해체해 마침내 끝을 알 수 없는 블랙홀로 모습을 드러낸다. 그야말로 전인미답의 영토다. 덧붙이자면, 공포영화를 만들려는 감독들은 <인랜드 엠파이어>를 꼭 한번 봤음 좋겠다. 공포란 어디서 어떻게 생겨나는지 근원적인 질문을 할 기회가 될 것이다.
P.S. 다음 호부터 책에 삽입했던 독자엽서가 없어진다. 엽서에 써서 우체통에 넣어 보내주시는 열혈 독자분이 적지 않지만 시대의 추세에 맞춰 온라인 독자엽서로 대체할 예정이다. 앞으로 씨네21 홈페이지에 많은 의견 남겨주시길 부탁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