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모니터 화면을 마주하고 앉을 때면 언제나 누군가가 원망스럽다. 화살의 끝은 일단 ‘나’를 향해 있다. ‘아, 난 왜 이것밖에 안 될까. 왜 별로 숱 많지도 않은 머리칼을 쥐어뜯고 또 뜯어야만 한줄 한줄 써나갈 수 있을까.’ 일어났다 앉았다 누웠다 물구나무섰다, 혼자 쇼를 하다보면 슬그머니 딴 생각이 든다. ‘이런 뻘짓 안 하고도 쫙쫙 쫘르르륵 명작을 완성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좋을까?’ 자학보다 강력한 건 질투다. ‘부럽다. 걔들은 뭔 복을 타고났기에?’ 질투보다 조금 더 힘이 센 건 체념이다. ‘그래. 어차피 이렇게 태어난 거 어쩌겠어? 글은 써서 뭐하고, 마감은 해서 또 어쩌겠어. 확 펑크내버린들 누가 아쉬워한다고.’ (바닥을 치는 절망감으로부터 한 작가를 구제하는 건, 편집자의 추상 같은 원고 독촉이다.)
천재는 정말 있을까? 천재는커녕 수재는커녕 둔재 소리 들을까봐 벌벌 떨고 사는 사람 입장에서 볼 때 참으로 께적지근한 질문이라 아니할 수 없다. 아무리 부정하려 애써봐도, ‘그들’이 나와 같은 하늘을 이고 살아가고 있음을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왜 자신이 아니라 하필이면 저 (평소엔 살짝 핀이 나가 보이는) 아마데우스에게 천재성이 깃든 것인지 신을 원망하던 살리에리의 일화를 상기하지 않더라도, 이 사회 구석구석엔 누군가는 각고의 노력을 통해 간절히 얻고자 하는 ‘바로 그 비상한 능력’을 엄마 뱃속에서부터 타고난 인간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대체로 “어 이런 건 뭐 그냥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식의 천진난만함을 과시하여 범부(凡夫)를 두 번 죽이곤 한다.
음악의 천재, 문학의 천재, 어학의 천재, 연기의 천재, 게임의 천재, 향수제조의 천재 등등이 있을 테니 요리의 천재 또한 없으란 법 없다. <라따뚜이>의 절대미각 생쥐 레미처럼 말이다. 극장 안엔 10살 미만 자녀를 대동한 부모들이 적지 않았는데, 친절한 더빙상영관을 놔두고 굳이 자막상영관을 찾아 들어온 것은 유아영어교육 열풍의 한 징후로 짐작되어졌다. 꼬맹이들과 함께 볼 영화로 이 작품을 택하면서 어른들은 영어교육뿐 아니라 심성교육의 효과 또한 염두에 두었음을 것이다.
‘(요리는) 누구나 할 수 있다’는 구스토 레스토랑의 모토를 가슴 깊이 새긴 아이가 조금의 실패에도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는 성숙한 인간으로 자라기를 바라는 그 의도야 훌륭하다. 그러나! 만약 내게 아이가 있다면… 아마도 애가 이 영화를 보러가자고 조를까봐 전전긍긍하지 않을까 싶다. 천재성의 요소라곤 찾아볼 수 없는 내 유전자와 뺀질뺀질함과 심드렁함을 수시로 넘나들던 내 유년 시절의 성정을 쏙 빼닮은 아이가 태어났다는 가정하에서다.
“엄마, 이 영화의 교훈은 뭔가요?” 애가 눈을 둥그렇게 치켜뜨고 물어온다면 뭐라고 대꾸해야 하나. “하고자 하면 누구나 할 수 있다, 는 거잖아. 그러니까 너도 열심히 노력하며 살라는 거지.” 궁색하기 이를 데 없는 대답을 들으면 애는 또 묻겠지. “근데 레미가 무슨 노력을 했나요? 원래 천재로 태어난 거 같은데.” 그럼 나는 자식 앞에서 솔직하게 말할 수 있을까. “얘야, 미안하지만 너는 레미가 아니라… 링귀니(레미의 친구인 소년요리사)란다.” 인생의 치명적 비극을 맛봐버린 아이를 위로하기 위해 이렇게 덧붙이는 것밖에 다른 도리가 없겠지. “그러니까, 얘야, 너도 친구를 잘 사귀면 되지 않니?” 아아, 아이가 없다는 게 이렇게 다행스러울 수가!
비천하게 태어났으나 마침내 성공할 수 있었던 레미의 필살기는, 결국 재능이다. 요리훈련이라곤 요리프로그램 몇번 보고 요리책 좀 읽은 게 전부인 레미에 비하면, 각고의 노력 끝에 조금씩 성장해가는 <대장금>의 장금이나 <미스터 초밥왕>의 쇼타는 성실해도 너무 성실하게 느껴질 지경이다.
하지만 어쩌랴. 또다시 닥쳐온 마감 앞에서, 레미도 아닌 주제에 내가 최고의 라타투이를 만들 수 있을까라는 의문은 사치스럽기만 하니까. 여기 재료가 있고, 저기 내 요리를 기다리는 손님들이 있다. 모자 속에 숨겨둔 생쥐도 없고, 도망갈 곳도 없다. 자, 앞치마 끈을 질끈 묶을 수밖에. 자학과 질투, 때론 체념을 화력 삼아 오늘도 주방은 분주히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