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신저토크]
[메신저토크] “데이비드 핀처가 <살인의 추억>을 본 게 아닐까 싶어요”
2007-08-22
글 : 이동진 (영화평론가)
글 : 김혜리

이동진 “이 영화는 데이비드 핀처가 처음 만든 리얼리즘 영화일 거예요.”
김혜리 “’연쇄살인’에서 ’살인’보다 ’연쇄’에 방점을 찍은 이야기예요.”

그놈 글씨체님(김혜리 vermeer@cine21.com)이 입장하셨습니다.
홀린데이님(이동진 lifeisntcool@naver.com)이 입장하셨습니다.

그놈 글씨체님의 말(이하 그놈) : 메신저토크가 2주 동안 지면을 비웠습니다. 휴가도 있었지만 이동진 선배는 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 저는 시네마 디지털 서울 영화제 심사에 참여하는 시간이 있었는데요. 결석계 삼아 잠깐 이야기할까요? ^_^

홀린데이님의 말(이하 홀린) : 25편의 중·단편을 심사를 위해 보았는데 학생들 작품이 기술적으로는 참 뛰어났어요. 그렇지만 그럴수록 결국 영화는 기술로 만드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더 강해지더군요. 대부분이 디지털영화들이었죠. 그쪽이야말로 디지털영화의 위력을 제대로 체험하셨을 듯. ^.~

그놈: 물론 일주일 동안 디지털 영상만 연달아 보다보니, (차승원씨가 유럽에서 고추장 찾듯) 셀룰로이드가 그립기도 했지만, 디지털영화들을 보며 영화가 지닌 기록(document)의 기능에 대해 생각하게 됐어요. 삶의 변화가 이렇게 빠른 시대의 현실을 영화가 놓치지 않기 위해서 디지털은 불가피한 선택이 된 것 같습니다.

홀린: 지아장커 감독 같은 사람이 바로 그런 이유로 디지털영화를 찍고 있다고 말하죠.

그놈: 그렇군요. 특히 중국에서 출품된 디지털영화들이 그런 점을 깨우쳐주긴 했어요.

홀린: 저는 청소년영화제이니만큼 아무래도 당장의 숙련도보다는 만든 이의 10년 뒤가 어떨까를 상상하면서 점수를 주게 되더라고요.

그놈: 그렇다면 좋은 태도나 눈을 가진 영화를?

홀린: 그렇죠. ^^ 그런데 누가 훌륭해질지는 좀 헷갈려도 그 반대는 가늠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놈: 참, 다른 장르보다 호러영화에는 디지털이 유독 효과적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언뜻 해봤어요.

홀린: 디지털로 호러 자꾸 보면, 홀린데이.*.* 이번주 개봉작 가운데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조디악>은 기대만큼이나 좋더군요.

그놈: 지금까지는 ‘두 데이비드’라고 린치와 크로넨버그를 자주들 묶어 거명했잖아요? <조디악>을 보고 나니 이제는 세명의 데이비드를 이야기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기도 했어요.

홀린: 그래도 작품의 스타일상 린치와 크로넨버그만 묶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놈: 아 죄송! 영화적 중량감만 두고 한 표현이었어요. 하지만 좀 억지를 써서 ‘3-D’로 명명하면 어때요? ‘Dirty, Difficult, Dangerous’한 영화를 만드는 트리오. ^.~ 형용사와 줄 긋는 순서는 크로넨버그, 린치, 핀처가 될까요?

홀린: 크로넨버그가 제일 열받겠네요. dirty라니…. 뭐, 야하다는 뜻도 있으니까. ^^

그놈: 어머! 크로넨버그 감독님은 설마 비난 댓글 안 쓰시겠죠? 하지만 한번 쓰면 아주 징그러운 걸로 쓰실 듯. --;

홀린: 댓글에서 지네가 기어나와 손을 문다거나 키보드가 뱀대가리로 바뀌거나. -..-

그놈: <조디악>은 연쇄살인자라는 단어도 없었던 1960년대 말 샌스란시스코 인근에서 시작된 조디악 킬러 살인사건 기록에 기초해 만들어졌죠. 오늘 제 대화명도 이 영화의 필적 감정 에피소드에서 빌렸어요.

홀린: 예전에는 몰랐는데 <조디악>을 보고 나니 <더티 하리>가 정말 이 사건을 모티브로 삼았다는 걸 절감하겠더군요. <조디악>의 극중 형사 데이빗(마크 러팔로)이 <더티 하리>를 극장에서 보다가 도중에 나오는 장면이 있잖아요? 영화를 못 견디고 도중에 나오는 그의 모습이나, 사건 수사를 지켜봐온 만평가 로버트(제이크 질렌홀)가 영화가 끝난 뒤 로비에 혼자 있던 데이빗에게 다가가 “범인은 결국 총을 맞고 죽는 것으로 끝났습니다”라며 말을 붙이는 장면이 참 좋았어요. 그건 데이빗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위로잖아요.

그놈: 반면 영화 보고 나온 다른 형사들은 데이빗을 짓궂게 놀리죠. “야, 네가 놓친 범인, 영화 주인공이 잡더라” 하면서. 으이구. -_-#)

홀린: <조디악>은 좋은 대사가 많아요. 특히 데이빗과 로버트의 대화가 그렇죠. 블랙유머도 상당했고요. 이런 식의 대사들도 무척 재미있었죠? “(경찰로서 저는 민간인인 당신에게) 사건 정보를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나파의 켄 날로를 만나보라는 얘기도 할 수 없습니다. 엔, 에이, 알, 엘, 오, 더블유.” ^^

그놈: 특히, 유머는 데이비드 핀처의 전작에서 보기 드물었던 요소라는 점에서 더욱 눈길이 갔어요.

홀린: 핀처의 필모그래피에서 이 영화는 확실히 이례적이죠. 전작들이 리얼리티로 승부하는 영화가 아니었다면 이 영화는 핀처가 처음 만든 리얼리즘영화일 거예요.

그놈: 또한 핀처 영화로서는 가장 완성도 높은 시나리오가 아닐까요. 어찌 보면 이 영화는 <쎄븐>의 대척점에 서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엽기적이고 센세이셔널한 이미지는 찾기 힘들고 인물들은 주로 사무실에서 서류 다발 속을 헤매죠.

홀린: <쎄븐> 자체가 조디악 사건을 최초 모티브로 삼았다니, 참 아이로니컬하죠.

그놈: <조디악>은 ‘연쇄살인’에서 ‘살인’보다 ‘연쇄’에 방점을 찍은 이야기라고 표현할 수 있을 거예요. 연쇄적으로 발생하는 이러한 폭력이 그 도시의 공기를 어떻게 바꿔놓는가, 그 안에 사는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가 진짜 주제인 거죠.

홀린: 음, 흥미로운 착점이네요. 상당히 긴 시간에 걸쳐 벌어진 사건이고 등장인물이 정말 많은데도 너무나 잘 간추리고 응축시켜서 영화가 전혀 늘어지지 않아요. 각본과 편집 모두 훌륭해요.

그놈: 그래서 <조디악>에서 연쇄살인 미스터리라는 장르는 일종의 복면에 가깝다고 해야 하겠죠. <살인의 추억>이나 <샤이닝>에서 그랬듯이. 말하자면 이런 형국이에요. 길 가다 사람들이 둘러서 있어서 가운데 뭐가 있나 보려고 한참 기웃거렸는데 알고 보니 그 안엔 아무것도 없고, 결국 내가 관찰한 건 둘러선 사람들이었구나 하고 깨닫는 거죠.

홀린: 그런 순간에 찾아오는 허망함과 서늘함에 대한 영화죠. 이 영화는 <양들의 침묵>이나 <쎄븐>의 뒤에 세울 게 아니라 앨런 J. 파큘라의 <대통령의 사람들> 뒤에 놓아야 맞는 영화일 거예요. 영화적 화술에서는 <D-13> <JFK>와 비슷하다는 인상도 받았어요.

그놈: <대통령의 사람들>은 1976년경에 나왔을 텐데 2006년에 디지털로 찍은 영화인 <조디악>의 화면은 꼭 그맘때 영화들 같죠. 연전의 <뮌헨>도 시각적 스타일까지 복고시키는 전략을 취했잖아요.

홀린: <뮌헨>보다 훨씬 더 사건을 잘 장악하고 있다는 느낌이에요. 이렇게 클래식한 연출을 데이비드 핀처에게서 볼 줄이야. +_+

그놈: 달리 말하면 <조디악>은 <살인의 추억>에서 두 형사가 느꼈으되 말로는 표현하지 않았던 생각을 말로 표현하는 영화이기도 해요. 형사 데이빗이 용의자를 옭아넣는 데 증거불충분으로 실패하고 나서 이렇게 말하죠. “제일 끔찍한 게 뭔 줄 아세요? 내가 그를 범인이라고 자신하는 건지, 그냥 이 모든 것을 끝내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는 점이에요.”

홀린: 그나저나 정말 <살인의 추억>과 유사하더군요. <살인의 추억>이 나중에 나왔다면 참고했다는 소릴 들었을 법할 정도로요. ^^ 데이비드 핀처가 <살인의 추억>을 본 게 아닐까 싶어요. 일단 장시간에 걸친 미제사건을 수사-탐구하는 사람의 시각에서 다뤘다는 점이 똑같고 심지어 “밥은 먹고 다니냐”라는 대사와(^^) “범인은 평범하게 생겼어요”라는 진술까지 똑같잖아요. 그 진술자가 아이라는 점도.

그놈: 그리고 형사들을 미치게 하는 DNA 검사도!

홀린: 마자마자. 그래도 <조디악>엔 송강호가 없다는 거! ^^

그놈: 그렇죠. <조디악>의 수사 주체는 여러 사람이 시기를 달리하며 바뀌죠. 그러다 누구는 알코올 중독자가 되고 누구는 부패하기도 하고 가족에게 외면도 당하고.

홀린: <살인의 추억>보다 더 중층적인 구조죠. 추리 과정도 형사, 기자, 만평가 로버트까지 세 지류로 갈리잖아요.

그놈: 이야기가 직진하지 않는 점은 관객에게 불만 사항이 될 수 있을 거예요. 주요 범행은 약 40분 안에 다 일어나고 그 다음은 계속 추적자들이 막다른 골목을 헤매는 셈이죠.

홀린: 구조적으로 흥미로웠던 점은 중반까지는 사건 재현과 추리를 교직하다가 막판 40분에 로버트의 추리로 넘어가면서 엄청나게 속도와 밀도가 붙는다는 거예요.

그놈: 그런데 혹시 이런 질문은 던져보셨어요? 사건의 주변부에만 머물던 만평가 로버트가 왜 형사와 기자들이 다 나가떨어지거나 포기한 다음 그렇게까지 범인 색출에 집착할까요? 극중 대사 말마따나 조디악이 죽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람이 매일 살해되는데, 사적 원한도 없고 직접적 위협도 받지 않는 로버트가 어째서?

홀린: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비유적으로 말하면, 사건이 그를 찾아와 들러붙은 거라는 거죠. 로버트가 조디악 사건을 처음 접한 것은 신문사 편집회의 때잖아요? 거기서 우연히 조디악이 보내온 첫 편지 내용을 듣고 그 사건에 완전히 사로잡히게 되는 거죠.

그놈: 그때 국장의 아픈 한마디가 있죠.T-T “자넨 마감 있지 않아? 나가봐.”

홀린: 역시 기자란 그런 대사를 흘려들을 수 없다니까. ^^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살면서 어떤 장면에 부딪혔을 때 그 장면이 나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데도 내 인생에 빨판처럼 들러붙는 것 같은 느낌 말이에요. 로버트는 감정적으로 순도가 높은 스타일의 사람이니 더 집착하는 거겠죠. 호기심은 고양이도 죽이는 법이잖아요? ^^ 위험하다고 해도 일단 호기심이 추동하면 도저히 멈출 수가 없는 거죠. 그게 모든 공포영화의 추동력이기도 하고요.

그놈: 제 대답은 좀더 막연한데요. 세계에는 끔찍한 일들이 매 순간 일어나잖아요? 인간은 살면서 그것을 받아들이고 둔감해지지만, 의식 아주 깊은 바닥에는 가느다란 필사적 저항이 남아 있는 게 아닐까요. 세계의 거대한 불합리를 척결 못하는 인간의 무능함을 알고, 자기도 그 불합리의 일부임을 인정하면서도, 이길 가능성 있는 표적이 보일 때는 오기가 발동하는 거죠.

홀린: 인간의 윤리적인 존재 증명 같은 거군요.

그놈: <조디악>이 형사를 그리는 방식도 좋았습니다. 특수한 사연이나 트라우마가 있다는 설정도 없고 별로 육체적으로 거칠지도 않아요. 온건하지만 자기 일을 철저히 처리하는 전문직업인들이죠. 욕이나 액션만 수사물을 리얼하게 보이게 만드는 방법은 아닌 듯.

홀린: 이 영화의 인물묘사는 대단히 사실적이에요.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나 마크 러팔로 모두 프로페셔널의 어떤 심드렁함이나 냉소와 함께 간절함과 필사적인 감정도 놀랄 만큼 잘 연기해요. 그게 세상 모든 프로페셔널의 공통점이기도 하죠.

그놈: “자네 오늘 생일이니까, 내가 시체를 맡지” 하는 형사의 대사가 기억나네요.

홀린: 데이빗의 동료 형사 빌이 먼저 강력반을 그만두면서 “내가 자네한테 떠넘기는 게 있는 건가”라고 묻는 대사도 감명 깊었습니다.

그놈: 요컨대 <조디악>은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새로운 단계를 여는 영화 같습니다. 워낙 영화적 화술이 뛰어났지만 그 효과가 자극과 스릴에 머무를 때가 많았는데 <조디악>은 비약했어요. 다음 영화는 브래드 피트가 도로 젊어지는 중년 남자로 분하는 작품이라죠. ^^

홀린: 뭔가 핀처답지 않은 이야기네요. ^^; <조디악>에서 핀처의 영화적 시야가 아주 넓어졌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핀처의 베스트는 <파이트 클럽>이야요.^^ 댁은 이번에 <조디악>으로 바꿨수?

김혜리 “기본적으로 미스터 빈은 아주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어린아이에요. 수명 긴 캐릭터 중에 이렇게 이기적인 캐릭터도 드물걸요. ”
이동진 “1997년작 <빈>과 그리 큰 완성도 차이는 없지만, 이 영화는 <빈>이 갖고 있지 못한 음악적인 매력이 있어요.”

그놈: 넹. -_-#) 편집된 분량이 워낙 많다고 해서 DVD를 기다립니다. 다음 영화 주인공을 소개하죠. 과자 부스러기처럼 재앙을 흘리고 다니는 사나이, 보고 있자면 가끔 억장이 무너져 넥타이로 목을 조르고 싶은 사나이, <미스터 빈의 홀리데이>의 그분입니다!

홀린: 전 달려가서 넥타이를 풀어주고 싶던데….^0^

그놈: 하지만 미스터 빈이 사고 저질러놓고 곧장 탄로날 게 뻔한 미봉책으로 거죽만 대충 수습하려고 애쓸 때 보면 정말 잔소리를 하고 싶다니까요. -.-

홀린: ^^ 사실 미스터 빈이 좀 분열적인 캐릭터이긴 하죠. 어떤 때는 너무나 선량하지만 어떤 때는 너무도 뻔뻔하잖아요.

그놈: 기본적으로 미스터 빈은 아이죠. 자기 세계에 푹 빠져서 외계를 잘 인식을 못하는 어린아이예요. 따라서 아주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에요. 수명 긴 캐릭터 중에 이렇게 이기적인 캐릭터도 드물걸요. +_+

홀린: 말투도 아이들처럼 같은 단어를 반복해서 말하곤 하죠. 전 이 영화의 예고편을 보면서 제목도 그렇고 자크 타티의 걸작 <윌로씨의 휴가>를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니 별 공통점은 없더군요.

그놈: 남프랑스 해변이 목적지라는 점과 미스터 빈이 본디 자크 타티를 모델로 삼았다는 정도.

홀린: 대사가 적고 몸으로 웃기는 경우가 많다는 것, 리듬이 여유롭다는 것 정도.

그놈: 오히려 미스터 빈이 자기 때문에 아버지와 헤어진 소년과 동행하는 대목에서는 찰리 채플린의 <키드>와 가깝죠.

홀린: 딱 그렇죠. 둘이 벤치에 앉아서 다리 꼬고 소리 흉내내는 장면은 정확히 채플린의 <키드>죠. 하지만 결정적으로 <키드>의 페이소스는 이 영화에 없어요. 그게 걸작과 그냥 재미있는 영화를 구분짓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놈: 유머의 코드가 단순한 것도 약점이에요. 레스토랑은 TV의 <미스터 빈> 시리즈에서 많이 본 듯하고, 프랑스어를 세 마디- 빈이 프랑스어라고 굳게 믿는 ‘그라시아스’를 포함해- 밖에 못한다거나, 기차를 놓치는 설정의 반복은 좀….

홀린: 그래도 스페인어까지 3개 국어를 하시네요. ^_^

그놈: 미스터 빈 캐릭터의 전작 극장용 장편 <빈>에서는 로완 앳킨슨의 코미디 스타일이 순수하고 단순해도 긴 호흡의 이야기가 받치고 있었는데, <미스터 빈의 홀리데이>는 줄거리도 토막난 구조의 여행기이다 보니 다소 단조로웠습니다.

홀린: 제 생각은 조금 달라요. 1997년작 <빈>보다 10년 만에 나온 이 영화가 낫다고 봤어요. 그리 큰 완성도 차이는 없지만, 이 영화는 <빈>이 갖고 있지 못한 영화적인 리듬을 갖고 있다고 봤거든요.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음악적인 거라고 생각해요.

그놈: 쩝. ‘음악적’이라는 표현은 정말 <윌로씨의 휴가> 같은 영화를 위해 아껴둬야 하는데….-..-

홀린: 그 영화는 “탁월하게 음악적”인 거고요. ^^

그놈: 음악이라니 말씀인데, 제가 <미스터 빈의 홀리데이>에서 터뜨린 두 차례 큰 웃음 중 한번은, 돈을 잃어버린 빈이 광장에서 스카프 둘러쓰고 푸치니의 <오 나의 아버지> 아리아를 립싱크할 때였어요. 아아, 로완 앳킨슨의 콧구멍이 갸름해질 때 나오는 포스는 정말 무적입니다. T-T

홀린: 아카데미 베스트 노스트릴(nostril)상이라도 줘야 할 듯. ^^

그놈: 미스터 빈이 칸영화제에 도착했을 때 상영되는 개막작도 물건이었죠. 무려 제목이 <플레이백 타임>! T-T

홀린: 예술영화에 대한 조롱의 화룡점정이죠.^^ 그런데 이 영화보다 긴 타이틀 시퀀스를 본 적이 있나 싶더군요. 첫 경품 시퀀스부터 시작해서 파리에서 길을 헤매는 장면을 지나 점심식사를 하는 신에서야 끝나더라고요. 89분짜리 영화에서 대체 타이틀 시퀀스가 몇분의 몇인 거야. --;

그놈: 이 영화는 미스터 빈 캐릭터의 극장영화로는 마지막이라고 하더군요. 아쉬워서 타이틀이 길었던 것 아닐까요?

홀린: -..- 그걸 누가 알겠어요. ‘미스터 빈이 행운권 추첨에 당첨되어서 프랑스 해변으로 여행가는 영화’로는 마지막이란 뜻 아닐까? ^^

그놈: 아니, 그럼 다짐이 없었으면 같은 이 줄거리로 여러 번 찍을 수도 있다는 뜻? 정말 넥타이로 목을 조를지도 몰라요! 하지만 여전히 <미스터 빈> 시리즈는 기내용 프로그램으로는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

홀린: <미스터 빈>만큼 많이 기내 상영된 작품도 없을 거예요. 아시아나단편영화제에도 한번 출품하시지.

이동진: “<만남의 광장>은 <웰컴 투 동막골>과 <공동경비구역 JSA>를 남남북녀라는 모티브로 대충 이어 붙인 느낌이 강했어요.”
김혜리: “대사와 상황을 만들어내는 코미디 감각은 개성있지만, 배우에 대한 의존이 과해 보여요.”

그놈: 검색 결과 세계적으로 50개 항공사에 공급됐다는데요. 이쯤 되면 파블로프의 개처럼 TV에서 미스터 빈을 보면 반사적으로 여행을 가고 싶어지는 사람들이 생길지도. ^^; 자 미스터 빈은 쉬게 보내드리죠. 임창정, 박진희 주연의 한국 코미디영화 <만남의 광장>도 이번주 개봉입니다.

홀린: <만남의 광장>은 <웰컴 투 동막골>과 <공동경비구역 JSA>를 합쳐놓아 기획한 것 같더군요. 두 영화의 그림자가 너무 컸어요. 한국전이 일어났는지도 휴전이 됐는지도 모를 정도로 순박한 산골 사람들이, 철조망으로 마을이 동강나면서 분단의 아픔을 몸으로 앓는 기본 설정도 그렇지만, 마당 평상에서 마을 주민끼리 대책회의를 하는 장면이나 하늘을 뒤덮은 전투기를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롱숏 같은 장면의 구체적 묘사도 <웰컴 투 동막골>을 본 사람이면 누구나 비슷하다고 생각할 거예요. 심지어 동막골에서 순박한 주민으로 인상적으로 나왔던 심원철씨가 여기서도 거의 같은 배역으로 나온다는 것까지 똑같죠. 그리고 남북 주민의 비밀 왕래로 사건이 벌어진다는 점에서 모티브는 <공동경비구역 JSA>와 같죠. 두 영화를 남남북녀라는 모티브의 풀로 대충 이어붙인 느낌이 강했어요.

그놈: 자꾸 비슷한 영화를 나열해서 미안스럽습니다. 저는 삼청교육대 호송차량에서 떨어진 공영탄(임창정)이 비밀을 지닌 마을에 들어와 신임 교사로 오인받는 대목 이후로는 <대단한 유혹>과 <조용한 가족>이 떠올랐어요. <대단한 유혹>은 무의촌에 온 의사를 못 떠나게 하려고 바닷가 마을 주민들이 갖은 수를 다 쓰는 코미디였죠. <조용한 가족>에는 가족의 비밀을 알아차린 투숙객을 울며 겨자 먹기로 죽이다가 결국 살인이 일상이 되는 내용이 있었고요.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면, 마을의 비밀을 알아차린 외부 출신자를 죽이거나 아니면 딸과 엮어 친족으로 만들어버린다는 <만남의 광장>의 설정은 사실 상당히 섬뜩합니다.

홀린: 바로 그래서 <조용한 가족>이란 스릴러가 나왔던 거죠.

그놈: 다만 <조용한 가족>은 식구들이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빠져든 채 끝나고 <만남의 광장>은 모든 일을 없었던 걸로 돌리면서 전혀 다른 길을 갑니다.

홀린: 그런데 비슷한 영화들을 열거할 수밖에 없는 건, 창의성 부재와 확실히 연관이 있어요. <만남의 광장>의 레퍼런스들은 단순히 참조 수준 이상이라고 생각해요. 또 이 영화는 전개 과정에서 승부를 걸어야 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제대로 가려내지 못했다고 봐요. 일례로 공영탄이 이장과 그의 처제 사이를 오해하는 이야기는 억지스러운데도 꽤 길게 지속되죠. ‘형부가 처제를 덮치는 장면’도 세번이나 반복되면서 맥이 빠지고요. 코미디도 일정한 품격이 필요한데 그런 장면들이 영화의 격을 떨어뜨리는 것 같아서 안타까웠어요. 지저분한 화장실 유머보다 오히려 그런 장면이 영화의 격에 더 악영향을 끼치죠.

그놈: 삼청교육대가 삼청대학교 교육대라고 믿는 주민들의 착각과 처제-형부의 스캔들에 대한 공영탄의 질투어린 집요한 추궁이 <만남의 광장>의 주요 모티브입니다. 그런데 이중 하나는 단순하고 하나는 지루하죠. 한편 후반부를 끌어가는 엔진은 공영탄과 이장 처제 선미(박진희)의 로맨스가 될 텐데… 전반부에 전혀 없었던 감정을 만들어내려니까 돌아가는 길이 꽤 멀어집니다.

홀린: 코미디는 그런대로 통하는데, 감정을 거의 쌓아가질 못하니까 클라이맥스의 동굴장면에서 인물이 뒹굴면서 절규하는 부분에 이르면 좀 뜨악해지는 순간이 오는 거죠.

그놈: 그리고 배우에 대한 의존이 좀 과해 보였습니다. 연기를 이끌어가기보다 재미있다고 여겨지는 연기를 좀처럼 버리지 못한 게 아닐까요. 이 점도 영화가 횡적으로는 상황을 재미있게 펼치는데, 앞으로 전진하려고 하면 힘겨워지는 이유였던 것 같습니다.

홀린: 설혹 개인기가 뛰어난 배우들이라도 그걸 조율하지 않았을 때 장면 장면에서 서로 흘러넘치면서 영화를 과잉 에너지로 축축하게 적셔버린다고 할까요. 그리고 중견 배우를 캐스팅해서 욕설 대사를 거듭하게 함으로써 즉각적으로 웃기려 하는 것은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김수미씨로 충분했다고 느껴지는데 이 영화에선 그 역할을 임현식씨가 담당하죠. 처음 한두번은 웃겼는데 계속 반복되니, 좀 꺼려지더라고요.

그놈: 아마도 캐릭터의 특성으로 확실히 인식시키려는 조바심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만남의 광장>이 캐릭터를 관객에게 인지시키는 방법은 주로 ‘반복’입니다. 장성이 되고 싶어 안달복달하는 장교 캐릭터의 행동도 그렇고, 알 수 없는 이유로 싸움을 반복하는 두 주민의 묘사도 그렇습니다. 반복법을 과용하면 갈수록 영화의 걸음이 무거워지죠. 그러나 대사와 상황을 만들어내는 코미디 감각은 개성있다고 느꼈습니다.

홀린: 교사로 부임해 오던 류승범씨가 지뢰를 밟고 발을 못 뗀 채 몇날 며칠 숲에서 꼼짝 못하는 장면들은 상당히 재미있었어요. 그 대목들은 따로 떨어진 단편 같더라고요.

그놈: 류승범씨는 ‘연쇄 장면 절도범’이에요. 이 배우는 영화에서 작은 역할도 심심치 않게 맡는데 그때마다 시선을 홀랑 빼앗아버리죠. 어디에 어느 시점에 투입을 해도 거기 딱 맞는 자연스러운 연기가 놀라울 뿐이에요.

홀린: <아라한 장풍대작전>에서 요구르트 훔쳐먹다 걸려서 사설 늘어놓는 장면은 정말 탁월하잖아요. 누구도 흉내 못 낼 것 같고. <만남의 광장>에서도 배를 곯다가 기도를 마치자마자 개구리가 나타나니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라고 할 때 많이 웃었습니다. 도박 말라고 아버지에게 마지막 말 남길 때도 압권. ^0^

그놈: 비장하게 마지막 말을 써서 날린 종이비행기가 죄다 사방 2m 이내에 옹기종기 흩어져 있는 광경을 찍은 숏에서 쓰러졌답니다. ^^

홀린: 절망한 그가 “다시 태어나면 나는 지뢰로 태어날 거야”라고 충동적으로 외칠 때는 정지우 감독의 <사랑니>도 생각났어요. ^0^ “다시 태어나면 이석으로 태어나고 싶어”라는 소녀의 대사가 있었잖아요.^^

그놈: 그런데 무슨 의미였을까요? 지뢰로 태어나고 싶다는 건?

홀린: 이렇게까지 강력하게 괴롭힐 수 있는 힘이 있으니, 차라리 지뢰로 태어나고 싶다는 순간적인 생각이 들었겠죠.

그놈: 그렇다면 <사랑니>하고 뜻도 통하네요. 사랑하는 상대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말에도 역시 “이 애타는 마음을 보상받겠다”는 복수심 비슷한 감정이 있잖아요. ^^

홀린: 그래, 다시 태어나면 뭐로 태어나고 싶수? 혹시 키보드?

그놈: 음… 상추요.

홀린: *.* 헉, 뭐요?

그놈: 상추 먹으면 졸린대요. 사람들을 잘 자게 해주고 싶어요.

홀린: 허허허. 그러지 않아도 우리 토크가 하도 길어서 보시다가 주무시는 독자들도 이미 많을 듯.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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