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세월을 유희하는 불멸의 마녀
2007-08-23
글 : 김도훈
<스타더스트>의 미셸 파이퍼

왜 데브라 윙거는 영화계를 떠난 걸까. 로잔나 아퀘트의 질문에 데브라 윙거 대신 마사 플림튼이 답했다. “최소한 남자배우들에게는 옵션이라는 게 있기나 하지. 캐릭터 연기라는 옵션 말이야.” 2002년작 <데브라 윙거를 찾아서>는 80년대 전성기를 보낸 연기도 잘하고 아름답기까지 한 여배우들이 왜 갑자기 영화계에서 사라져버렸는지를 추적하는 다큐멘터리다. 멜라니 그리피스, 대릴 한나, 사만다 마티스, 로라 던 같은 여배우들이 증언하는 것은 30, 40대 여배우를 위한 역할마저 모조리 새로운 20대 여배우들에게 돌려보내는 할리우드의 처녀애호증이다. 하지만 미셸 파이퍼는 거기에 없었다. 아마도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거나, 혹은 애들을 키우느라 정신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돌아보면 80, 90년대의 파이퍼는 보기 드문 괴물이었다. <스카페이스>(1983)와 <이스트윅의 악녀들>(1987)의 파이퍼는 알 파치노와 잭 니콜슨의 카리스마에 기죽지 않는 거의 유일한 금발의 신예였다. <위험한 관계>(1988)와 <사랑의 행로>(1988)로 오스카 후보에 오르자 그녀는 이내 “금발 미녀의 몸에 갇힌 성격파 배우”라 불렸고, 팀 버튼의 <배트맨 2>(1992)와 스파이크 리의 <러브 필드>(1992), 마틴 스코시즈의 <순수의 시대>(1993)로 이어지는 90년대 초반의 파이퍼는 섹스심벌과 성격파 여배우가 동의어일 수도 있다는 희귀한 증거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때를 기점으로 파이퍼의 출연작들은 서서히 느슨해졌다. 사실 그녀 역시 또 다른 데브라 윙거였던 거다. “성숙한 여배우를 위한 훌륭한 배역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직감한 파이퍼는 속도를 조금 줄여보기로 했고, 93년에는 <알리 맥빌>와 <보스턴 리걸>의 각본가·제작자 리처드 E. 켈리와 결혼식을 올렸다. 게다가 결혼 직전에 아이를 입양했다. 안젤리나 졸리가 입양을 할리우드의 새로운 트렌드로 만들기 십수년 전이었다.

파이퍼는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꾼 건 할리우드의 변화가 아니라 아이들이라고 말한다. 문제는 아이들이 그녀를 바꾼 이유가 보통의 할리우드 여배우들과는 너무도 다르다는 거다. 파이퍼에게 아이의 입양이 가져다준 최고의 미덕은 “나르시시즘으로부터의 탈출”이다. “아이를 가지면서 마침내 오랜 나르시시즘을 벗을 수 있었다.” 어이없게 들리지만 파이퍼라면 당연한 일일 거다. 그녀처럼 아름다운 할리우드 여배우가 끝없는 나르시시즘에 빠지지 않기란 불가능한 일이니까. “내 말은, 내가 생산하는 상품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내 삶으로 불러들여 스스로에게 현혹되지 않도록 주의를 분산시키는 게 필요했다. (웃음)”

믿을 수 없게도 14년이나 일부일처제를 즐겨온 파이퍼는 믿을 수 없게도 내년이면 50이 된다. 하지만 나르시시즘으로부터 탈출하고 할리우드로부터 떨어진 북캘리포니아에 가정을 꾸린 그녀는 더이상 노쇄한 역할을 맡아도 괘념치 않는 모양이다. 신작 <스타더스트>에서 그녀는 영원한 젊음을 얻기 위해 젊은 처녀의 심장을 강탈하려는 수백살 먹은 쭈그렁 마녀를 연기한다. 시에나 밀러와 클레어 데인즈가 초롱초롱한 금발을 휘두르는 영화에서 늙은 마녀를 연기하는 것이 두렵진 않았냐고 물어본다면 그녀는 괜스레 엄살을 떨 것이다. “당연하지. 여자는 나이드는 걸 스크린으로 지켜보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게다가 또 다른 컴백작인 <헤어스프레이>와 <나는 절대 네 여자가 될 수 없을 거야>(I Could Never Be Your Woman)에서도 그녀는 악랄한 중년 악녀와 11살 어린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중년 거물을 연기한다.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 40대 초반이었을 때보다는 지금이 오히려 내가 늙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훨씬 쉽다. 이제야 속이 좀 편해졌다. (웃음)”

미셸 파이퍼는 게으른 할리우드 관계자들 때문에 지난 8월6일에야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핸드 프린팅을 남기며 입성했다. 파이퍼는 이를 위해 최고급 마사지숍에서 값비싼 손바닥 맛사지를 받았겠지만, 10년 전이었다면 없었을 잔주름들이 핸드 프린팅에 자글자글 새겨졌을 터이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파이퍼의 얼굴은 대서양 건너편 불멸의 뱀파이어 자매 이자벨 아자니를 떠올리게 할 만큼 예전 그대로 아름답지만, 손바닥 안의 눈금들만은 세월을 모조리 숨길 수 없는 법이니까. 지금의 파이퍼라면 그 또한 괘념치 않을 것이다.

사진제공 RE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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