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임원희] 욕심을 버려야 나도 살고 영화도 산다고 생각했다
2007-08-29
글 : 문석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죽어도 해피엔딩> <식객>의 임원희

한때 임원희는 ‘내일의 주연배우’로 불렸다. ‘장진 사단’의 일원으로 영화계에 들어와서 주목을 받았던 그는 인터넷영화 <다찌마와 리>에서 다찌마와 리로 등장해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 뒤에 출연한 <이것이 법이다>와 <재밌는 영화>에서 그의 자리는 한 단계 격상됐다. 조연급 배우에서 일약 주연이 된 그의 미래는 탁 트인 고속도로처럼 보였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그의 ‘주연시대’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는 코믹한 캐릭터의 주연 제의를 거절하면서 <실미도> <쓰리, 몬스터> <주먹이 운다>에서 다시 조연으로 출연했고, 언젠가부터는 아예 스크린에 등장하지 않았다. 그리고 2년 반이 흐른 지금, 임원희는 <죽어도 해피엔딩>과 <식객>, 2편의 영화에서 자신의 존재를 다시금 드러내고 있다. <죽어도 해피엔딩>에서 그가 맡은 두찬이라는 캐릭터는 공주병 심한 여배우 지원(예지원)을 10년 동안 보살피면서 연정을 쌓아온 매니저. 크리스마스 이브 밤 지원을 찾아왔다가 재수없게 죽어버린 네명의 남자를 처리해야 하는 그는 예지원 곁에서 주연급 조연 연기를 펼친다. ‘주·조연이란 게 뭐가 중요하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 구별이 유독 심한 한국 영화계의 현실을 생각해보면 그의 행보는 이상하게 보이기도 한다. 2년 넘는 세월을 보내면서 “주·조연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하겠다”는 각오를 다졌다는 그의 말 속에서는 삶의 높은 봉우리와 깊은 협곡을 거듭 오가면서 닦인 반듯한 마음이 느껴졌다.

-굉장히 오랜만에 만나는 듯한 느낌이다.
=그렇게 됐다. <주먹이 운다> 이후 케이블TV 영화 <코마>와 <펀치 스트라이크>를 찍었는데 많이들 보지 않은 것 같다. 게다가 <식객>도 지난해 찍었지만 늦어져서 11월1일에야 개봉한다. 하여간 세월이 금방 가더라. 그동안 영화를 하고 싶었지만, 못한 것도 있고 안 한 것도 있었다.

-그동안 뭘 했나.
=영화를 안 찍을 때는 그냥 놀았다. 요즘에는 운동을 많이 했다. 매일 하게 됐는데 벌써 8개월째다. 나이를 먹을수록 게을러지는 것 같아서. 턱살이 생기는데, <식객> 때는 역할이 악역에 가까워서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결국엔 흉하더라. 게다가 <죽어도 해피엔딩> 때는 강경훈 감독님이 “나이스하게 나와야 한다”고 해서 좀 뺐다. 운동하고 술 마시고 인터넷하고 그런다. 나도 충전하기 위해서 해외에서 몇달 있다 왔다, 이렇게 말하고 싶지만, 그런 건 돈 있는 사람들이나…. (웃음)

-술은 주로 누구와 마시나.
=친구들, 주로 남자들이다. 배우끼리는 바빠서 자주는 못 먹는다. 박용우씨와 가끔 먹고 정재영, 신하균씨와도 가끔 마신다. 혼자 마실 때도 있는데 많이는 안 마신다. 하여간 일주일에 5, 6일은 마신다. 술을 안 먹어보려고 얼마 전 서점에 가서 영어교재를 샀다. 저녁때 할 일이 없으니까 술을 마시게 되는데, 그 시간에 영어공부를 하자는 거다. 아, 아직 펼쳐보지는 않았다. (웃음) <죽어도 해피엔딩>에 함께 출연한 성우 리처드 김과 이야기를 하는데, 굉장히 쉬운 단어를 말했는데도 못 알아듣겠더라. 무식하다는 소리를 듣지 않을 정도는 돼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어도 해피엔딩>에는 어떻게 캐스팅됐나.
=시나리오 받기 전부터 출연 제안은 있었다. 그러다 시나리오를 받았는데, 매니저에게 ‘나한테 들어온 거 맞니?’라고 물어봤다. 괜찮았던 게 내가 기존의 영화에서 했던 연기, 그러니까 웃겨준다거나 감초식 연기라든가 그중 하나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고맙더라.

-시나리오를 잘 봤나보다.
=시나리오는 좋은데 짧은 기간 안에 이걸 찍을 수 있나, 하는 걱정이 되긴 했다. 1주일에 6회씩, 30회차 만에 찍었다. 거의 한달 만에 찍은 셈이다. 이렇게 빨리 찍다보면 영화가 엉망이 되지는 않을까 그런 우려도 되더라. 우리 영화 자랑 같지만, 어쨌건 굉장히 치열하게 찍었다. 거창한 말이지만, 앞으로 다른 한국영화도 이런 식이 될 것 같다. 빨리, 그리고 잘 찍는 분위기 말이다.

-두찬은 여러모로 복잡한 캐릭터다. 계속 지원 옆에 있으면서 서포트를 해야 하는 동시에 영화 전체의 무게를 잡아줘야 하는 것 같았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싱거울 수 있는 캐릭터다. 그래도 큰 걱정은 안 한 게, 나는 캐릭터에 대한 고민은 그렇게 하지 않는 편이다. 악한도 자식 앞에서 웃을 수 있고, 선한 사람도 운전하다가 욕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캐릭터를 미리 딱 정해놓으면 정형화되니까 그냥 이미지 하나만 담아놓고 가는 거다. 그러다보면 내가 묻어나겠지 하는 식으로 생각하면서.

-좀 답답했을 것 같기도 하다. 예지원과 4명의 남자배우들이 코믹 연기를 하는 데 비해, 두찬은 눌러줘야 했으니 말이다.
=왜 배우라면 누구나 ‘한 칼’ 하고 싶어하는 게 있지 않나. 그런데 그것을 눌러야 좋은 배우라고 생각한다. 한 칼 해봐야 관객은 잠시 웃을지 몰라도 영화 아는 사람들은 ‘쟤 왜 저랬어’ 그런다. 묻어나듯 연기한다라는 말을 듣고 싶으니까 전체를 계산할 수밖에 없는 거다. 욕심을 버려야 나도 살고 영화가 산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렇게 얘기하고 있지만 보는 분들이 ‘개뿔 그게 뭐야’라고 생각하면 할 수 없는 일이고.

-매니저 역할을 어떻게 생각했나.
=매니저라는 설정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를 놓고 생각을 많이 했다. 내 매니저가 여러 얘기를 해줬는데, 이를테면 지원의 스타킹이 찢어지는 일이 벌어지고, 내가 항상 가지고 다니던 스타킹을 준다, 이런 것도 생각해봤다. 그런데 그게 결국 관객에겐 사족으로 느껴질 것 같더라. 결국 매니저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도 노골적이지 않게 슬쩍 묻어나게 할 수밖에 없었다. 지원 뒤에서 묵묵히 지켜보면서 뒷처리를 다 해주는 그런 모습 말이다. 하여간 매니저가 돈을 좀 벌려면 신인도 키우고 해야 하는데 한 사람만 10년간 돌봤다는 건 현실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일이긴 하다.

-예지원이라는 여배우를 두고 수많은 남자들이 경쟁을 벌이는 형국인데, 남자배우들 사이에 은근한 연기 경쟁이 있지 않았나.
=보이지 않는 경쟁심은 분명 있다. 그게 없다면 배우도 아닐 거다. 문제는 그렇게 경쟁심을 품고 서로를 견제할 시간이 없을 만큼 빨리 찍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나와 지원씨는 매일같이 세트장에 나가야 하지만, 다른 배우들은 며칠씩 와서 찍다가 가곤 했다. 우리끼리도 그런 얘기를 했는데, 손님 받는 느낌이라고. 손님을 받아서 다 해치우긴 하지만. 그래서 누군가 찾아오면, ‘오늘은 돌아가시는 날이네요’, 이러거나 ‘오늘은 시체로 오셨네요’ 하면서 농담을 하곤 했다. (웃음)

-순제작비가 17억원 정도 든 것으로 아는데, 저예산영화라서 힘든 점이 많았을 것 같다.
=무엇보다 바쁘다는 것. 조금만 더 시간을 투자하면 더 좋은 그림이 나올 텐데, 하면서 아쉬울 때도 있었다. 그래도 감독님 자리 주변에 모니터가 5대 정도 깔려 있는데, 분위기는 <실미도>나 <태극기 휘날리며>더라. 그리고 김영화 프로듀서의 지론이 잘 먹어야 잘 찍는다는 것이어서 부식대에는 과자, 초콜릿, 과일 같은 게 풍성했고, 심지어 커피도 여러 종류였다. 부식대만큼은 할리우드 부럽지 않았다. (웃음)

-거의 모든 장면을 세트에서 찍어서 답답하기도 했겠다.
=양수리 세트 안에 영화 속 집을 통째로 지어놓았다. 방장면도 따로 세트를 만든 게 아니라 실제로 그 안에 들어가서 찍었다. 그러니 거의 그 집에서 산 셈이다. 원래 갑갑한 것을 싫어하는 성격인데, 한달동안 너무 지겨웠다. 결국 술을 마시는 거다. 혼자 먹을 때가 많았는데, 그럴 때는 맥주 피처 한병과 소주 한병 또는 긴 캔맥주 2개와 소주 한병을 사다가 천하장사 소시지 2개나 작은 골뱅이 통조림 하나를 안주로 먹었다. 그러면서 그날 촬영을 정리하고 다음날 일을 생각하고 했는데, 그게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식객>에서는 봉주라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성찬(김강우)과 봉주라는 두 사람의 대결구도로 가는 영화인데, 나는 성찬과 숙명의 라이벌 관계다. 선과 악이 있다면 악역에 해당할 거다.

-요리 공부를 해야 했겠다.
=석달 정도를 요리학원을 다니며 배웠다. 그리고 영화에서 쇠고기 정형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니까 소의 뼈를 바르고 등심, 안심, 살칫살, 뭐 이렇게 부위별로 분리하는 일 말이다. 아마 영화에는 처음 나올 것 같다.

-그렇게 하고 나면 쇠고기 먹기가 부담스러웠을 것 같다.
=괜히 봤다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또 며칠 지나니까…. (웃음) 소가 굉장히 불쌍하긴 하다. 어떤 과정을 겪나하면… (아주 상세하고 적나라한 설명)… 이렇다. 그래서 소들이 줄을 서 있는데 한 마리를 사고 싶었을 정도다. 살려주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또 돼지 정형 과정을 봤는데… (또 자세한 설명).

-요리 실력은 많이 늘었나.
=당시에는 많이 늘었는데 안 하다보니 실력이 다 죽더라. 게다가 나는 왼손잡이인데, 유명한 요리사들은 왼손으로 요리하면 안 된다는 의식이 있어서 오른손으로 배웠다. 고생을 더 많이 한 셈이다.

-집에서 요리를 하기도 하나.
=전~혀. (웃음) 어머니와 둘이 사는데 요리는 안 한다. 그리고 내가 배운 요리 중에는 실제로 써먹을 수 있는 게 없다. 봉주라는 애는 실력이 달리니까 화려한 요리를 하는 캐릭터다. 이를테면 도미면 같은 요리를 하는데 그런 것을 어떻게 집에서 해먹겠냐. 아, 고기 다루는 법을 배웠으니까 고기에서 지방 발라내는 일 같은 건 내가 다 한다.

-<식객>도 개봉이 늦어져서 아쉬움이 있겠다.
=요즘… 개봉하는 게 어디냐. 개봉도 못하고 밀리거나 완성이 안 되는 영화가 많잖나.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두편이 비슷한 시기에 개봉하는 것도 좋지 않은가.

-케이블영화 두편은 조명을 크게 못 받았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외국과 달리 한국에서는 아직 더 있어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특히 <코마>는 좀 아쉬운 게 심혈을 기울여 찍었는데 너무 안 봐주시니까 아쉽더라.

-임원희라는 배우의 경력을 살펴보면, 한때는 <재밌는 영화> <이것이 법이다> 등에서 주연급으로 올라가다가….
=다시 떨어졌다. 그 사이에 느낀 점도 많다. 내가 그때 죽죽 차고 올라갔다면 안 좋은 일이 많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주연급, 조연급 가리지 않고 열심히 하자는 생각을 하게 됐는데, 그 시기가 자양분이 된 것 같다.

-왜 그렇게 떨어졌다고 생각하나.
=<다찌마와 리>로 약간 이름이 난 다음에 코믹 캐릭터에 대한 요청이 너무 많았다. 하고 싶지 않은 영화가 너무 많아서 못한 것 같다. 너무 얄팍한 코미디의 제안이 많았는데, 그들 영화에 나가지 않은 데 대한 후회는 없다. 그런 영화들에 출연했다면 어쩌면 연기자로서의 수명이 짧아지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그때 그런 영화를 안 했기 때문에 <식객>이나 <죽어도 해피엔딩>에 출연할 수 있었던 것도 같다.

-그래도 당시에는 심적인 충격도 있었을 것 같다.
=안 힘들었다면 거짓말이다. 주연을 해봤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힘든 건 사실인데 그걸 뭐 어떡하나. 이겨내야지. 내가 주연하고 싶다고 해서 누가 시켜주는 것도 아니고, 마음을 비우고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는 거다.

-장진 감독의 수다를 떠난 것에 대해선 후회하지 않나.
=내 선택이기 때문에 후회는 없다. 아, 장진 감독님과 사이가 안 좋은 것으로 많이들 알고 있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 내가 장진 감독님 영화에 많이 나오지 않은 것은 내가 나올 역할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긴 <강철중>에 캐스팅된 것도 장진 감독의 추천 때문이라고 들었다.
=그런가? 나는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시나리오 어떻게 쓰셨는지 궁금하네. 그러니까 장진 감독님과 내 사이가 안 좋다는 말은 틀렸다는 거다. 결혼식 때도 찾아갔는데. 물론 예전만큼 자주는 못 만난다. 무엇보다 그분이 바쁘기 때문이다.

-장진 감독은 서울예대 시절부터 알았나.
=그렇다. 그리고 우리 서울예대 90학번 연극과가 엄청나다. 정재영, 황정민, 신동엽, 안재욱, 최성국까지. 동엽씨도 당시에는 개그맨적인 이미지가 아니었다. 지금도 사석에서 만나면 진지한 면이 많다. 나도 학교 다닐 때는 진지한 이미지였다. 학교 때 알았던 사람들은 “네게 그런 이미지가 있는 줄 몰랐다”고 한다.

-본성은 어느 쪽인가.
=재밌는 편이다. 물론 내가 너무 재미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 정도는 아니고. 혼자 자라서 그런지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다. 군대에 들어가서 첫날 밤 자려는데 사람들이 죽 있어서 못 잤을 정도다. 그렇게 보면 연극을 한 것도 신기하다. 사람들끼리 부대낄 수밖에 없는 일인데 말이다.

-그런데도 연극을 하겠다고 한 것은.
=그냥 끌렸다. 고등학교 다닐 때 방송반에 떨어져서 연극반으로 들어갔는데, 그냥 하고 싶었다.

-목소리가 좋아서 연극에 더 어울렸을 것 같다.
=목소리… 만 좋다. (웃음) 그리고 목소리도 가끔 콤플렉스가 될 때가 있다. 자칫하면 목욕탕 발성식의 사극톤이 돼버리잖나. 내가 목소리를 조금만 깔아도 다들 이상하게 받아들인다. 요즘 연기 트렌드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으니까. <식객> 때도 멀리서 오는 강우씨에게 “대령 숙소에 칼이 발견되었어”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영화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목소리를 깔아서 하니까 감독님이 오더니 ‘원희씨 왜 갑자기 사극톤이야’, 그러더라. (웃음)

-연극을 하고 싶은 생각도 드나.
=연극 좋다. 그런데 솔직히 영화가 더 좋다. 카메라 앞에 서는 게 가장 좋다. 무대는 섣불리 올라가기 어렵고 경외스런 존재니까. 아, 그래도 연극을 하긴 해야 할 것 같다. 얼마 전 박희순 선배와 이야기를 하는데, 우리 둘 다 어느새 얍삽해져 끊어서 연기하는 데 익숙해졌더라. 감독님이 갑자기 ‘마스터로 찍죠’ 하면 당황하게 된다. 벌써 긴 연기가 안 되는 거다. 호흡이 짧아진 거다. 나사를 한번 조일 때가 된 것 같다.

-정말 해보고 싶은 연기가 있다면.
=꿈, 꿈 말인가? 꿈이니까 이야기할 수 있는 건데, 멜로 연기다. 어떤 배우도 마찬가지겠지만 나 또한 멜로 연기를 해보고 싶다.

-지금 인생의 목표는 무엇인가.
=배우로서 인정받는 것이다. 지금 내게는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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