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크리스 쿠퍼] 그를 안다고 말하지 마라
2007-08-30
글 : 최하나
<브리치>의 크리스 쿠퍼

기억력을 발휘해야 할 때다. 창백하고 네모난 얼굴, 냉담하며 완고한 눈동자, 신경질적으로 가느다란 입술. 불편함과 친숙함을 동시에 유발하는 낯의 그는 비밀 요원이나 군인, 폭압적인 아버지로 꽤 오랫동안 스크린을 방문해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명백한 진실 하나. 몸에 딱 붙는 옷을 입듯 일말의 위화감없이 인물을 소화하는 ‘캐릭터 액터’를 보며 사람들은 ‘캐릭터’를 기억하고 ‘액터’를 잊어버린다. 그 자리에 너무도 합당하기에 오히려 망각되는 얼굴들, 크리스 쿠퍼는 바로 그런 배우였다. 머리색을 바꾸고 시상식에 등장했을 때 함께 작업했던 촬영감독이 “대체 크리스 쿠퍼는 어디 간 거야?” 하고 고개를 갸우뚱했다는 웃지 못할 일화는 그가 각인되어온 방식이 관객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음을 짐작게 한다. “한동안 그런 식이었다. 영화에서 보안관을 연기하면 한 반년 동안 보안관 역할만 들어오고, 엄한 아버지를 연기하면 엄한 아버지 역만 쏟아지고. 배우라기보다는 그저 기능적인 캐릭터로 존재하듯이 말이다.”

미국 인디영화의 수장 존 세일즈의 눈에 들어 <메이트원>으로 스크린에 데뷔했을 당시 크리스 쿠퍼의 나이는 이미 36살이었다. <꿈꾸는 도시> <론 스타> 등 세일즈의 차기작에 잇따라 출연하며 찬찬히 기반을 다지던 그는 <머니 트레인> <타임 투 킬> <위대한 유산> 등 메이저영화의 조연을 하나둘 위임받으며 더디게나마 할리우드의 눈길을 받기 시작했다. 10여년 가까이 “딱히 이름은 없지만, 믿음직한 조연”의 궤도를 크게 벗어나지 않던 쿠퍼가 무심한 대중의 레이더 안으로 들어온 것은 99년 <아메리칸 뷰티>에 이르러서였다. 말끝마다 해병대 출신임을 강조하는 꼬장꼬장한 대령으로 등장한 쿠퍼는 아들을 난타하다가도 눈물을 흘리며 이웃 남자에게 입을 맞추는 사내의 뒤틀린 내면을 오롯이 그려냈고, 관객은 화강암 같은 가면 뒤로 드러난 맨 얼굴에 매혹됐다. 상승 곡선은 이어졌다. 음모형의 CIA 요원을 맡았던 <본 아이덴티티>가 우려와는 달리 흥행 대박을 터뜨렸고, 떡진 머리에 앞니가 몽땅 사라진 난초 중독자로 분한 <어댑테이션>은 그의 품에 오스카 남우조연상과 명성을 한데 안겨주었다. “<어댑테이션>으로 상을 받았을 때 내 나이는 이미 쉰이 넘어 있었다. 영화를 시작한 지는 20년 만이었고. 내가 인기나 유명세에 신경 쓰지 않는 건 너무나 당연한 거 아닌가. 입에 발린 말이 아니라, 난 그냥 내가 좋아서 연기를 해왔을 뿐이다.”

쿠퍼의 표현을 빌리자면, <브리치>는 그를 “주연으로 받아들인 최초의 스튜디오 영화”다. “운 좋게도 시나리오를 처음 읽은 사람이 나였기 때문에 작품을 하게 됐다”며 거듭 “행운”을 강조하는 그이지만, <브리치>는 마치 크리스 쿠퍼라는 배우를 위해 직조된 무대 같다. 22년 동안 러시아에 미국의 정보를 팔았던 FBI 요원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는 철저히 미니멀리즘적인 세팅 속에서 용의자인 로버트 핸슨과 그를 쫓는 에릭 오닐의 심리 대결에 초점을 맞춘다. 빈틈없이 모범적인 요원인 동시에 적국에 정보를 팔아치운 배신자, 독실한 가톨릭 교인인 동시에 아내를 포르노의 재료로 사용하는 파렴치한. 쿠퍼는 겹겹의 모순으로 둘러싸인 핸슨을 소름끼칠 정도의 기묘하고 불가해한 미궁, 그 자체로 살려냈다. “내가 출연을 결정하고 나서, 시나리오가 좋다는 소문에 거물급 배우들이 수도 없이 나를 밀어내려고 했었다. 끝내 마음을 바꾸지 않은 감독과 스튜디오가 고마울 따름이다.” 의심할 바 없이, 영화가 완성된 뒤 감사의 방향은 반대가 되었을 것이다.

미주리의 시골 목장에서 자라난 크리스 쿠퍼는 본래 집안의 이단아였다. 배우가 되겠노라 여자 대학의 발레 수업을 찾아다니는 그를 아버지는 “정신 나간 놈” 취급했고, 쿠퍼는 미주리대학을 졸업하자마자 탈출하듯 뉴욕을 향했다. 건설 아르바이트를 하며 연극 무대에 오르기를 수차례, 그는 브로드웨이와 오프브로드웨이를 넘나드는 전방위의 배우로 입지를 다졌다. “TV 출연 제의가 들어온 적도 물론 있었다. 그때마다 아직 준비가 안 된 것 같다고 거절하곤 했다. 몇 차례나 그랬으니 내 에이전트는 아마 꽤나 속을 태웠을 거다.” TV 출연 제의를 처음 받은 지 정확히 10년 만에, 그는 마침내 “준비를 마치고” 스크린과 브라운관에 잇따라 입성했다. 누군가가 크리스 쿠퍼에게 어떻게 그런 연기가 가능하냐고 경탄 섞인 질문을 던질 때, 그의 대답은 간명하다. “15년 동안이나 준비할 시간이 있었거든.”

크리스 쿠퍼가 좋은 연기를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딱 세 가지다. 시나리오, 경험, 그리고 상상력. 연기로 묶어둔 세월의 무게만큼이나 단단한 경험치를 지녔기에, 지극히 담백하게 “난 언제나 내 상상력을 활용하지”라 내뱉는 그의 다음 무대는 이라크전을 배경으로 한 스릴러 <더 킹덤>이다. 그런데 역시나, 그가 맡은 역할은 FBI 요원이란다. “아니, 또?”라고 불만이 터져나올세라 쿠퍼가 이야기한다. “캐릭터에 아주 흥미로운 비틀기(twist)가 있을 거다.” 속단하지 말 것. 이제 상상력을 발휘해야 할 때다.

사진제공 GAM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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