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리포트]
[현지보고] 황금사자의 시네마 천국, 막 올리다
2007-09-04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제64회 베니스국제영화제 개막, 개막작은 조 라이트의 <어톤먼트>

베니스에 오면 누구나 길과 기후에 관해 철학하게 된다. 여기는 그럴 만한 곳이다. 하지만 영화를 떼어 놓고 그것에 감탄한다면 혹은 영화의 도시 베니스를 떠올리지 않는다면 산 마르코 광장을 가득 메운 저 수많은 관광객들과 무엇이 다를까.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영화제가 열리는 도시 혹은 페데리코 펠리니가 <카사노바>로, 루키노 비스콘티가 <베니스에서의 죽음>으로 애정을 바쳤던 이 도시에서 말이다. 미로 같은 길과 수로를 벗어나 배를 타고 상영장이 있는 인근 리도섬에 도착하여 마침내 극장의 어둠과 빛에 몸을 묻을 때 비로소 영화의 미로가 펼쳐지고 그곳은 영화의 천국이라 할 만하다. 영화제 개막식이 열린 8월29일 주상영관 팔라조 델 시네마 주변에서는 하루 종일 영화 <시네마 천국>의 주제가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신기한 건 그 천국으로의 인도가 지겹기는커녕 도리어 꿈에 젖게 한다는 사실이다.

마르코 뮐러의 거취에 관심 집중

꿈의 도시에서 열리는 64번째 베니스영화제를 방문하는 할리우드의 스타들은 올해도 많다. 개막작 <어톤먼트>의 여주인공으로 개막식에 참석한 키라 나이틀리는 가장 큰 환호를 자아낸 인물이다. 그 밖에도 베니스의 단골손님인 조지 클루니가 경쟁부문 상영작 <마이클 클레이튼>으로 다시 베니스를 찾고, 역시 경쟁부문 작품인 <비겁자 로버트 포드에 의한 제시 제임스의 암살>의 프로듀서이자 주인공인 브래드 피트, <슬루스>의 주드 로도 명단에 올라 있다. 지난해 개막작 <블랙 달리아>의 여신 스칼렛 요한슨은 비경쟁부문 <내니 다이어리>의 여주인공으로 다시 온다. 켄 로치, 브라이언 드 팔마, 기타노 다케시, 토드 헤인즈, 웨스 앤더슨 등 스타들에 버금가는 거장 혹은 스타 감독들이 경쟁 및 비경쟁으로 오고, 장이모, 카트린 브레이야, 폴 버호벤,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등이 심사위원 자격으로 참석하는 것도 관심거리다.

베니스에 어떤 스타와 유명감독이 왕래할 것인가 하는 것이 리도섬을 메운 대중의 관심사라면 영화제 관련자들의 관심사는 다른 곳에 있다. 올해 베니스영화제 운영에 관한 초점은 두 가지로 모아지고 있다. 첫째는 지난 4년간의 임기를 끝으로 올해 마지막 해를 보내고 있는 집행위원장 마르코 뮐러의 향방이다. 올해로 계약이 끝나는 그의 거취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것이다. <버라이어티>는 “백조의 노래가 될 것인지 도약의 발판이 될 것인지”라고 관심을 표명하면서 “그가 수장으로 있던 4년간 그가 심은 강렬한 인상은 ‘더 적은 영화, 더 적은 상, (그러나) 더 큰 영향력’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 이라고 말했다. 어지러웠던 섹션은 좀더 명료하게 정리하고, 많은 작품을 가져오기보다는 실리적이며 질 높은 작품 선정에 힘쓰며, 그런 작품들의 프로그래밍과 더불어 외적으로는 할리우드의 별을 끌어모으면서 영향력을 높였다는 뜻이 될 것이다.

영화제 기간 동안 특별판을 내고 있는 이탈리아 중도좌파 일간지 <라 레프블레카>는 마르코 뮐러의 차기 연임을 조심스럽게 점치는 분위기에서도 “올해 12월에 임기가 끝나는 마르코 뮐러가 혹시 재신임되어 다음 4년간의 축제를 집행할지 모두가 토론 중”이라며 뮐러의 후임자는 아직 공석이지만, 전 로카르노영화제 집행위원장인 이렌느 비냐리가 뮐러의 뒤를 이을 가능성도 있음을 시사했다. 혹은 뮐러가 로마영화제로 가고 비냐리가 베니스영화제를 맡을 수도 있다는 가설을 조심스럽게 제기했다. 또 다른 유력 일간지 <코리에레 델 라 세라>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뮐러 본인은 “영화제가 끝나기 전까지 그 점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이 이번 영화제에 도움이 된다”고 입장을 밝힌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럽·아시아의 거장들과 할리우드를 양손에 쥔 프로그래밍

올해 화제가 되고 있는 또 한 가지는 그동안 베니스영화제의 숙원이었던 영화제 주상영관 팔라조 델 시네마 건물의 증축과 영화제 마켓 공간의 확장이 사실상 확정됐다는 것이다. 팔라조 델 시네마를 호위하던 황금사자들을 내리는 대신 건물의 외벽 일부를 깨고 들어선 구체 모양의 건물 디자인이 바로 그것을 상징한다. 헌 건물을 부수고 새 건물을 짓는다는, 좀더 크고 웅장한 상영관과 마켓을 마련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셈이다. 영화제쪽은 이미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공동 파이낸싱 형태로 토지에 대한 지원을 약속받았고, 전체 4개의 구역으로 다시 나눠 극장 상영시설과 마켓 공간의 활성화를 꾀할 계획이다. 차질없이 공사가 진행된다면 2011년 완공될 예정이다.

영화제 수장의 향후 노선과 운영 재정 및 공간 확충의 변화가 코앞에 닥친 사안이라면 베니스가 몇년간 지향해온 프로그래밍은 올해 들어 정점을 보여준다. 그동안 친할리우드적 노선을 취해온 입장이나 유난히 올해 경쟁부문에 많은 영어권 영화가 입성한 것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차례 알려진 바 있다. 이 점에 대한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건 한두해의 일이 아니고 게다가 올해 역시 영화제쪽의 입장은 확고하다. <스크린 데일리>에 실린 기사에 의하면 마르코 뮐러는 “4년 전만 해도 유니버설이 경쟁부문 오프닝으로 영화를 내놓고 워너브러더스가 브래드 피트가 제작하고 주연한 영화를 내놓고, 폭스가 웨스 앤더슨의 영화를 내놓는 건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이라며 “이번 프로그래밍은 혁신적인 영화 만들기가 꼭 저예산 실험영화와 일치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것이 왜 공식부문에 그렇게 많은 미국영화가 있는지에 대한 이유다. 우리는 영어권 영화, 미국영화, 미국의 자본으로 만들어진 영화의 다양한 맥락 안에서 새로운 영화(cinema)의 활기를 광범위하게 확인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올해의 프로그래밍을 “균형감있는 판본”이라고 못 박는다.

“균형감있는” 프로그래밍, “균형을 이룬” 최고의 작품을 향해

그가 표현하는 균형감이란 경쟁부문에 할리우드와 영어권 신진세력을 데려오되 기존의 유럽과 아시아의 여러 거장을 포함시키고, 특히 경쟁부문에 속하지 못한 친베니스의 거장들인 우디 앨런, 클로드 샤브롤, 기타노 다케시 등의 경우 올해 새로 신설된 비경쟁 부문의 마스터즈 섹션으로 모셔오는 구도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혹은 이제 갓 두 번째 작품을 만든 조 라이트의 영화를 개막작으로, 알렉시 첸의 데뷔작 <블러드 브러더스>를 폐막작으로 선정한 것은 신구 조화를 맞추겠다는 제스처로 읽힌다. 그동안 “한국도, 일본도, 중국(China)도 아닌 아시아의 거장이 될 것”이라는 예고에 맞게 두기봉의 <매드 디텍티브>를 깜짝 상영작으로 발표하는 등 프로그래밍 이벤트도 활발하다. 한편, <라 레프블레카>는 올해 영화제의 초점을 여섯개의 범주로 나눠 소개하는데 그중 흥미로운 부분은 “마틴 스코시즈가 올해 작고한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를 말하다, 중국으로 돌아간 리안이 에로티시즘을 발견하다, 에릭 로메르가 17세기 배경의 작품을 선보이다, 이탈리아 영화 대거 진입: 파올로 프란치와 빈센조 마라, 안드레아 포르포라티의 작품이 경쟁부문에 진출하다” 등이다.

베니스의 선택이 과연 세계영화의 다음 재목을 발굴하고 현존하는 거장들의 건재를 확인하는 장이 될지, 혹은 할리우드에 목매는 모양새가 될지는 언제나처럼 더 많은 작품이 상영된 뒤에 판단할 일이 될 것이다. 혹은 어떤 영화가 황금사자상을 거머쥐게 될지에 대해서도 “각각의 심사위원이 다른 생각과 다른 취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말하기 힘든 문제다. 개인적으로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영화란 형식과 내용 사이에서 균형을 이룬 작품이다”라고 말한 심사위원장 장이모의 말을 귀담아듣는 수밖에 없다. 그 말은 좋은 영화에 좋은 상이 갈 것이라는 의미 외에는 없다. 일단 경쟁부문 중 첫 번째 상영작인 <어톤먼트>는 출중하다고 말하기는 힘들어도 정갈하고 세련되며 명료한 필치의 영화이니 출발이 그다지 나쁘지는 않은 편이다.

“중요한 것은 구원이다”

개막작 <어톤먼트> 기자회견

개막작 <어톤먼트>

8월29일, 개막작 <어톤먼트>의 공식기자회견이 열렸다. 감독 조 라이트, 각본가 크리스토퍼 햄튼, 배우 키라 나이틀리, 제임스 맥어보이, 바네사 레드그레이브 등이 참여한 자리에서 화제는 영국의 유명 소설가 이언 매큐언의 작품을 각색하는 과정과 영국 출신의 비너스 키라 나이틀리에게 집중됐다.

-이언 매큐언의 소설이 원작인데 원작에 얼마나 충실했는가.
=조 라이트: 원작이 워낙 훌륭해서 비교하긴 힘들지만 원작에 충실하려 최대한 노력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언제나 죄를 짓고, 짓고, 또 짓는 기분이다.

-키라 나이틀리에게 묻는다. 이언 매큐언의 소설을 읽어봤나? 자신과 극중 캐릭터가 닮았다고 생각하나.
=키라 나이틀리: 사실 그전까지 읽어보지 않았다. 어머니가 읽어보라고 권해주셨을 때도 읽지 않았다. 그러다가 시나리오를 읽어보고 울었고, 그 뒤 원작 소설을 읽었다. 극중 역할인 세실리아로 말하자면, 나와 전혀 다르다.

-당신은 액션부터 로맨스영화까지 연기의 폭이 매우 큰데 어떤 장르에서 연기하는 걸 더 좋아하는가.
=키라 나이틀리: 나는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에 연이어 출연했고, 로맨스보다는 액션을 더 좋아하고, 즐긴다. 하지만 <어톤먼트> 같이 좋은 작품은 나에게 완벽한 선물이자, 도전이다.

-오스카상을 받을 것 같은가? 그리고 여태까지 출연작 중 최고의 키스상대는 누구인가.
=키라 나이틀리: 오스카상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저 대중이 좋아하는 영화에 출연한다는 것이 기쁠 뿐이다. 최고의 키스상대? 그건 바로 당연히 (옆에 있는) 제임스다. 제임스 맥어보이: 정말 고맙다!!

-이 영화는 ‘죄’에 대한 영화다. 극중 13살의 브리오니와 관련해 어린이도 유죄일 수 있다고 보는가.
=조 라이트: 그 문제는 마지막 부분에 가서 분명해진다. 중요한 것은 어렸을 때 저지른 죄에 대한 감정을 나이가 들어서도 결코 지울 수 없다는 것이다. 소설가로서 성공한 인생이 브리오니가 지은 죄의 대가를 치러주는 건 아니다. 이건 구원의 문제다.

-영화 초반, 브리오니의 등장과 함께 나오는 타자기 소리가 인상적이다. 어떤 의미인가.
=조 라이트: 그것은 프로듀서인 폴 웹스터가 생각해낸 것이다. 타자기 소리는 하나의 스토리텔링 요소이자, 어린 소설가인 브리오니의 작가적 상상력을 역동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또한 이야기가 진행되는 와중에 구두점을 찍는 역할도 한다고 생각했다.

취재지원 김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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