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나문희] “나는 사실 매우 틀림없는 사람이에요”
2007-09-03
글 : 강병진
사진 : 이혜정
<거침없이 하이킥> <권순분여사 납치사건>의 나문희

“밥은 먹고 다니냐?” <살인의 추억>의 송강호가 빛낸 명대사지만, 사실 나문희는 그 이전부터 지금까지 똑같은 질문을 표정으로 물어왔다. 영화 <열혈남아>의 김점심, 드라마 <굿바이 솔로>의 미영 할머니는 아예 식당을 꾸리면서 가슴이 허한 젊은이들의 입에 밥 한 숟갈을 떠먹인 여자들이었고, <거침없이 하이킥>의 나문희 여사는 먹는 것을 인생 제일의 행복으로 여기는 ‘식신’이었다. 그녀의 첫 영화 주연작인 <권순분여사 납치사건>에서도 나문희는 300여개의 국밥제조비법을 지닌 국밥집 사장으로 등장한다. 만일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국밥집 체인사업을 연다면 김수미의 게장사업 이후로 최고의 대박을 내지 않을까? 국밥집을 찾는 손님들은 맛에서 만족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녀의 손맛에서 위로를 찾게 될지도 모른다. “하하하. 그런데 사실 나는 요리를 잘하는 편이 아니에요. 평소에는 가장 친한 영감이나 조금 챙겨서 줄 정도지 뭐. 우리 애들도 내가 요리한 건 그렇게 맛있다고는 안 해요. (웃음)” 하지만 나문희의 세딸들이 어린 시절 엄마가 만들어준 “팔뚝만한 두께의 김밥” 때문에 창피함을 겪었던 만큼, 그녀의 요리는 양적인 면에서는 타의추종을 불허할 것이다. 돌이켜보면 그녀가 연기했던 ‘어머니’들 역시 언제나 관객에게 배부름을 선사했다. 배부를 만큼의 슬픔과 배부를 만큼의 웃음, 그리고 그로 인한 배부를 만큼의 기쁨까지. “난 실제로도 먹는 걸 좋아해요. 한식도 좋아하지만 피자나 스파게티도 잘 먹어요. 그러니까 이만한 체격이 유지가 되지. (웃음)” 평소 자신의 집처럼 생각한다는 백마역 부근의 한 식당에서 진행된 그녀와의 인터뷰 또한 12가지 반찬을 비롯해 구절판과 신선로까지 오른 한정식 식단과 같은 느낌이었다.

-요즘 많은 매체에서 선생님의 전성기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비슷한 연배의 동료 분들이 부러워하지는 않으세요.
=전성기는 전성기예요. 한 가지를 쭉 했는데, 이 나이에 전성기가 되니까 너무 좋아요. 요즘 주말드라마 <깍두기>에서 남편으로 나오는 김성겸씨도 “요새 엄청 바쁘신 나 선배님이 부인으로 붙어줘서 좋다”고 한마디는 하더라고요.

-<권순분여사 납치사건>의 시나리오는 어떤 점이 마음에 드셨어요.
=이야기가 한 호흡에 싹 가는구나 싶었어요. 그런데 <거침없이 하이킥>이랑 동시에 섭외를 받아서 좀 걸렸죠. <거침없이 하이킥>은 하기로 결정하고 대본을 받았는데, 분량이 너무 많은 거예요. 그래서 영화는 못하겠다고 했었죠. 내가 그분들한테 애를 많이 먹였어요. 이신범 PD랑 김지영 PD가 한 3개월은 쫓아다닌 것 같애.

-권순분 여사는 매우 주도면밀한 캐릭터입니다. 지금까지 이런 캐릭터를 만나신 건 처음 아니세요.
=역할이 매우 희화적이라고 봤어요. 내가 95년에 <바람은 불어도>를 찍으면서 이북말로 한번 신나게 연기를 해본 적이 있거든요. 그런데 권순분 이 여자를 보니까 <바람은 불어도> 할머니보다는 &#51211;고, 내 나이보다는 많지만 너무 명쾌한 할머니라서 해보고 싶었어요. 이전에도 센 역할은 많이 했는데, 권순분은 또 하나의 내가 나온 것 같아요.

-평소 김상진 감독의 영화에도 관심이 있으셨던가요.
=나하고는 인연이 없을 것 같았어요. <주유소 습격사건>이라든지, <신라의 달밤> 이런 걸 보면서 나하고는 멀리 떨어져 있는 감독인 줄 알았죠. 사실 같이 하고 싶었는데, 내가 먼저 아예 기대를 하지 말자고 했었던 거지. 그런데 그런 감독이 나에게 프러포즈를 해주니 너무 기뻤죠.

-권순분 여사는 극의 흐름을 완전히 이끌어가는 주인공입니다. 이런 배역도 처음이라 부담이 되셨을 것 같아요.
=에이, 애를 쓴 건 내가 아니라 다른 세 남자들이에요. 나는 할 때는 이게 부담되는 줄 몰랐어요. 끝나고 나니까 ‘앗, 뜨거’ 한 거죠.

-이번 영화에서는 경상도 사투리를 하십니다. <열혈남아>에서는 전라도 사투리를 하셨고, 좀 전에 말씀하신 대로 <바람은 불어도>에서는 이북 사투리를 하셨죠. 그동안 연기생활을 하시면서 사투리에 대한 연구를 많이 하신 듯싶었습니다.
=<바람은 불어도> 때에는 이웃에 사는 아주머니한테 배웠어요. 지금도 그곳에 살고 계세요. 이제는 여든살이 넘으셨죠. 내가 한번은 뭘 좀 사러 동네 가게에 갔는데, 그 양반이 “에이, 썅!” 이러시는 거예요. 와, 나도 정말 드라마에서 저런 모습을 한번 연기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싶었죠. 그런데 문영남 작가가 정말 그렇게 써준 거예요. 첫 장면부터 신발을 내팽개치고 집에 들어오는 걸작인 할머니였죠. 이번에는 사투리를 가르쳐준 사람은 없었지만, 억양을 세게 넣느라고 혼자서 많이 연습했어요. 지금까지는 굉장히 부드러운 경상도 사투리를 했었거든요.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나 <장밋빛 인생>에서도 ‘홍야홍야’하는 말투였죠. 이번에는 “이 자슥들아!” 이러면서 악센트가 적확하게 가니까 그 맛을 내기 위해서는 훈련을 해야 할 것 같았어요.

-캐릭터에 따라 달라지는 게 당연하겠지만, 선생님은 가끔씩 독특한 말투로 웃음을 주곤 하셨어요. 두 작품 모두 노희경 선생님의 작품인데 <내가 사는 이유>의 숙자와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의 셋방 아줌마는 또 다른 느낌이셨죠.
=연구 많이 하죠. 옛날에는 <갯마을>을 찍으러 당진에 간 적이 있었는데, 밖에 나가서 해녀 분들의 말투를 익히려고 애를 많이 썼어요. 또 부산 자갈치시장에 가면 장사하시는 분들 말투도 익히려고 했고. 옛날부터 그런 흉내내는 걸 좋아했던 것 같아. 옛날에 문화방송이 처음 시작할 때 어떤 부장 사모님이 마산 분이셨는데, 사투리를 재밌게 쓰셨어요. 매일 그걸 집에 와서 흉내를 내곤 했었지. 나중에 그게 나한테 자본이 될 줄은 몰랐죠. 나는 소탈한 사람들을 좋아하는데, 그런 분들이 나에게 많은 도움을 준 것 같아요.

-<거침없이 하이킥>을 하면서 영화촬영을 같이 하셨죠? 애교문희로 사는 것과 권순분 여사를 오고가는 것이 힘들지는 않으셨어요.
=정말 편치가 않았어요. 거의 15시간씩 <거침없이 하이킥>을 찍은 뒤에, 쉬지 못하고 바로 영화 촬영을 했으니까. 또 스탭들이 불안해할까봐 내가 힘들다는 건 표현하기가 힘들었어요. 감독님도 안심을 하셔야 되니까 그냥 혼자서 쉬었고. 대신 감독님이 나를 많이 편하게 해주었어요. 거의 한번 아니면 두 번째에 오케이하고, 촬영 얼른 가라고 해주셨죠. 김상진 감독님이 약주를 조금 좋아하는 것 같은데, 한번도 같이 술을 마시며 이야기하는 자리를 못 가졌어요. 내가 술을 못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감독님들은 보통 연기자랑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잖아요. 대신 내가 너무 힘들어하면 감독님이 백숙을 사주신 적은 있었어요.

-<거침없이 하이킥>의 문희는 &#51211;었을 때부터 소문난 ‘식신’입니다. 밥이라는 이미지와 연관된 선생님의 캐릭터를 또 다르게 묘사한 것 같았어요. 처음 시나리오를 받으셨을 때는 어떠셨나요? 이전에도 <압구정 종갓집> 같은 시트콤을 하셨지만, 매우 색다른 느낌을 받으셨을 것 같아요.
=색다르기보다는 놀라웠어요. 이건 정말 내 역이다 싶었죠. 작가가 내 속에 들어가 있는 것 같았어요. 이분이 혹시 우리집에 카메라를 갖다놓은 게 아닌가 할 정도로. 말하자면 <거침없이 하이킥>은 내가 기운만 있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작품이에요. 물론 내가 순재에게 하듯 ‘여봉~’이러는 건 잘 안 해봤던 거였죠. 이순재 선생님 무릎에도 앉아야 했고. (웃음) 그때는 정말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도 많이 했어요.

-돌이켜보면 <거침없이 하이킥>은 선생님이 출연하신 작품 가운데 가장 러브라인이 강한 작품입니다. 순재와 처음 만나서 사랑하던 과거까지 나오잖아요. 이후에도 순재와 투닥거리시는 모습을 보며 실제 남편은 어떤 분일지 궁금했습니다.
=에이, 뭐 그런 걸…. 우리 남편은 영어선생님 하시다가 정년퇴직한 뒤에 지금은 서양화를 그리고 있어요. 젊었을 때부터 쭉 그림을 그렸거든. 전시도 몇번 하셨죠. 이름이오? 아무도 몰라요. 나밖에 몰라. (웃음)

-요즘에는 젊은 팬들도 많아지셨죠? 길에서 만나는 자녀뻘, 혹은 손자뻘 되는 팬들은 어떻게 대하시나요.
=길 가다가 만나는 친구들한테는 그냥 문희처럼 장난스럽게 이야기해요. 그래도 예전에는 평소에도 나름 우아하게 하고 다녔는데, <거침없이 하이킥>을 하고 나서 편해진 것 같아요. ‘이제 다 알았지? ’ 이런 거지. (웃음)

-실제로는 세딸들을 키우셨지만, 최근에는 작품에서 많은 아들을 만나셨습니다. <권순분여사 납치사건>의 3인조도 자식들이나 다름없는 사람들로 나오고요. 연기를 하시면서 아들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안 하셨어요.
=그럼요. 당연히 했죠. 그런데 사실 아들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잊어버린 지 오래됐어요. 이제는 그냥 뭐, 아들이 이렇게 셌구나 싶지. (웃음)

-지난해 출연하신 <화려한 휴가>가 올해 개봉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선생님 얼굴만 봐도 눈물이 났다고 하던데요.
=<화려한 휴가>에서는 정말 오랜만에 우는 연기를 충실하게 해본 것 같아요. 그런데 나에게는 우는 것이나 웃는 것이나 다 힘들어요. 우는 연기도 카메라하고 타이밍이 맞아떨어져야 보는 사람도 실감이 나고 슬픈 거죠. 또 웃는 것도 내면에서 웃음이 있어야 탄력있게 나오는 거고. 그런데 그걸 맞추려면 정말 기술이 필요해요. 감정과 기술을 맞춘다는 게 정말 힘든 일이죠.

-지금 촬영 중이신 영화 <걸스카우트>의 이만이란 할머니는 어떤 역할인가요.
=서민들이 모여 사는 동네가 있는데, 선아가 맡은 미경이랑 같이 항상 몰려다니죠. 아들이 자기 일을 잘 못하고 고약하게 굴어가지고, 항상 쩔쩔매며 쫓아다니는 귀여운 할머니예요.

-<걸스카우트>의 박제현 PD 말로는 4명의 여자가 봉고차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왁자지껄해진다고 합니다. 헤드폰을 착용하신 분들이 정신이 바짝 들 정도라던데요. 주로 어떤 이야기를 나누시나요.
=하하하. 그랬대요? 그냥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하죠. 아무래도 내가 일을 더 많이 해서 아는 부분이 있으니까 나도 이야기를 많이 하는 편이에요. 같이 연기하는 게 재밌어요. 선아는 <S다이어리>랑 <내 이름은 김삼순>을 같이 해서 호흡이 아주 잘 맞아요. 선아는 주인공인데도 만날 어깨도 주물러주고, 귀엽게 굴면서 꿀차도 먹으라고 사줘요. 이경실씨나 은주도 평소 좋게 보던 사람들인데, 같이 일해보니까 ‘난짱난짱’하니 좋아요.

-앞으로 내정된 작품이 있으신가요.
=현재로서는 없어요. 그런데 박진표 감독님이 2월에 영화 만든다고 하시고, <거침없이 하이킥>도 영화로 나온다고 하니까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확실하게 정해진 건 아닌데, 박 감독님이 나를 생각하고 있나봐요.

-연극은 하실 생각 없으세요? 지난해에는 뮤지컬 <천상시계>에도 참여하셨는데요. .
=기회가 닿으면 해야죠. <천상시계>는 너무 힘들었지만 하고 나서 정말 좋았어요. 뮤지컬이라는 게 또 다른 맛이 있더라고. 호흡도 많이 커졌고요. 그때가 <열혈남아>를 하기 전이었는데, 연기하는 내내 목끝까지 눈물이 항상 차 있어야 했어요. 그럴 때는 호흡이 매우 필요하거든. 그래서 연극을 한편 하면서 훈련을 받고 싶었는데, 마침 제의가 들어왔던 거죠.

-지금 <깍두기>에서는 남편과 자식을 위해 한평생 헌신하며 살아온 평범한 어머니를 연기하고 계십니다. <거침없이 하이킥>을 하셨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선생님에게 포근한 어머니를 기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배우로서 조금은 다른 역할을 하고 싶은 생각이 더 많지는 않으세요.
=직업여성도 좋지만 나는 어머니가 참 좋아요. 평소에도 그쪽으로 노력을 많이 하고 있어요. 그냥 동네에 사는 좋은 엄마, 좋은 할머니였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연기할 때도 그런 모습이 묻어나오니까. 10년 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에서 연기한 인희 같은 엄마는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도 한번 더 해보고 싶어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은 선생님에게서 어머니란 존재를 가장 크게 부각시킨 작품입니다. 그 드라마에서 인희는 암에 걸리고도 마치 허리가 조금 아픈 것뿐이라는 듯한 표정으로 가족들을 대하죠. 그런 모습은 이후에도 선생님의 연기에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 같았어요.
=그렇죠. 사실 내가 항상 그래요. 물론 내가 죽음을 앞두고 있다고 해서 그 드라마처럼 시어머니를...아니, 만일에도 그런 생각은 안 하고 싶어요. (드라마에서 인희는 자신이 죽고 나면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가 천덕꾸러기가 될까봐 같이 죽자며 목을 조르려 한다.) 아무튼 내가 아픈 것 때문에 가족한테까지 아픔을 강요하고 싶지는 않아요. 아마 나는 인희처럼 그렇게 갈 것 같아요. 그런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은 어디서 영화로 만든다고 하던데?

-처음 들었습니다.
=노희경 작가가 직접 시나리오를 쓰지는 않나봐요. 작품이 시집갔다고 하던데. 그런데 나는 빼고 간대요. 아쉽기는 하지만, 양심이 있으면 욕심내지 말아야지. (웃음)

-평소 선생님과 함께 일을 하시는 많은 분들이 선생님에게 연기처럼 자상하신 모습을 기대하시는 것 같습니다. 또 실제로도 선생님을 매우 존경하는 분들이 많고요. 혹시 그런 기대가 부담스럽지는 않으세요.
=부담스럽죠. 나는 사실 사람들이 기대하듯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나도 사람이라서 실수도 하고, 적당히 묵인도 하고 그래요. 사람들은 내가 화를 내는 모습이 없을 줄 알지만, 성격이 다혈질이라 화도 잘 내요. 특히 내가 준비가 안 돼서 마음이 급하면 화가 나죠. 나한테 그런 좋은 면을 기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나는 사실 매우 틀림없는 사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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