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과 열정 사이]
[냉정과 열정 사이] 달콤한 열매는 묵묵히 걷는 태도에서 나오는 것
2007-09-14
글 : 정이현 (소설가)
여름의 끝, <조디악>의 한 사내에게서 집요하고 성실한 태도의 귀중함을 느끼다

이번 여름은 참 길었다. 여름 내내 조증과 울증을 반복해 앓았으며, 변함없는 무기력증 속에 파묻혀 있었다. 책을 묶고 나면 으레 그래, 라는 스스로를 향한 변명은 새끼손톱만한 위로도 되지 않았다.

새 소설을 몇줄 썼다 지우고 또 썼다 지우곤 했다. 그런 일을 반복하다 보면, 혹시 내가 영원히 아무것도 쓸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 게 아닐까, 느린 의문과 저릿한 절망감이 뒷덜미를 덮쳤다. 그럴 수만 있다면, 아니 그럴 수 없다 하더라도, 나는 떠나고 싶었다. 떠나면 반드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을, 돌아오면 몇배 더 무거운 짐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여름의 끝자락에서 <조디악>을 보았다. 영화에 대한 별 정보가 없었으니 선입견도 없었다. <살인의 추억>과 비슷하게 실제 미국에서 일어났던 연쇄살인범에 관한 이야기라는 사실이 전부였다. 연쇄살인이라는 행위에 대해, 미안하지만 나는 아무런 특별한 의견도 갖고 있지 않다. 물론 인간으로서, 인간의 생명을 함부로, 그것도 연달아 빼앗는 행위가 크나큰 죄악임은 명명백백하다. 하지만 그것은 음주운전이 야기한 교통사고 같은 일과 비교하여 일상 속에서 피부에 와닿는 이슈가 아니다.

<조디악>을 보고 나서도 여전히, 사람이 왜 사람을 죽이는지, 모르겠다. 분노와 원한, 돈과 복수, 증오와 질투…. 막연하고 또 그만큼 진부한 이유들만 머릿속을 맴돈다. 조디악 킬러가 무고한 사람들을 살육한 것이 저런 이유들 때문은 아니리라 짐작한다. 어쩌면 그는 살인을 자기의 존재증명 방식으로 사용했을 수도 있겠다.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견디기 힘들어서… 누가 날 좀 기억해달라고.

나름의 법칙에 의해 살인을 자행하면서, 신문사에 암호를 그려 보내면서, 그는 제가 고독한 예술가라 믿었을지도 모른다. 예술가들 역시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고 드러내고 싶어 존재하는 이들이니까. 조디악 킬러의 그 행위에 사회·윤리적 가치판단 따위는 병아리 콧물만큼도 개입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그는 위험한 유미주의자이다. 본인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감동을 주지 못하는.

주기상 울증을 앓던 내 영혼을 설핏 움직인 인물은, 그 대척점에 있는 한 사내- 수사관도 아니고 담당기자도 아닌, 이 사건과 그 어떤 개인적 관계로 얽히지 않은- 그레이스미스였다. 그는 집요하고 성실하다(평소 내가 부러 외면하던 두 가지다). 누구에게 알아달라고 말할 수도 없고 눈앞에 명확히 잡히지도 않는 가치를 좇아 묵묵히 걷는다(‘묵묵’하다 보면 나는 왜 ‘막막’해지는지 모를 일이다). 하나하나 꼼꼼히 자료를 모으고 그 자료 속의 글자들을 몸으로 직접 체현해보는 것을 당연히 여긴다(적당한 요령도 능력이라는 가치관을 초등학교 때부터 실천해왔다).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짧지 않은 인생, 수백번의 포기를 할 때마다 포기의 타이밍을 놓쳐버리는 것만큼 멍청한 짓은 없다고 합리화하곤 했다).

마침내 이 여름의 끝. 단 하루 만에 바람의 결이 맑아진 어느 날, 내 원인 모를 불안감이 가만히 가라앉고 다시 새 소설이란 걸 쓰고 싶다는 작은 의지가 심장 밑바닥으로부터 피어올랐다면, 그건 전적으로 이 남자 덕분이다.

예술가는 어쨌든 결과물로 말하는 거라고 믿어왔다. 이제는 생각이 바뀌었다. 결과물 앞에 태도가 있다. 어떤 훌륭한 결과물도 집요하고 성실하고 묵묵한, 그 지루하기 짝이 없는 태도 밖에서는 탄생하지 못한다. 몇년 뒤의 국가고시를 준비하는 수험생처럼 그렇게 한발 한발 걸어나갈 수 있을까. 그 어떤 순간에도 내 절망이 내 의지를 놓아버리지 않을 수 있을까. 그리하여 닿고 싶은 곳이 어디인지 아직 잘 모르지만, 그레이스미스의 그 자세를 배우고 싶은 마음만은 간절하다. 이제는 9월이고, 어리석고 긴 여름은 끝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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