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이상 에바(에반게리온의 약칭)를 그리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안노 히데아키 감독이 돌아왔다. 에바가 첫선을 보인 1995년으로부터 12년이 흐른 지금, 그는 또다시 에바를 부활시키기 위해 소신문까지 발표하며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서(序)>(부제 Evangelion 1.0: You Are (Not) Alone)로 귀환한 것이다.
<에반게리온>(정확히 <신세기 에반게리온>) 시리즈는 1995년 10월부터 다음해 3월까지, 일본의 지상파 <TV도쿄>를 통해 총 26화의 TV애니메이션으로 공개됐다. 당시 에바는 단순한 로봇애니메이션을 벗어나 인류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과 함께 심리학, 종교학, 신비학 등을 아우르는 다중적인 스토리구조를 선보였고, 다양한 전문용어 등으로 압도적인 정보량과 미스터리한 세계관을 제공하는 일명 ‘관객 참가형 애니메이션’을 실현해 수많은 에바 오타쿠를 양산하기도 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이러한 현상이 서브컬처에만 머물지 않고 사회현상으로까지 이어지면서 막대한 비즈니스 효과를 창출했다는 것이다. 에바 시리즈는 지금까지 총 1500억엔 이상의 수익을 올린 것으로 추정된다. <우주전함 야마토>와 <기동전사 건담>의 뒤를 잇는 또 하나의 사건이었다. TV시리즈가 끝난 뒤 모호한 결론 등에 대한 논란이 일자 안노 히데아키는 완결편이라는 명목으로 1997년에 극장판 <에반게리온 데스 & 리버스>와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부제 Air/진심을 그대에게)을 소개했고, 에바 시리즈는 완벽하게 막을 내린 것처럼 보였다.
핵심 스탭들이 다시 모여 재구축판 에반게리온
하지만 에바는 돌아왔다. 지난 9월1일 새로운 에바를 만나기 위해 신주쿠의 극장으로 향했다. 이미 1층 로비와 3층 로비는 수백명의 관객으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새로운 모습으로 돌아온 에바는 총 4부작으로 구성된다. 9월1일 개봉된 작품이 전편에 해당하는 ‘서(序)’, 2008년 개봉예정인 작품이 중편에 해당하는 ‘파(破)’, 아직 개봉일 미정인 ‘급(急)’과 제목이 정해지지 않은 작품이 2부로 구성된 완결편이 될 예정이다. ‘서(序)’는 말 그대로 도입부로 TV시리즈(전작)와 거의 같은 장면에서 시작된다. 예고도 없이 찾아온 대재앙 ‘세컨드 임팩트’로 세계는 거의 인류의 절반을 잃고 각지에는 대파괴의 흔적만이 남는다. 이로부터 15년 뒤, 이카리 신지는 특무기관 Nerv의 사령관이자 아버지인 이카리 겐도의 연락을 받고 제3신도쿄시에 도착한다. Nerv 대원 미사토의 안내로 본부에 도착한 신지는 아버지와 3년 만에 재회하지만, 겐도는 신지에게 생체병기 에반게리온의 파일럿이 되어 사도(使徒)라는 정체불명의 적과 싸울 것을 명한다. 이제 14살 소년 신지는 세계의 운명을 걸고 전쟁을 벌여야만 하는 것이다.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서(序)>는 사도 라미엘과 벌이는 ‘야시마작전’과 오랜 팬이라면 누구나 그리워할 캐릭터 카오루를 깜짝 등장시키며 다음 회를 기약한다.
사실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서(序)>는 12년 전의 TV시리즈의 반복과도 같은 영화다. 하지만 ‘파(破)’부터는 새로운 에반게리온과 새로운 사도(使徒), 캐릭터들이 추가될 예정이고, 새로운 전개에 따라 기존 캐릭터들의 운명도 전작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치달을 예정이라고 한다. 그래서 에바의 제작진들은 12년 만에 부활한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시리즈를 리메이크도 리바이벌도 리뉴얼도 속편도 아닌 리빌드(Rebuild), 즉, 에반게리온의 ‘재구축판’이라고 부른다. 안노 히데아키는 에바를 부활시키면서 가이낙스를 떠나 자신의 스튜디오인 ‘카라’를 설립했다. 스즈키 슌지 총작화감독, 가토 히로시 미술감독, 캐릭터 디자이너 사다모토 요시유키 등 예전 시리즈의 메인 스탭들이 모두 안노 히데아키 아래로 집결해 에바의 중핵이라 할 수 있는 진용이 갖추어졌다. 새롭게 뭉친 제작진들이 추구한 것은 기존의 에바가 아닌 새로운 에바여야만 했고, 에바이면서도 에바가 아니어야만 했다. 이를 위해서는 TV시리즈를 가능한 존중하면서 완전히 새로 건설하는(Rebuild) 작업이 필요했다. TV시리즈와 동일하게 진행되는 부분은 이전의 콘티를 그대로 잘라 붙이고, 완전히 새로운 부분의 그림 콘티는 영화 <로렐라이>와 <일본침몰>의 히구치 신지 감독 등이 가세해서 새롭게 만들어냈다. 게다가 디지털 영화계의 젊은 인재들도 새롭게 합류했는데, 바로 이 신구의 융합이야말로 신극장판의 무기이기도 하다. 12년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진화된 디지털 기술이 대거 사용된 촬영과 미술 부문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영상을 선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숙해진 에바의 모습에 팬들은 열광
새로운 에바를 맞이하는 오랜 팬들의 열기는 지구 온난화를 북돋울 만큼 뜨겁다.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온 수많은 팬들은 한정으로 판매하는 팸플릿과 에바 관련상품을 사기 위해 또 한번 기나긴 줄을 서고, 극장 밖에도 심야 상영을 관람하기 위한 관객이 기다란 인간띠를 만들고 있다. 도쿄 시내의 대형 DVD 가게에서도 열기는 감지된다. TV시리즈와 이전 극장판은 모조리 렌털 중이고, 새로운 극장판 개봉과 때맞춰 출시된 총 892분의 <NEON GENESIS EVANGELION DVD-BOX ’07 EDITION> 한정판 역시 인기리에 팔려나가고 있다. 각종 영화, 애니메이션 잡지들은 저마다 <에반게리온>을 특집으로 다루고 있는데, 특히 잡지 <CONTINUE>는 사상 최초로 장장 40페이지에 이르는 에바 특집 기사를 내기도 했다.
일본 야후의 리뷰 코너에는 현재까지 300여건의 리뷰가 올라와 있다. 일본 포털에서의 영화 리뷰들은 통상 많아봐야 수십건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하면 상당한 숫자다. 대부분은 돌아온 에바를 너무나도 반가워하는 오랜 팬들의 리뷰로, 5점 만점에 평점 4.14점을 기록하고 있다. 이들은 예전과 같으면서도 달라진 새로운 에바에 열광하고 있는데, 특히 디지털의 수혜를 입어 더욱 정교해지고 날렵해진 에바 초호기와 사도 라미엘에 대해서는 아름답다는 수식어를 아끼지 않고 있다. ‘서(序)’의 내용은 거의 전작과 비슷하지만 인물들의 심리묘사나 관계 등이 한층 더 성숙해지고 이해하기 쉬워졌다는 반응들도 많다. 클라이맥스에 등장하는 ‘야시마작전’의 영상에 대해서는 ‘압권’이라는 표현으로 대부분이 격찬을 보내고 있다. 물론 전작과 별반 다름없는 구성에 대한 실망과 ‘에바 초보자’에겐 너무나도 불친절한 마니아용 영화라는 일부의 지적도 있다. 사실 애니메이션 평론가 나가카와 류스케의 말처럼 “‘서(序)’ 파트에서는 왜(Why)는 앞으로의 과제로 두고 어떻게(How)에 집중하는 것이 올바른 관람법”일 수도 있겠지만 처음 에바를 대하는 관객이라면 기초 지식 정도는 미리 숙지하고 가는 편이 좋을 것이다.
에바 신드롬, 완벽하게 부활하다
에바는 이른바 말하는 블록버스터영화라기보다는 마니아 기반형 영화에 가깝기 때문에 첫 개봉규모 자체는 그리 크지 않았다. TV광고 등의 노출도 그리 높지는 않았다. 하지만 극장 팸플릿이 2일 만에 동이 나고 새벽 5시부터 입장을 기다리는 행렬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이 여기저기서 들여오더니 결국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서(序)>는 겨우 84개 스크린으로 총 2억8천만엔을 벌어들이며 일본 박스오피스 1위를 쟁탈하고야 말았다. 300~700개 스크린 동시개봉이 판치는 일본에서 84개 스크린으로 전체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한 것은 기록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팬들은 이어질 중편 ‘파(破)’와 완결편 2부작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에바는 반복의 이야기다. 같은 이야기에서 또 다른 형태로 변화해가는 4개의 작품을, 즐겨주기 바란다”는 안노 히데아키의 열망은 12년 만에 돌아온 ‘에바 신드롬’과 함께 완벽하게 부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