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김상진] “이젠 젊은 세대가 기성세대를 누르는 것 같다”
2007-09-12
글 : 강병진
사진 : 이혜정
<권순분여사 납치사건>의 김상진 감독

김상진 감독이 <귀신이 산다> 이후 3년 만에 신작 <권순분여사 납치사건>을 내놓았다. 데뷔작인 <돈을 갖고 튀어라> 이후 대부분의 작품이 약 1년 간격을 두고 개봉된 것과 비교할 때는 긴 시간이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권순분여사 납치사건>을 김상진 감독의 복귀작 혹은 컴백작이란 단어로 설명한다. “심지어 재기작이라는 말도 있다. 왜 재기작인지 모르겠다. 한번도 망한 적이 없는데…. (웃음)” 유괴된 할머니가 스스로 자신의 납치극을 진두지휘하는 이야기인 <권순분여사 납치사건>은 김상진 감독의 이전 영화와 마찬가지로 역할의 전복이 주된 소재인 코미디다. 정성으로 국밥을 끓이고, 꽃을 사랑하던 할머니는 순식간에 정치인과 언론, 경찰을 비웃는 전략가로 변신한다. 황당한 이야기지만 10년 넘게 코미디 외길 인생을 걸었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작품이 흥행에서 빛을 본 만큼 김상진 감독은 이번에도 흥행에 자신이 있는 듯했다. “우려도 많이 했지만, 웃음이 나올 거라고 기대했던 부분에서 다행히 관객이 많이 웃어주더라. 애드리브도 좋지만 역시 계산된 코미디가 잘 먹히는 것 같다.” 기자시사회 다음날 만난 그는 자신의 영화만큼이나 빠르고 활발한 말투로 오랜만의 신작에 관한 이야기를 털어놨다.

-어제가 기자시사였는데, 반응이 어떻던가.
=극장, 배급관계자 어른들 말씀이 힘이 됐다. 나이 드신 분들이지만, 평생을 영화계쪽에서 계신 분들이라 나름대로 정확한 눈이 있다. 보시고 나서 “돈 좀 벌겠다”고 툭툭 던지시는 말들이 위로가 되더라.

-<권순분여사 납치사건>의 시나리오는 어떻게 발견한 건가.
=이번이 내 영화 중 처음으로 원작이 있는 영화다. <대유괴>라는 제목의 일본 소설이다. 7, 8년 전에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다더라. 하지만 머릿속에 남을 것 같아서 영화는 안 봤다. 내가 게을러터졌기 때문인 것도 있지. (웃음) 사실은 할까 말까 고민을 많이 했다. 항상 오리지널만 하려고 했으니까. 그래도 원작이 워낙 재밌어서 그냥 한번 해보자 싶었다.

-원작과 영화는 어떤 차이가 있나.
=원작에서 거의 다 바뀌었다고 보면 된다. 할머니가 스스로 납치극을 꾸민다는 것과 몇몇 등장인물만 가져왔다. 원작에서는 할머니가 식당을 하지 않는다. 아, 아들처럼 여기는 경찰서장은 원작에도 있다. 선녀처럼 키가 큰 아줌마도 있고. 그런데 원작은 사실 세금에 관한 이야기다. 일본이 세법이 워낙 강하니까, 할머니가 자식들에게 유산을 물려주면서 상속세를 안 내려고 자작극을 꾸미는 거다. 우리랑은 매우 다르지.

-나문희라는 배우에 대해서는 평소에 어떻게 생각했나.
=사실 그분은 지금까지 사랑스럽고 순수하면서 자식들을 위해 모든 걸 바치는 어머니의 모습을 연기했다. 하지만 <권순분여사 납치사건>에서는 그것만 가지고는 힘들 것 같았다. 그래도 나문희 선생 정도의 구력이면 충분히 권순분 캐릭터를 끌고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또 마침 <거침없이 하이킥>이 뜨더라고. 갑자기 선생님의 인기가 급상승하는데, 감독으로서 당황했다. 지금도 개봉을 앞둔 시점에서 걱정을 많이 하고 있다. <거침없이 하이킥>의 문희를 기대하는 관객한테 권순분은 좀 의아할 수 있으니까. 시트콤에서는 어리버리하고 만날 이순재 선생님한테 당하고 나서 구시렁거리지 않나. 이 영화에서는 주변 사람들을 완전히 장악하는 캐릭터다. 물론 흥행에는 어느 정도 장점이 되기도 하겠지.

-권순분에게 공을 들이다보니 나머지 3인조 납치범들이 좀 약해진 것이 아닌가 싶더라.
=그렇지 않다. 그래도 각자 나름의 드라마를 가지고 있으니까. 사실 주변 사람들은 왜 스타 캐스팅을 안 했냐고 하더라. 그렇다고 납치범 역에 한류 스타를 갖다붙이는 것도 어색하지 않나. 또 나랑 죽어도 같이 할 수 있는 차승원 같은 배우들한테 맡기기도 좀 그렇더라. 그렇게 하면 그런 배우에게 드라마를 몰아가야 하니까. 지금은 납치범 개개인은 약할 수 있지만 할머니 대 납치범의 구도로는 비율이 잘 맞는다고 본다. 되도록이면 나랑 호흡이 잘 맞고 연기를 잘하는 배우들을 붙이고 싶었다. 또 능력과 실력에 비해서 개런티가 싼…. (웃음) 그런데 요즘 (유)해진이는 뭐… 캐스팅 전과 지금이 너무 다른 위치라서 조금 난감하다.

-권순분 여사는 영화에서도 큰 어른이다. 여성이라는 점이 큰 차이기는 하지만, 이전 영화에서 줄곧 어른을 ‘꼰대’보듯 하던 것과는 달리 이번 영화해서는 화해시키려는 분위기가 있다. 감독 개인으로서도 변화가 있었던 건가.
=일단 나도 이제 나이가 들지 않나. <주유소 습격사건> 때만 해도 기성세대의 잣대가 너무 젊은 세대를 억압하는 것 같아서 나름 비판을 많이 하려 했다. 그래서 심지어 외국의 어느 평론가는 감독이 무정부주의자 같다고 하지 않았나. 하지만 그 뒤로 8년이 지났는데, 이제는 내 생각도 좀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이 기성세대가 된 것이다. 또 이제는 오히려 젊은 세대의 잣대가 기성세대를 누르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만 할머니에 대한 비판도 조금은 있다. 무조건 돈으로만 자식들을 키우려 한 할머니가 나중에는 후회하는 이야기 아닌가. 물론 그래도 두 세대가 화합하는 모습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이 시나리오가 마음에 들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할머니가 젊은 세대들과 부딪혀서 일어나는 일이 재밌을 것 같았다.

-김상진 감독의 인장과도 같은 떼거지 격투신이 없는 것도 큰 변화다.
=그건 정말 내 스스로도 뿌듯한 점이다. 그런 장면을 만드는 게 사실 매우 힘들다. 인물을 끄집어냈다가 하나씩 밀어넣고 다시 빼고 해야 하니까. 이번에 같이 한 작가들도 인물들을 다 모아야 하지 않냐고 먼저 물어보더라. 이번에도 그러면 김상진이 정말 욕먹는다고 했지. 이번 영화는 이야기를 마무리짓는 느낌을 강하게 가져가려 했다. 할머니가 걸어온 길도 보여주고 다른 세 남자가 스스로 꿈을 찾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나이가 들었다고 해도 정치인, 언론, 경찰에 대한 조롱은 여전한 것 같다.
=그런 것 없이 코미디를 만들 수는 없지 않나. 평소 나한테 그런 생각이 있으니까 나오는 건데, 사실 그런 생각도 예전보다는 적어진 것 같다. <주유소 습격사건>이 가장 극단적이었다면 그 뒤로는 점점 따뜻한 이야기에 끌리고 있다. <귀신이 산다>도 가족과 집이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했던 거였다. 그런 사회 비판을 전면에 드러내고 싶지는 않다. (작은 목소리로) 우리 ‘오야지’이긴 하지만 강우석 감독님은 너무 병적으로 사회비판을 하시는 분 아닌가. 정말 죽겠다. 내가…. (웃음) 강 감독님 같은 색깔도 있지만 나는 나름대로 보일 듯 말 듯 이야기하고 싶다.

-이전 영화에서도 비현실적이거나 만화적인 부분은 있었지만, 박준면이 연기한 선녀는 매우 동화적인 설정이더라.
=지금까지 코믹액션, 코믹호러처럼 여러 장르를 결합해보려는 시도를 많이 했다. 멜로 빼고는 다 했지. 이번에는 코믹어드벤처를 하려고 했다. <권순분여사 납치사건>은 기본적으로 <인디아나 존스> 같은 어드벤처영화의 틀거지를 가지고 있다. 그런 영화들에는 꼭 그런 사람이 한두명쯤 나온다. 덩치가 크기도 하고, 아예 키가 작기도 하고. 또 마법을 쓰기도 하고. 그런 독특한 캐릭터로서 선녀라는 인물을 만들어본 거다.

-안재도, 안선녀와 권순분 여사의 관계를 설명해주는 부분이 있었으면 했다. 친자식보다 더 끈끈한 사이 아닌가.
=그런 부분이 있어야겠다는 필요성은 느꼈다. 권순분 여사가 고아를 거둬서 키웠다는 설정 비슷한 이야기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걸 굳이 찍을 필요가 있을까 싶더라. 회상으로 이야기를 보여주는 게 좋지 않아 보였다. 사실 관객은 영화에서 진행되는 대사, 표정, 느낌을 가지고 충분히 예상할 수 있지 않나. 물론 코미디로는 묘사할 수 있었겠지. 처음 나온 이야기 중 하나는 정상적인 키의 8살짜리 재도가 있고 3, 4살짜리 여자애인데 오빠보다 덩치가 커서 오빠 손을 잡고 끌고 다니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역시 사족 같더라.

-500억원을 기차에 싣는 순간부터 돈이 강으로 떨어질 때까지의 시퀀스가 필요 이상으로 긴 것 같다.
=맞다. 그게 감독들이 잘 빠지는 함정이다. 그 시퀀스는 촬영기간이 굉장히 길었다. 나 같은 감독은 짧고 임팩트있게 찍으면 리듬조절을 잘하는데, 공을 들이면 들일수록 제 리듬을 까먹는다. 부산, 대구, 안동, 정선, 하여튼 대한민국에서 철도가 가는 데는 다 찍고 돌아다녔다. 그만큼 편집도 오래 걸렸고, CG도 한달 이상이나 걸렸지. 기차가 멀리서 보이는 장면 외에는 다 CG라고 보면 된다.

-권순분 여사를 보좌하는 변호사의 과거는 무엇인가. 노트북 하나로 기차선로를 바꾸는 것도 의아한 부분이다.
=원래는 그 할아버지가 돈을 쓴다거나 해서 철도청 사람들이 기계를 조작해주는 거였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선로 조정하는 곳이 구리와 대전에 있는데 촬영이 안 되더라. 그렇다고 해서 그거 한 장면 찍자고 세트를 짓는 것도 너무 무리일 듯싶었다. 물론 그래서 그냥 노트북으로 갔다.

-<권순분여사 납치사건> 외에도 그동안 다른 아이템을 준비했을 것 같다. 어떤 게 있었는지.
=두개가 있었는데, 하나는 <대한독립만세>라고 광주학생운동이 소재인 이야기였다. 1920년대부터 30년대가 배경인데 시대물이라서 제작비에 부담이 컸다. 또 <화려한 휴가>가 사건은 다르지만, 광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점이 아닌 듯했다. 다른 하나는 <형제는 용감했다>라고 원수처럼 지내던 세 형제가 어떤 사건에 휘말리면서 우애를 회복한다는 이야기다. 매우 단순한 이야기지. 내가 원래 그런 걸 좋아하니까. (웃음) 이게 큰 건물 안에서 테러범들과 싸우는 이야기인데, 시나리오를 마무리하니까 <다이하드>랑 너무 비슷하더라고. 왜 <다이하드>는 만들어져서 나를 고통스럽게 하나 싶었지. 개인적으로 매우 아까운 소재기 때문에 <다이하드> 느낌을 탈색시키고 나중에 만들 거다.

-빨리 영화를 내놓아야 한다는 조급함은 없었나.
=그런 건 없었다. 솔직히 지난해에는 한국영화가 너무 많이 나오지 않았나. 그 때문에 함량미달인 감독, 배우, 스탭들도 너무 많이 나왔다. 괜히 나까지 그런 분위기에 휩쓸리고 싶지가 않았다. 올해는 설렁설렁해야겠구나 싶었다. 아, 이런 건방진 멘트를…. 겸손한 인터뷰를 해야 하는데…. (웃음) 하여튼 급한 생각은 없었다. 워낙 영화들이 엎어지고 망하는 걸 보면서 이왕이면 좀더 공을 들이고 싶었다.

-영화를 쉬면서 연극 <안녕하십니까, 수녀님>을 연출하기도 했다. 갑자기 연극을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박상면과의 개인적인 친분 때문이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후회하기도 했다. <병사와 수녀>라고 이미 오랫동안 공연된 작품이었는데, 내가 기운이 빠지더라. 하지만 나한테는 흔히 말하듯 재충전의 기회가 된 것도 같다. 당시에 대학로에서 하는 연극을 죄다 찾아봤다. 어떤 곳에서는 말도 안 되는 연극을 하기도 하고, 또 어떤 데에서는 정말 좋은 배우를 보기도 했다. 예전에도 해진이나 (성)지루는 연극을 보고 캐스팅했었는데, 아직도 그런 배우들이 연극판에 많더라. 그래서 이번 영화에서도 형사들을 비롯한 몇몇 배역에 그 당시 만난 친구들을 부르기도 했다.

-연극연출 외에 시네마서비스의 투자책임자로 일하기도 했다. <사랑을 놓치다>와 <왕의 남자>에 투자책임으로 크레딧을 올렸는데, 그만둔 이유는 무엇인가.
=내 작품에 신경을 못 쓰는 게 결정적인 이유였다. 시네마서비스에서 투자책임을 맡으려면 매일 2,3편의 시나리오를 읽어야 한다. 게다가 그 시나리오에 코멘트를 하고 다시 회의를 한다. 월요일 아침에 전 직원이 회의를 하고, 점심시간에는 임원들끼리 회의를 했다. 그러면 목요일에 또 회의가 있다. 차라리 말도 안 되는 시나리오면 쉽게 넘기며 읽었겠지. 그런데 나랑 장윤현 감독, 김인수 사장 중에 한명이라도 이거 괜찮다고 하면, 다시 읽어봐야 했다. 그때 박정우 작가가 <형제는 용감했다> 시나리오를 쓰고 있었는데, 회사에 미안해서 내가 그걸 몰래 읽곤 했다. 나중에는 박 작가도 서운해하더라. (웃음) 거의 매번 “에이, 모르겠다. 나중에 이야기하자” 그랬으니까.

-그 시나리오 가운데 직접 연출해보고 싶은 작품은 없었나.
=없었다. 하나도 없더라고. 사실 나도 하나 건져볼까 했는데, 괜찮은 시나리오는 다 임자가 있더라. 그냥 과감하게 그만두고 내 작품에 충실하는 게 좋겠다 싶었던 거지. 투자책임자로서 내 능력이 빵점이기도 했고. <왕의 남자>는 강 감독님이 먼저 결정한 것이었고, 내가 투자를 결정해서 크게 성공한 게 없다. 창피해서 리스트를 말하기도 싫다. 투자일을 해보니까, 투자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사기를 당하는 구나 싶더라. (웃음)

-현재 ‘감독의 집’이란 이름의 제작사 대표이기도 하다. 회사의 색깔을 염두에 둔 게 있나.
=그냥 보통 제작사들이 가지고 있는 비전만 있다. 어떤 색깔을 가질 생각은 없다. 여기서 영화를 만들게 될 감독들의 색깔이 있겠지. 그런데 지금 여기서 준비하는 감독들이 매우 힘들어한다. 아무래도 감독이 대표니까 다른 제작사에 비해서 기준점이 높다. 일일이 간섭하지는 않지만, 결과물에 대해서는 까다롭게 본다. 아직은 밥값도 있고, 돈 때문에 허덕이는 건 아니기 때문에 무리하게 영화를 만들지는 않을 거다.

-아내인 박은정씨는 연기생활에 미련이 없는 건가. 카메오로 같이 출연해도 재밌을 텐데.
=한때는 있었는지 모르겠는데, 지금은 없다. 귀찮다고 그러더라. 카메오 같은 것도 본인이 하겠다는 의사 표현이 없다. 나도 출연하는데, 마누라까지 출연하는 게 좀 그렇지 않나. 뭐, 만약 부부 역할로 출연할 수 있다면 이야기는 해보겠지.

-<권순분여사 납치사건>에서는 이전에 출연했던 것보다 더 튀는 캐릭터로 나온 것 같더라.
=주위 사람들이 연기가 일취월장했다고 하더라. 이제는 사람들이 내가 어디서 나오는지 기대한다. 아무래도 영화인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서라도 앞으로도 꼭 해야 할 것 같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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