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과 열정 사이]
[냉정과 열정 사이] 내 꿈이 뭐였더라
2007-09-21
글 : 김은형 (한겨레 esc 팀장)
욕심과 현실사이, 타협의 기술만 늘어가는 샐러리맨들을 위한 판타지 <즐거운 인생>

“그러니까 당신도 당신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 성욱(김윤석)이 아내에게 말한다. 이 말을 하기 전에 그의 아내는 “나라고 하고 싶은 게 없는 줄 알아?”라고 그에게 화를 냈다. 아내가 이 말을 하기 전에 그는 밴드를 한다고 고백했다. 아내가 기대하던 회사 복직은 물 건너갔고, 지금 형편에 맞춰 살아야 한다고, 그리고 자기는 밴드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결국 아내는 집을 나가버렸다.

“너도 너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 직장에서, 가정에서 내몰린 40대 가장들의 이야기라기엔 지나치게 유유자적해 보이는 <즐거운 인생>을 보다가 성욱의 대사가 나오자 갑자기 가슴속에서 뭔가 뚝 하고 떨어지는 걸 느꼈다. 물론 내가 퀭하던 눈에 반짝거리는 유리구슬 세개를 박아넣고 주먹을 불끈 쥐며 “그래 나도 이제부터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겠어”라고 벌떡 일어나 외친 것은 아니다. 뭐랄까, 너무나 당연한 것 같으면서도 또 반면 전혀 말이 안 되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 듯한 기묘한 느낌. 내 안의 성욱과 성욱의 아내가 동시에 반응했다고 할까.

‘인생 한번 사는데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야지’와 ‘나 혼자 먹고사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아’. 보통 사람들은 이 상반되는 가치관 사이에서 갈등하고 주저하고 때로는 에라 모르겠다 지르기도 하면서 평생을 살아간다. 나이가 들고 딸린 식구들이 생기면서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 사이의 괴리는 점점 더 커진다. 요즘처럼 먹고살기 힘들어지는 세상에서는 이런 괴리들, 옛날 같으면 직장을 얻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지면서 생겨난다고 여겨지던 고민의 연령대도 어려지는 것 같다. 미친 듯이 높은 경쟁률을 자랑하는 의대 입시나 공무원 시험 같은 것도 알고 보면 일찍부터 먹고살 일 걱정하고 미래의 부양가족을 위해 해야 하는 것을 찾아가는 행동이 아니겠나.

<즐거운 인생>의 세 친구는 어떻게 보면 오히려 이런 고민에서 조금 비껴나 있는 인물들이다. 다 늙은 백수가장이 대낮에 기타나 메고 다니는 게 한심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기영(정진영)의 딸 말마따나 “노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고, 외국의 가족을 위해 뼛골을 빼던 혁수(김상호)가 아내에게 배신당했을 때 미치지 않으려면 무엇이라도 했어야 했을 것이다. 퀵서비스에 대리운전을 하며 벅차게 살고 있는 성욱의 삶도 출구없기는 마찬가지다.

오히려 망설이거나 포기하는 쪽은 이들과 달리 무언가를 쥐고 있는 쪽이다. 직장을 다니고 있으면 나보다 연봉 높은 친구가 부럽고, 아이가 있으면 옆집 아이 다닌다는 더 좋은 학원이 아쉬우며, 집이 있으면 같은 돈을 주고 샀는데 집값은 두배가 뛰었다는 그 아파트가 눈에 삼삼하다. 그러다보니 하고 싶은 것의 리스트는 급격히 줄고 해야 할 것, 책임져야 할 것의 리스트는 점점 늘어난다.

그렇다고 욕심을 버리자,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자라고 쉽게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요즘 같은 살벌한 세상에, 삐끗하면 인생 날아가는 세상에 하고 싶은 거 하다가 회사 잘리면 네가 책임질래? 라고 돌멩이를 동반한 반문이 쇄도할 것이다. 나 역시 자신없기는 마찬가지다. 이렇게 산 지가 너무 오래돼서 정말 내가 하고 싶었던 게 무엇인지 따위는 잊은 지 오래다. 결국 우리 같은 찌질한 샐러리맨이 할 수 있는 건 타협의 지점을 찾는 것이다. 어디까지가 내가 감당해야 하거나 포기해야 마땅한 욕망이고, 어디부터가 조금이라도 내 영혼의 숨구멍을 틔워줄 수 있는 지점인지 찾아야 한다. 결국 그래도 잘살았다고 격려할 만한 평범한 인생은 처음 말했던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의 갈등구도에서 그 절묘한 타협점을 찾아낸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그런 면에서 생각하면 <즐거운 인생>은 즐겁게 허허실실 넘어가기는 하지만 진짜 소시민들에게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처럼 다가와 공복감이 더 짙게 느껴지는 영화다. 그래서 자꾸 궁금해지는 후일담. ‘라이브 조개구이’는 어떻게 됐을까. 장사가 잘됐을까. 공연만 하던 세 친구는 결국 먼지 쌓이는 테이블 앞에서 패잔병처럼 남루해지지 않았을까. 이렇게 생각하는 것 역시 ‘해야 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한 소시민의 습관성 되새김이겠지만 그래도 나는 그 흥겨운 결말이 더 불안했다. 그 달콤한 열광이 비루한 일상의 모욕을 견디게 해주는 힘이 될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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