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리포트]
[현지보고] 디즈니의 역사는 섭씨 12도에서 잠들어 있다
2007-09-20
글 : 장미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자료 보관·복원소 애니메이션 리서치 라이브러리를 가다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리서치 라이브러리(ARL: Animation Research Library)는 간판도 없이 미국 LA 주택가 어딘가에 숨어 있었다. 담쟁이덩굴로 둘러싸인 자그마한 건물의 외양은 무척 수수해 처음 온 사람이라면 평범한 가정집이려니 여기고 모르고 지나칠 것 같았다. ARL은 지난 80여년 동안 디즈니에서 제작한 40억점 이상의 애니메이션 자료를 보관·복원하는 곳. 디즈니 관계자는 ARL이 디즈니 본사도 아닌 외딴곳에 자리한 이유가 외려 “그 중요성”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건물은 월트 디즈니가 애니메이션 작업을 처음 시작한 1920년대 작품부터 <인어공주> <알라딘> 등 비교적 최근작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애니메이션의 원화와 스케치는 물론 <팀 버튼의 크리스마스 악몽> <라이온 킹> 등 애니메이션 캐릭터 모형을 비롯한 관련 자료를 고스란히 보관하고 있었다. 그림 자료의 가치와 정보 유출의 위험을 고려해 카메라와 물 따위의 마실 것을 로비에 두고서야, 기자들은 보관소(vault)가 쭉 늘어선 사무실 안으로 입장할 수 있었다.

복원은 복원일 뿐, 재창조가 아니다

볕이 따뜻했던 외부와 달리 내부는 다소 싸늘했다. ARL의 안내를 맡은 디즈니 관계자는 그림 자료가 부식하거나 비틀어지지 않도록 보관소 안의 온도는 섭씨 12도에서 18도 사이, 습도는 50% 정도를 항상 유지한다고 말했다. 세균, 박테리아가 서식하는 것을 막기 위해 모든 그림은 얇은 종이로 감싸거나 종이 박스 안에 넣어 보관했고, 직원들은 장갑을 낀 채로만 자료를 꺼내고 만질 수 있었다. 또 관리자와 이용자의 편의를 위해 연도와 작품에 따라 분류돼 컴퓨터 데이터로 기록됐다. 물론 모든 자료들이 처음부터 안전하게 수집된 것은 아니었다. 초기작의 원화는 부피를 줄이기 위해 돌돌 말아 아이스박스 안에 던져둔데다 일부는 디즈니와 친분이 있던 인사들에게 선물로 증정되거나 팔려 유실되기도 했다. 다행히 옛 애니메이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자료 보존의 필요성이 부각됐고, 원화와 필름의 복원도 적극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밤비> <피터팬> <정글북> 등 복원 프로젝트를 지휘한 테오 글럭은 이 작업에서 절대적으로 지켜야 할 제1 명제가 “원작의 그림을 바꾸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먼지가 묻고 스크래치가 생기고 색깔이 바랜 원화와 필름을 참고로 원래 형태에 최대한 가까운 작품을 탄생시키는 것이 복원 작업의 목표라는 뜻이었다. “우리에겐 세 가지 자료만이 있었다. 원화, 아주 운이 좋을 경우 당시의 기술로 제작한 테크니컬러 프린트, 그리고 본능. 복원팀에는 아트디렉터나 애니메이터, 원화를 그린 아티스트 친구들이 포함됐다. 우리는 한정된 자료 내에서 드라마 <CSI>에 나오는 수사관들처럼 원작의 모양새를 추적해야 했다. 그건 예술적이고 테크니컬하고 사회적인 작업이었다. 예컨대 <밤비>의 O.S.T를 파악하려면 1939년에서 1940년 사이 할리우드에서 활동한 오케스트라 멤버들을 알아야 한다. 1940년 즈음 동유럽의 유대인들이 나치에 쫓겨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래서 <밤비>의 음악에선 유럽 음악의 특징이나 연주법이 많이 드러난다. 결국 복원팀은 디지털 기술을 갖추되 이 모든 제반 상황을 분석할 수 있어야 하고, 이를 다루는 데 능숙해야 한다. 작품을 재창조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니다.”

40주년 맞아 복원된 <정글북>

ARL에서 원화의 형태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자료라면 가리지 않고 수집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었다. 올해로 40주년을 맞은 1967년판 <정글북>의 복원 작업도 마찬가지였다. 보관소 견학을 마친 다음 구경한 <정글북> 관련 자료 중에는 원화는 물론 캐릭터와 배경의 스케치, 삽화 등도 있었다. 이들 자료에서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여러 버전의 밑그림에서 드러나는 캐릭터의 모습이 제각기 달랐다는 점이다. 디즈니의 다른 애니메이션처럼 <정글북> 역시 4년이라는 긴 제작기간 동안 수차례 수정 작업을 거쳤고, 그 과정에서 캐릭터의 외양은 물론 특징도 조금씩 변화했다. 주인공인 모글리만 해도 키가 작아졌다 다소 커지고 조금 날씬해졌다 다시 통통해지는가 하면 얼굴색도 갈색에 가까웠다가 노란색이 짙어지는 등 얼마간의 차이점이 눈에 띄었다. 완성본에서 볼 수 없었던 캐릭터, 코뿔소 로키를 스토리보드 단계에서 발견한 것도 이번 작업의 성과였다. 디즈니쪽 관계자는 월트 디즈니의 조언으로 결국 삭제된 로키가 평상시에는 무척 아둔하나 화가 나면 앞뒤 가리지 않고 돌진하는 불 같은 성격의 캐릭터로 기획됐다고 설명했다.

<정글북>은 인간 소년 모글리가 정글에서 동물들과 함께 성장하며 겪는 사건을 담은 애니메이션. 나무 사이를 거닐다가 아기가 담긴 바구니를 발견한 표범 바키라는 이를 늑대 무리가 사는 동굴 앞에 가져다 놓는다. 늑대의 보살핌을 받아 무럭무럭 자라난 모글리는 보아뱀 카아에게 목숨을 위협받거나 호랑이 쉬어칸과 맞서는 등의 모험을 경험한다. 영국 작가 J. R. 키플링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이 작품은 1967년 상영돼 미국에서 흥행 1위를 기록했고 78년, 84년과 90년 재개봉돼 애니메이션 사상 최초로 전세계 흥행 4억달러를 달성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미국인들에게 신화적 존재나 다름없는 월트 디즈니가 살아생전 직접 제작에 참여한 마지막 작품이라는 점도 눈길을 끄는 부분. <정글북>의 음악감독 리처드 셔먼, 모글리의 목소리·라이브 액션을 연기한 브루스 라이더먼도, ARL에서 진행된 인터뷰 중 디즈니와의 작업에 대해 가장 열정적으로 대답했다. 디지털로 되살린 <정글북 40주년 기념 스페셜 에디션>은 한국에서 10월10일 발매된다. 사라진 캐릭터 코뿔소 로키와 관련된 자료들 역시 이번 스페셜 에디션에서 확인할 수 있다.

“디즈니가 직접 작업한 마지막 애니메이션이다”

<정글북> 음악감독,리처드 셔먼 인터뷰

형 로버트 셔먼과 함께 결성한 ‘셔먼 브라더스’에서 작곡을 맡은 리처드 셔먼(79)은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날카로운 유머로 기자들을 압도했다. <라이온 킹>(1994)에서 <It’s a Small World>를 작곡하기도 한 셔먼은 <정글북> <아리스토 캣>(1970) <곰돌이 푸의 모험>(1977) 등 1960~70년대 큰 인기를 얻은 디즈니 작품으로 명성을 얻은 작곡가. 특히 <Chim-Chim-Cheree> <Feed the Birds> 등 <메리 포핀스>(1964)의 음악은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데 공헌했을뿐더러 그에게 오스카와 그래미까지 안겼다.

-디즈니가 <정글북> 음악 작업에서 특별히 주문한 것이 있었나.
=디즈니는 총책임자의 위치에 있었지만 강제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정글북>을 작업하기 전 디즈니가 전 스탭들과 테이블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는 진지하고 무거운 키플링의 소설을 그대로 옮기려고 하지는 않았다. “키플링의 책을 읽은 사람이 있나?”라고 그가 물었다. 거기 있던 사람들이 전부 고개를 저었다. 놀랍게도 디즈니는 “좋아, 앞으로도 읽지 말아요. 대신 내 얘길 들어요”라고 말했다. (웃음) 그리고 15분 동안 자신이 각색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모글리라는 작은 소년부터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를 스스로 연기하면서. 늑대 무리, 곰 발루, 보아뱀 카아, 그의 얼굴은 캐릭터 그 자체였다. 우리는 거기서 자극을 받았다. 이어 그는 내게 키워드를 몇개 말했다. “가장 두려운 공간을 찾은 다음 그곳에서 나올 수 있는 가장 행복하고 재미있는 음악을 만들어달라.”

-당신이 작업한 디즈니 애니메이션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무엇인가.
=디즈니가 제작한 애니메이션은 모두 좋아한다. 애니메이션, 라이브 액션, 특수효과, 배경이 되는 맵 작업 등. 다양한 영역의 지식을 한데 모아 (할리우드 제작사들이 주로 위치한) 캘리포니아 버뱅크를 충격에 빠뜨렸지. (웃음) 첫 번째를 꼽을 수는 없지만 두 번째로 멋진 애니메이션을 말하라면 <정글북>을 선택하겠다. 이 작품은 디즈니가 직접 작업한 마지막 애니메이션이고 천재적인 애니메이터, 훌륭한 캐스팅과 캐릭터를 갖춘 대단한 작품이다. 게다가 거장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지 않았나.

“내가 모글리처럼 아이라서 캐스팅됐다”

<정글북>의 모글리 목소리 연기했던 브루스 라이더먼 인터뷰

브루스 라이더먼은 <정글북>을 연출한 울리 라이더먼 감독의 아들이다. 제작기간이 워낙 길었던 탓에 모글리의 목소리를 연기하기로 한 배우가 변성기로 접어들자 당시 10살이었던 브루스 라이더먼이 모글리 역을 대신 맡게 된다. 현재 브루스 라이더먼은 자연다큐멘터리 감독으로 활동 중이다.

-<정글북>에는 어떻게 캐스팅됐나.
=나는 아이였기에 캐스팅됐을 뿐이다. 모글리는 아이였고 그게 가장 중요했다. 메소드 연기 따윈 필요하지 않았다. (웃음) 사실 밤비나 피노키오도 인간으로 치면 유아에 해당하지만 그들 캐릭터의 목소리는 성우가 연기한 것이다. <정글북>은 이와 달리 모든 것이 본능적이고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발루 캐릭터를 맡은 필 해리스가 발루와 성격이 똑같은 것도 우연이 아니다. (웃음)

-아버지 울리 라이더먼 감독은 어떤 사람이었나.
=아버지는 단편 작업을 거치며 오랜 기간 애니메이터로 일했다. 회사원 타입은 절대 아니었다. 다른 애니메이터들도 그랬겠지만 그가 디즈니에서 계속 일했던 것은 월트 디즈니의 존재 때문이었다. 디즈니는 특별한 사람이었으니까. 생각해봐라.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애니메이터들이 40년 동안 한자리에 모여 협업했다면 그들을 이끄는 누군가가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와 함께했던 <정글북> 작업은 내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자연다큐멘터리 감독이라는 현재 직업을 선택한 데도 그때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 애니메이션은 자연다큐멘터리와 비슷한 구석이 많다. 제작기간이 어마어마하게 긴 것부터….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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