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 소식]
부끄러운 역사 앞에 침묵을 거부하다
2007-10-06
글 : 안시환 (영화평론가)
1979년 <양철북>에서 2007년 <울잔>까지 폴커 슐렌도르프 감독의 작품 세계

1950년대 후반 독일 영화계가 처한 상황은 한마디로 처참했다. 패전 이후 독일 영화 산업은 할리우드의 영화적 식민지로 전락해 있었고, 더군다나 텔레비전의 광범위한 보급은 독일 영화산업의 붕괴를 더욱 가속화했다. 세계적 명성을 지닌 베를린 영화제를 개최하면서도 영화제에 출품할 만한 자국 작품이 없는 것이 당시 독일 영화계의 현실이었다. 1962년 서독 오버하우젠 단편영화제를 위해 모였던 스물여섯 명의 독일 청년 영화인들이 “옛날 영화는 죽었다. 우리는 새로운 영화를 믿는다”라고 선언한 사건은 이러한 현실에 대한 저항의 외침이었고, 그것이 밑알이 되어 독일 영화계는 1960년대 독일 청년영화와 1970년대 뉴저먼 시네마를 꽃피우게 된다.

독일 청년 영화, 오버하우젠 선언의 기수

폴커 슐렌도르프

폴커 슐렌도르프는 오버하우젠 선언이 뉴저먼 시네마로 꽃피울 수 있도록 토양을 다진 대표적인 감독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칸영화제 그랑프리와 아카데미영화제 최우수외국영화상을 동시에 안겨준 <양철북>(1979)으로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킨 폴커 슐렌도르프는 프랑스 영화학교인 이덱(IDHEC)을 졸업하고, 이후 루이 말을 비롯해 알렝 레네의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 등에서 조감독으로 활동하며 영화를 익혔다. 그러던 중 1969년, 그러니까 오버하우젠 선언의 실질적 리더였던 알렉산더 클루게가 자신의 데뷔작 <어제여 안녕>으로 베니스영화제에서 심사위원특별상을 수상하던 바로 그 해에, 슐렌도르프는 <젊은 퇴를레스>를 발표하며 독일 청년영화의 문을 활짝 열었다.

사라지지 않는 과거, 독일 사회에 대한 폭로자

클루게의 <어제여 안녕>이라는 제목 속에는 과거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는 역설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동독 출신의 한 젊은 유대인 여성은 서독으로 탈출하지만 가정을 이루는데 실패한다. 사라지지 않는 과거가 끊임없이 현재에 출몰하며 그녀를 괴롭혔기 때문이다. 독일 청년영화와 그로부터 비롯된 뉴 저먼시네마는 과거와의 단절보다는 연속을 강조하면서, 현재 속에 떠도는 유령 같은 과거가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탐구하고자 했다. 로베르트 무질의 중편소설을 각색한 슐렌도르프의 <젊은 퇴를레스> 역시 마찬가지이다. 기숙사를 배경으로 하는 이 작품에서 슐렌도르프는 독일 3제국의 전말을 알레고리적으로 드러낸다. 두 명의 학생이 어느 유대인 학생을 괴롭힐 때, 한 독일 학생은 한편으로는 불편하고 혐오스럽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즐기는 듯한 시선으로 이를 바라본다. 이처럼 슐렌도르프는 잔혹한 행위를 보고도 이를 묵인했던 나치 시대 체제 순응자들의 과거를 들춰내고자 한 것이다.

<울잔>

뉴 저먼시네마의 감독들은 자율적 작가들의 느슨한 연합체에 가까웠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자본주의 체제와, 체제 순응적으로 자기만족적 정서에 빠져가는 대중들의 태도를 비판한다는 점에서만큼은 의견이 일치했다. 슐렌도르프의 초기 대표작인 <젊은 퇴를레스> <살인의 정도>(1967) <반항아, 미카엘 코올라스>(1969) <벼락부자가 된 가난한 사람들>(1971)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1975) 등도 독일 청년영화와 뉴 저먼시네마가 추구했던 영화적 목표에서 그리 벗어나지 않았다. 슐렌도르프는 분명한 독일의 과거이면서도 이전 독일 영화에서 다뤄지지 않았던 역사와 사회의 문제들을 폭로하는 비판자 역할을 자처했다. 특히 <벼락부자가 된 가난한 사람들>은 흔히 ‘고향 영화’라 불리는 전통적 독일 영화를 비판의 도마 위에 올려놓는 작품이다. 슐렌도르프가 볼 때, 더할 수 없이 풍성한 이미지로 묘사된 독일의 숲, 경치, 행복 등은 독일 대중의 눈을 현혹시키기 위한 속임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와 <양철북>은 슐렌도르프의 영화적 성향을 집대성한 작품이라 할 만하다. 슐렌도르프는 자신의 사회비판적 주제의식을 창작 시나리오를 통해 표출하기 보다는 이미 문학성을 인정받은 소설들을 각색하기를 즐겼다(그의 필모그라피는 위대한 작가의 소설들을 각색한 작품들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슐렌도르프는 독일 청년영화를 이끌었던 클루게나 장-마리 스트라우브, 뉴 저먼시네마와 함께 등장한 빔 벤더스,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베르너 헤어조크 등과 비교할 때 대중적으로 가장 성공한 감독이었다. 슐렌도르프 스스로도 “난 영화의 존재 이유를 가장 대중적인 전달 매체로 간주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슐렌도르프가 대중의 취향에 영합하기 위해 독일 사회의 치부에 메스를 가하는 원작의 의도를 훼손하거나 했던 것은 아니다. <양철북>의 오스카가 괴성을 질러 유리를 깨면서 자신의 의사를 세상에 전달하고, 양철북을 두드려 나치 전당대회를 왈츠를 추는 무도회장으로 둔갑시키며 회화화했던 것처럼, 슐렌도르프에게 <양철북>은 독일의 역사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는 윗세대에 대한 거침없는 저항이자 도전이었다.

독일 보수화와 슐렌도르프의 침체, 그리고 부활의 조짐

1982년, 파스빈더의 죽음은 뉴 저먼시네마의 종말이기도 했다. 특히 보수적 정치성이 강했던 헬무트 콜과 그의 기독교민주당이 승리를 거둔 이후, 엘리트주의적이고, 비판적이고, 비도덕적인 영화에는 재정지원을 하지 않겠다는 발표가 이어졌다. 뉴 저먼시네마의 많은 감독들이 그러했듯이, 슐렌도르프 역시 파리와 할리우드의 작가와 배우들을 기용한 합작영화를 연출하기 위해 독일을 떠나야만 했다. 슐렌도르프는 <스완의 사랑>(1984), <세일즈맨의 죽음>(1985) 같은 작품을 합작으로 연출했지만, ‘독일이라는 영화적 뿌리’를 상실한 그의 영화는 위대한 원작의 충실한 영화적 번역 이상의 가치를 지니지 못했다.

독일을 떠난 슐렌도르프의 침체는 그가 헐리우드에서 연출한 <핸드메이즈>(1990)에서 그 정점을 보여준다. 마가렛 앳우드의 <하녀이야기>가 원작인 <핸드메이즈>는 원작이 지닌 페미니즘적인 메시지는커녕, 흔하디흔한 디스토피아 SF영화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실패작이다. 그 이후 발표한 <사랑과 슬픔의 여로>(1991)와 <팔메토>(1998) 역시도 섬세한 심리 묘사나 장르적 충실함 등의 장점을 말할 수는 있겠지만, 뉴 저먼시네마를 이끈 감독이라는 명성에 비하면 별다른 특징 없는 범작에 불과할 뿐이다.

꽤 오랜 침체의 시간을 보내던 슐렌도르프가 부활의 조짐을 보인 것은 <레전드 오브 리타>(1999)를 통해서이다. 독일로 복귀하며 발표한 이 작품에서 슐렌도르프는 그의 영화적 뿌리인 독일의 역사에 다시 접근한다. 서독의 테러리스트였다가 동독으로 망명한 리타의 삶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영화 속 인물들은 자신이 태어난 곳을 혐오하며 그곳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하지만 이상은 또 다른 현실 앞에서 너무도 초라하게 부서질 뿐이다. 어쩌면, 영화의 시작과 함께 들려오는 “70년대는 우리에게 황금기였어. 스스로 대단하고 생각했지”라는 리타의 고백은 슐렌도르프의 회상이기도 할 것이다. 지금의 슐렌도르프에게 황금기 시절의 창조적 역량이 되살아나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일 수도 있겠지만, 망각의 유혹을 뿌리치며 독일의 현대사에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는 영화적 시도는 청년의 열정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독일 청년영화와 뉴 저먼시네마를 이끌었던 바로 그 저항의 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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