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영화의 살아있는 전설 폴커 슐렌도르프 감독이 부산을 찾았다. <양철북>(1979)은 그의 이름을 세계적으로 각인시킨 작품이지만 역설적으로 이후 완만한 침체의 길을 걸었다. 할리우드에서의 활동 이후 <레전드 오브 리타>(1999)를 통해 예전의 명성을 회복한 그는 여전히 독일영화의 변치 않는 양심이다. 그의 최근 영화들 중 가장 마이너한 규모라 할 수 있는 <울잔>은 그의 새로운 변화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어떻게 카자흐스탄에서 촬영하게 됐나?
=사실 이전까지 카자흐스탄이라는 국가명은 알았어도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 촬영하기 전까지 알게 된 거라고는 인도만큼 큰 땅덩어리를 가지고 있지만, 인구는 4천만 명 정도로 인도 봄베이시 하나 정도에 불과하다는 거였다. 처음에는 유목민의 지역이었지만 구소련이 강제 이주 정책을 펼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그러다 아시아 문화에 대해 관심이 많은 프로듀서 리기 게젤바쉬로부터 영화에 대한 제의를 받고 응했다. 리기는 한국에서 16년 동안 살았던 친구이기도 하다.
-<울잔>은 당신이 보여줬던 사회, 정치적 메시지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영화다.
=맞다. 그동안 독일의 역사와 정치적 상황을 다루는 영화들을 많이 만들어왔다. 그게 아니면 <양철북>처럼 두꺼운 문학작품을 영화화하는 일도 많았다. 그래서 내가 이제 게을러진건가, 하는 생각도 한다.(웃음) 이번에는 보다 서정적인 이야기를 원했다. 영화 초기에 받은 시나리오는 딱 3페이지였다. 한 남자가 죽기 위해 어딘가로 떠나고, 한 여자가 그 뒤를 따른다, 그리고 그 남자를 위해 말 한 마리를 놔두고 떠난다는 설정이 다였다. 지금껏 그렇게 영화를 만들어본 경험이 없었기에 더 신선했다.
-동양 문화에 대한 당신의 관심은 어떤가?
=삶의 빛은 동양에도 서양에도 없다. 주인공 샤를르는 카자흐스탄을 여행하면서 그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나는 동양과 서양이라는 구분에는 관심이 없다. 오직 사람들에게만 관심이 있다. 샤를르는 죽기를 원하지만 내심으로는 살기를 원한다. 울잔은 그걸 알기에 죽으려는 그를 위해 말을 묶어두고 떠난다. 그렇게 그는 삶의 폐허를 통과하면서 자기 삶의 가치를 돌아보게 된다. 여주인공의 이름이자 영화 제목이기도 한 ‘울잔’은 바로 산스크리트어로 ‘딜레마’를 뜻한다.
-<양철북>의 주인공 소년 다비드 벤넨트를 다시 볼 수 있어 반가웠다.
=영화를 보면서 누구인지 찾았는가?(웃음) 바로 단어장사꾼으로 등장하는 남자가 바로 그다. <양철북> 이후 28년만에 다시 작품으로 만났는데 그도 이제 마흔 살이다. 극단 배우로 지금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언제나 유랑하고 이동하는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당신의 이전작들과 맥락을 함께 한다.
=내 영화에서 방랑은 중요한 요소다. 내 주인공들이 늘 여행하는 사람이라는 얘기도 많이 들었다. 동물처럼 몸을 움직이고 어딘가로 이동하는 것이 우리 영혼에 대해 자연스런 치유력을 준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과거에는 스포츠를 별로 안 좋아하는 사람이었는데 나이가 들면서 좀 바뀌었다. 마라톤 대회에도 12차례 참여한 경험이 있다. 나는 부처처럼 가만히 앉아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번에 부산에도 내 러닝슈즈를 가져왔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