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 소식]
우리가 서 있는 땅의 모습을 닮은 두 작가
2007-10-08
진행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정리 : 강병진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경계>의 장률 감독과 <검은 땅의 소녀와>의 전수일 감독 대담

장률 | <검은 땅의 소녀와>와 <경계>를 모두 김성태 촬영감독이 촬영을 했다.
전수일 | 어떤 영화의 촬영이 나은 것 같은가.(웃음)
장률 | 두 작품 모두 촬영이 좋은 것 같다.(웃음) 김성태 촬영감독은 재능이 많은 사람이다. 무엇보다 뛰어난 점은 몸이 좋다는 것이다. 두 영화 모두 촬영감독이 몸이 좋지 않으면 찍기 힘든 영화가 아닌가.(웃음)
전수일 | <경계>도 들고 찍기로 촬영했다. 어떤 의도였나.
장률 | <경계>는 탈북자의 심리에서 출발하는 영화다. 망명자의 호흡은 일반사람보다 거칠고 불안정하다. 몽골이란 지역적인 특성도 있었다. 그곳은 지평선 밖에 보이지 않는 허허벌판인데, 그곳에 서있으면 시각적으로 뭔가 이상하게 흔들리는 게 느껴진다. 그런 인물의 심리적인 맥락에서 들고찍기를 했다.

전수일 | 카메라가 인물을 따라가다가 멈추고 다시 인물을 담는 방식은 어떻게 구상한 건가.
장률 | 그것도 내가 몽골에서 시각적으로 본 느낌이었다. 서울이나 북경같은 곳에서 찍는다면, 카메라가 인물을 계속 따라가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다시 카메라를 돌렸을 경우, 인물이 골목으로 사라지거나, 인파에 가려질테니까. 하지만 몽골은 그게 아니다. 같이 있던 사람이 자리를 뜨고 다른 곳으로 간다고 치면, 반 시간이 지나도 그 사람이 길을 걷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런 초원에서 행동을 빨리하면 코미디가 되겠지. 몽골 사람들이 가진 감정의 리듬이 그런 것이다.
전수일 | 카메라가 인물을 따라가면 그냥 자연스러운데, 안 그러니까 의도된 설정처럼 보이기도 하더라. 하지만 감독의 시선이 개입된 듯 하면서도 결과적으로는 개입이 아니라 거리두기를 한 느낌이었다. 그런 스타일을 계속 반복했는데, 스스로 단조롭다고 느끼지는 않았나.
장률 | 물론 단조롭다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몽골 자체가 단조로운 땅이다. 그곳에다가 스토리를 일부러 엮는 건 감정에 위배되는 것 같았다. 그러다보니 배우가 말하길 감독이 배우를 너무 싫어하는 거 아니냐고 하더라.(웃음) 그런데 실제 몽골 사람들은 서로 가깝게 앉아 이야기하는 법이 별로 없다. 거의 10미터를 사이에 두고 이야기한다. 보통 우리는 시력측정을 하면 2.0이 가장 좋은 시력이다. 그런데 그곳 사람들은 5.0의 시력을 가진 사람도 있다. (웃음) 영화도 그렇게 땅의 모습처럼 갔으면 했다.

전수일 | 한 지인이 <검은 땅의 소녀와>를 보고는 장률 감독의 작품과 느낌이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다고 하더라. 특히 <망종>에서 그런 지점이 있을 것 같다. 아무래도 마이너리티를 다루는 방식에서 비슷한 점이 있는 듯 싶다. 영화에 등장하는 가족의 구성도 비슷한 점이 있지 않을까. <망종>의 모녀와 <검은 땅의 소녀와>의 부녀는 모두 아버지나, 어머니가 결여된 가정이다.
장률 | 나도 모르게 그렇게 가는 것 같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내가 살아온 인생과 관련이 있다. 나도 한 몇년동안 어머니와 단둘이 산 적이 있었다. 다음 작품에서는 아버지를 넣어봐야지 해도 그렇게 안된다. 의도적인 건 없었다. 전 감독은 영화의 부녀를 어떻게 설정한 건가.
전수일 | 현실에 있는 그대로 반영하고자 했다. 실제 탄광촌 지역의 엄마들이 많이 떠난다고 하더라. 남편은 밤새 일하고 낮에는 잠만자는 데다가 생계를 꾸리기도 힘드니까. 그래서 아예 도망가거나, 바람을 피는 엄마들이 많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80년대말과 90년대초에는 그 지역에 제비도 많이 살았다더라. 그러다 보니까 엄마없이 자라는 아이들이 무척이나 많다. 나는 <경계>의 몇 장면이 궁금하다. 서정이 나체로 밤에 길을 걷는 장면이 있다. 그리고 처음에는 거부했던 남자와 나중에는 갑자기 성관계를 맺는 장면이 있다. 그것이 사랑의 감정은 아닌 것 같고, 욕망의 분출인 것 같은데, 어떤 맥락에서 연결을 한 건가. 솔직히 나는 그런 관계를 표현하는 데 어려움을 많이 겪는다.
장률 | 왜 그런 것만 궁금해 하나.(웃음) 나체로 걸어가는 장면에서는 이미 다른 남자의 시선이 있다. 여자가 그러는 건 몽유병이 나타나는 것이다. 몽유병을 겪는 친구가 있는데, 실제로 나체로 돌아다닌다고 하더라. 게다가 알아본 바로는 탈북자의 60퍼센트가 몽유병이 있다고 하더라. 그리고 그 성관계는 당연히 사랑이 아니다. 대신 나는 그게 사람들의 보통 생활이라고 생각했다. 살다보면 그렇게 몸과 마음이 따로노는 상황이 많지 않나.
전수일 | (웃음) 그런데 나한테는 여전히 그 장면이 소화되지 않는 것 같다. 꼭 그 장면을 보여주어야 했을까 싶었다. 나였다면 성관계를 노골적으로 보여주지 않고, 이들이 성관계를 가졌다는 느낌만 보여주려고 했을 것이다. 물론 그들을 지켜보는 아이의 시선이 개입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다 보여주지 않는 게 좋지 않았을까. 반면에 몽골 남자랑 마을 여자가 관계를 갖는 장면은 좋았다. 그 곳에서는 그런 경우가 많을 것 같더라.
장률 | 성관계에 대한 몽골인들의 관념은 우리와는 매우 다르다. 그곳에서는 결혼한 부부도 자기가 없을 때 배우자가 다른 이와 자는 걸 용인한다. 수백년 동안 허허벌판에 살다보니까 항상 사람을 그리워하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서는 퇴폐적인 것이 그곳에서는 자연스러운 거지.

전수일 | 다음 영화가 네팔에 있는 일처다부제의 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그곳에서는 한 명의 여자를 한 무리의 형제가 공유하는 데, 우리에게는 소화가 안되는 부분이지만 , 그들에게는 사는 방식인 거다. 그런 면에서 <경계>의 그런 모습과 유사점이 있을 것도 같다.
장률 | 그 땅에 맞으면 되는 거다. 나는 <검은 땅의 소녀와>가 아예 그곳에 살고 있는 현지인을 배우로 기용했으면 어떨까 싶었다. 다큐멘터리의 질감을 시도한 영화 같은데, 배우들이 등장하니까 그런 질감이 조금 옅어진 것 같더라. 물론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그런데 보니까 감독이 직접 출연한 장면이 있던데. 전수일 | 출연이라기 보다는 우연히 찍힌 장면이다. 광부들이 일하는 모습을 다양하게 찍어놓은 게 있었는 데, 그때 우연히 내가 찍혔다.
장률 | 극중 의사의 목소리 연기까지 하길 래, 혹시 배우로 가실려나 싶었다. 나도 그런 걸 해보면 좋겠는 데, 안타깝게도 그런 능력이 나에겐 없다.(웃음)

전수일 | <경계>는 몽골에서 찍었고, <이리>는 한국에서 찍는 영화다. 장 감독의 고향이 아닌 다른 곳에서 찍고 싶은 욕망이 있는 건가.
장률 | 가끔씩 나는 내가 예술가가 아니라 일꾼이라는 생각을 한다. 일꾼으로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그곳에서 하는 것이다. 몽골에서 기회가 있거나, 이리(익산)에서 기회가 있으면 그 기회를 따라가는 거지. 물론 그러면서도 나의 감정은 놓치지 않으려는 게 있다. 그런데 지금 <이리>를 찍고 있는 과정에서는 긴장되는 부분이 많다. 몽골은 아예 내가 모르는 곳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진실에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부분이 많았다. 하지만 한국은 내가 최근에 자주 들리면서 조금씩 알아가고 있기 때문에 잘못된 방향으로 이곳을 이해할 것 같은 두려움이 있다.
전수일 | 나는 지금 네팔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게 없어서 두렵다. 어떻게 그곳을 파헤칠까 하는 문제보다 그곳의 환경적 조건이 두려운 거다. 4000m 고산지대를 가야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네팔 사람들 20여명을 붙여야 하고, 500m씩 올라가면서 조금 쉬어가야 한다. 그래야 몸이 적응될 수 있으니까. 장률 감독이 고민하는 부분과는 좀 다른 게 있는 거지.
장률 | 그런데서 촬영을 하려고 한다면, 나를 프로듀서로 기용하는 게 어떨까. 지금껏 살아오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에 자신있다.(웃음)
전수일 | 지금 찍는 영화를 빨리 마무리 하셔야겠다. (웃음) 아무래도 오지에서 영화를 찍어보셨으니까 내가 배울 것도 많을 것 같다. 오지에서 영화를 찍을 때 가장 염두해야할 점은 무엇인가.
장률 | 사랑에 빠지면 안된다.(웃음) 나는 몽골에서 그곳의 낭만에 젖을 뻔하다가 어렵사리 일만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나야 일꾼이지만, 전수일 감독은 예술가가 아닌가. 예술가들은 보통 그런 상황에서 쉽게 사랑에 빠진다. 네팔도 낭만이 많은 곳일 것 같다. 내가 프로듀서를 하면 정말 감독이 낭만에 빠지지 않도록 만들텐데.(웃음)
전수일 | 일꾼이나 예술가나 똑같은 뜻인데, 표현이 다를 뿐이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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