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스>를 뮤지컬이라 부르자니 망설여진다. 뮤지컬 하면 화려한 무대에 어우러진 춤과 노래를 떠올리게 되는데 <원스>는 우리가 익히 아는 뮤지컬과 거리가 멀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차이. <원스>에는 주인공의 심경을 담은 노래는 있지만 시선을 사로잡는 황홀한 무대도, 근사한 춤도 없다. 공연예술의 양식적 아름다움에 관심이 없는 이 영화는 뮤지컬의 특징 가운데 오직 노래의 힘을 빌려왔다. 그것도 기타 하나로 충분한 노래. 아마도 <원스>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원칙은 꼭 악기가 많아야 좋은 음악은 아니라는 생각이 아닐까. 대부분 기타 하나로 충분하고, 피아노로 보완되는 정도면 충분한 영화 속 노래처럼 <원스>는 이것저것 한눈팔지 않고 자신이 잘 아는 것에 충실하다. 기타와 피아노가 있고 남자와 여자가 있으면 된다. 영화 속 배경은 더블린이 아니라 어디여도 상관없다는 듯 풍경에 무심하며 두 주인공을 둘러싼 인물들도 필요한 대목에만 그럴듯하게 등장한다. 기타와 목소리만으로도 영혼을 울리는 노래가 있다는 것을 <원스>는 알고 있다.
소박한 아름다움에 대한 찬가인 <원스>는 얼핏 거칠고 투박하게 찍은 영화처럼 보이지만 매우 영리하고 정교한 영화다. 많은 이가 지적한 <원스>의 매력을 대변하는 장면을 보자. 여자가 밤거리를 걸으며 CD플레이어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노래 부르는 대목. “난 정말 노력했어요. 더 나은 사람이 되어 당신을 기쁘게 해주려고. 왜냐하면 당신은 나의 전부이니까. 당신이 하라는 건 난 뭐든 할 거예요. 진정 날 원한다면 내 맘을 알아줘요.” 이 장면은 노래가 아니라 대사라면 성립하기 힘들다. 대사라면 그녀의 말을 들어야 하는 이가 분명할 텐데 여기선 누구를 향한 말인지 불분명하다. 음악을 만든 남자를 향한 것인지 여자의 남편을 향한 것인지. 관객은 뒤늦게 이 노랫말이 자신의 남편을 향한 소원임을 알게 되지만 막상 노래가 나올 때는 그런 생각을 하기 힘들다. 여자에게 남편이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은 후반부이다. 여기서 노래는 정서를 먼저 받아들이고 의미를 나중에 깨닫게 하는 기능을 한다. 노래가 아니라 대사를 통해서도 비슷한 스타일이 반복된다. 바닷가에서 남자는 여자에게 그를 사랑하느냐고 묻는다. 여자는 체코어로 대답하고 남자는 그녀가 한 말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남자도 관객도 영화가 끝날 때야 그녀의 말을 짐작한다. 정서와 의미 사이의 시차를 통해 <원스>는 즉각적인 감흥 대신 영화가 끝난 뒤 남는 여운을 택한다. 익숙한 이야기에서 빚어지는 낯선 감동은 <원스>의 이런 스타일에 숨어 있다.
<원스> 같은 영화를 보면 영화란 참으로 단순해 보인다. 적절한 대목에 제대로 연주를 하면 된다. 노래를 부르는 목소리에 집중하거나 그들의 표정에 집중하거나, 적재적소에서 자리를 잡기만 하면 화음은 완성된다. 다양한 악기나 번쩍이는 조명 또는 환호하는 군중이 없어도 말이다. 또한 좋은 노래들이 대부분 그렇듯 의미에 앞서 정서를 사로잡는 것이 중요하다. <원스>가 <카사블랑카> 같은 고전기 할리우드의 로맨티시즘을 부활시킨 느낌을 주는 것도 결말의 유사함만은 아닐 것이다. 로맨티시즘은 음악처럼 은근히 스며들어야 신파의 함정을 피할 수 있다. <원스>는 그런 점에서 올 가을 필요충분한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