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 소식]
국경없는 배우를 꿈꾼다
2007-10-10
글 : 장미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미국에서 활동하는 한국계 배우, 대니얼 대 김·존 조·그레이스 박을 만나다

요즘 미국 TV에는 낯익은 얼굴이 종종 등장한다. 할리우드 영화에도 반가운 이들이 속속들이 캐스팅되고 있다. 드라마 <로스트>의 김윤진과 대니얼 대 김, 드라마 <그레이 아나토미>의 산드라 오, 드라마 <히어로즈>의 제임스 기선 리, <디스터비아>의 아론 유, 드라마 <배틀스타 갤럭티카>의 그레이스 박, <해롤드와 쿠마>의 존 조, <007 어나더 데이>의 윌 윤 리, <패스트 & 퓨리어스: 도쿄 드리프트>의 레오나르도 남, <베터 럭 투모로우>의 성강. 그중에서도 근래 더욱 인상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는 3명의 한국계 미국 배우가 제12회 부산영화제를 찾았다.

올해 부산영화제에서 발족된 아시아 연기자 네트워크(Asia Pacific Actors Network, 이하 APAN) 혹은 영화제 상영작 <웨스트 32번가>가 계기가 돼 부산행이 성사된 대니얼 대 김, 존 조, 그레이스 박이 그들이다. 대니얼 대 김의 말대로 아시아 배우가 “악한이나 세탁소 주인이 아닌 훨씬 더 가능성 있는 캐릭터”를 맡기가 쉽지 않은 할리우드에서 그들은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눈길을 끈 작품도, 아시아계 배우로서 느끼는 책임감도 달랐지만 그들 모두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특별하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아시아 배우들에게 미국 드라마의 문이 넓어지고 있다_대니얼 대 김

대니얼 대 김은 김윤진과 함께 드라마 <로스트>에 출연 중이다. 비행기 불시착으로 정체불명의 섬에 떨어진 48명의 인물들의 사투를 담은 이 작품에서 그는 영어를 전혀 하지 못하는 한국 남자 권진으로 등장한다. 10월6일, 아시아 연기자 네트워크(Asia Pacific Actors Network, APAN)에 참여하기 위해 부산을 찾은 그를 만났다. “영어로 말해도 괜찮겠냐”고 친절하게 묻던 그는 영어를 더 편하게 여기는 듯했지만 한국어로 던진 질문의 대부분을 통역없이 이해할 정도의 한국어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 <로스트>로 큰 인기를 얻었는데.
한국에 오면서 무척 궁금했다. 실제로 많은 한국 사람들이 <로스트>를 보는지, 진짜 인기가 있는지. <로스트> 방영 직후 사람들이 내 캐릭터를 비판하기도 했기에 더 신경이 쓰였는지도 모르겠다. 한국인을 긍정적으로 표현하는 건 내게 항상 중요한 일이다.

■ 시리즈가 진행되면서 한국어가 점점 나아지는 것 같다.
고맙다. (웃음) 생후 14개월쯤 미국으로 이주해 그전까지 한국말을 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게다가 익숙하지 않은 언어로 연기하는 것은 조금 더 어려운 일이다.

■ 한국인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에 대한 부담은 없었나.
내게 어울리는 역할이라면 언제나 환영이다. 하지만 나쁜 캐릭터는 하고 싶지 않다. 내 친척들이 여기 살고있기 때문에 한국인과 미국인을 동시에 존중하는, 선한 의도를 가진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싶다.

■ 부산에서 태어났지만 뉴욕과 펜실베니아에서 자랐다.
펜실베니아에 있을 때 나는 학교에서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언제나 조금 아웃사이더였는데 사람들과 가까워지려고 노력하면서도 마지막에는 언제나 내가 그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곤 했다. 어른이 돼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집에 온 것 같다고 느낀 건 그 때문이었다.

■ 아시아계라서 캐스팅에 어려움을 겪었던 경험이 실제로 있는지.
그렇다. 매우 어렵다. 할리우드와 뉴욕에는 많은 아시아 배우들이 있지만 외모 때문에 다양한 역할을 받기란 상당히 힘들다. 그래서 훈련을 받는 게 가장 중요하다. 한번 주어진 기회는 무조건 잡아야 하니까. 아시아 배우들이 더 많은 일을 맡기 시작하면서 근래 미국 드라마의 문은 아시아계 배우들에게 더 넓어지고 있다.

■ 배우가 되겠다고 생각한 계기는 무엇이었나.
부모님은 내가 프로페셔널이 되길 바라셨다. 아버지가 의사라서 내가 의사가 되고 싶지 않다고 말씀드리자 매우 실망하시더라. (웃음) “네가 의사가 되지 않는다면 최소한…”이라고 하시기에 “그럼, 변호사가 되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결국 배우가 되는 게 결국 내 운명이었나 보다. 한번 연기를 경험하자 이게 바로 내 일이라고 느꼈으니까.

아시아계 미국인을 그리는 영화는 거의 없었다_존 조

올해 스타서밋아시아 커튼콜에 초대받은 존 조는 “미국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은 한국 배우”로 소개됐다. 밴드의 리드 보컬로도 활동 중인 그의 대표작은 2004년 미국 개봉 첫주 548만 달러라는 좋은 수익을 거둔 <해롤드와 쿠마>. 그가 인도계 배우와 함께 주인공으로 출연한 이 영화는 아시아계 미국 배우들의 가능성을 시사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차기작 <웨스트 32번가>가 플래시 포워드 부문에 선정돼 이번 영화제를 찾은 그는 바쁜 일정으로 매우 피곤해 보였지만 특유의 유머를 잊지는 않았다.

■ <웨스트 32번가>는 봤나.
그전에 이미 봤지만 영화제에서 상영되는 걸 보지는 못했다. 게스트들과 Q&A 시간을 갖느라. (웃음) 사실 나는 몇년동안 미국 한인타운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담은 시나리오를 굉장히 많이 받았다. 이 영화는 그중에서 내가 처음으로 직접 출연하고 싶다고 느낀 작품이다. 한국인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영화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도 매우 즐길만하다.

■ <웨스트 32번가>를 연출한 마이클 강 감독은 당신이 영화 내용에 많이 공감했다고 하더라.
내가 맡은 캐릭터인 존 김은 한국인들 속에서 자라지 않은, 한국계 미국인들과도 교류가 거의 없었던 한국계 미국인이다. 그는 친숙하면서도 생소한 고국의 문화를 경험한다. 내게도 그가 느꼈을법한 복합적인 감정이 있다.

■ 기본적으로 영어 영화지만 한인타운을 배경으로 할뿐더러 배우들도 거의 한국계다.
의미가 깊은 영화였을 것 같다. 그렇다. 매우 훌륭한 경험이었다. 사실 미국에서 아시아계 미국인을 그리는 영화가 제작되는 일은 거의 없다. 아시아계 미국 배우들, 그리고 아시아계 스탭들이 대다수인 영화에 출연하기도 힘들다. 일생에 단 한번 찾아오는 기회가 아닐까 싶다. 그렇게 믿고 싶지는 않지만. (웃음)

■ 어떤 한국계 미국 배우들은 남들과 다른 외모를 지녔다는 게 배우로서 오히려 장점이 된다고 하던데.
맞는 말이다. 내가 한국인이라는 건 내 영혼의 일부나 마찬가지다. 한국인이 아닌 나는 상상할 수 조차 없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더욱 중요해지는 것 같다.

■ 최근 <해롤드와 쿠마2>의 촬영을 마친 걸로 안다.
첫 편과 매우 비슷한 내용이다. 4월에 개봉할 텐데 그전 영화가 재미있었다면 2편도 재미있으리라 개인적으로 보장한다.(웃음)

지금 한국에선 세계적인 수준의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다_그레이스 박

그레이스 박의 한국 이름은 박민경이다. 너무 흔한 이름이라고? 하지만 구릿빛 피부가 인상적인 이 여배우와 마주하면 민경이라는 이름에서 뭔가 ‘우아’한 휘광을 느낄지도 모른다. <맥심>에서 꼽는 ‘가장 섹시한 할리우드 스타 톱 100’에 두 차례나 이름을 올린 것도 우연이 아니다. <웨스트 32번가>에 출연했고 APAN에 참여하기도 한 그녀는 한국에서도 방영 중인 SF 드라마 <배틀스타 갤럭티카>로 미국 내에서 널리 얼굴을 알렸다.

■ APAN은 아시아 각국의 배우들로 구성된 네트워크다.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나.
지금이 아니라도 언젠가는 생겨났을 꼭 필요한 단체다. 많은 아시아인과 배우, 프로듀서들이 중요한 이슈를 다뤘고 토론했고 고민했다.

■ <웨스트 32번가>에서 살인죄를 뒤집어쓴 동생을 위해 이기적인 행동도 불사하는 라일라를 연기했다.
한국어와 영어를 동시에 구사하는 캐릭터인데 한국어로 연기하기가 어려웠을 것 같다. 나는 미국에서 태어난 뒤 캐나다로 이주했다. 역시 가장 어려웠던 건 한국어로 말하는 것이었다. (웃음) 하지만 라일라는 미국에서 오래 산 인물이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미국에선 정말 그렇다. 부모가 모국어를 이야기하면 아이들은 영어로 대답한다. 부모는 전통을 고수하려는 에너지를 가진 반면 아이들은 그냥 미국 문화를 따르는 거다.

■ <웨스트 32번가>는 CJ에서 제작·투자하는 영화다.
앞으로도 한국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에 작업할 의향이 있는가. 오, 당연하다. 지금 한국에선 세계적인 수준의 영화들, 고유의 목소리와 결을 가진 독특한 영화들이 제작되고 있다.

■ <배틀스타 갤럭티카>에서 인류의 적인 사일런 종족이지만 인간과 사랑에 빠져 아이까지 낳는 캐릭터 샤론을 연기했다.
샤론은 아주 다양한 면을 가지고 있어서 좋다. 그녀는 강인할뿐더러 모성애를 배우기도 한다. 그녀는 자신이 누군지 끊임없이 고민한다. 이런 복잡한 캐릭터를 연기하는 건 매우 흥미진진하다. 택시운전사 같은 캐릭터를 맡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배우로서 아주 넓은 영역 안에서 연기할 수 있으니까.

■ 아시아 배우, 한국 배우로서 대표성과 책임감을 느낄 때도 있을 텐데.
엄청난 책임감을 느끼지는 않는다. 어떤 이에게 내가 롤모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어떤 선택이든 신중하게 내리려고 한다.

사진 박승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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