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에 대한 세간의 평은,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입 닥치고 즐기기나 해”다. 맞는 말이다. 산문으로 이 영화가 주는 쾌감의 속도와 강도를 쫓아가려는 건 혹은 그것과 대결하려는 건 언감생심. 말해지는 순간 말은 백전백패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는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달콤한 패배인가. 혹은 부끄럼없는 패배인가. 질문의 각도를 바꾸면, 어떤 영화는 윤리적인 질문을 요구받고, 어떤 영화는 요구받지 않는가. 패배할 것임을 알면서도 우리는 말해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유독 이 영화에 질문을 멈추는가.
1990년대 초반, 한국의 영화광들 사이에 화질 나쁜 복제 비디오테이프로 선댄스를 경악케 한 <저수지의 개들>(1992)이 은밀히 유통됐을 때 쿠엔틴 타란티노는 새로운 시대의 영웅적 전사였다. 인물들은 시체를 앞에 두고 낄낄거렸으며, 붉은 페인트는 프레임을 흘러 넘쳤다. 자유분방하고 수다스럽고 외설적이고 잔혹한 그의 영화는 죄의식과 계몽에 질식했으며 상상력과 취향의 시대를 소망하던 젊은 영화광들에게 복음처럼 다가왔다. 세월이 흘러 그에겐 상업적 성공과 할리우드 주류의 유혹, 거기에 유럽 비평계의 상찬이라는 덤까지 주어졌다. 그리고 오늘, 사라진 미국 싸구려 심야영화관(그라인드 하우스)에 다시 간 기분으로 로버트 로드리게즈(<플래닛 테러>)와 함께 <데쓰 프루프>를 만들었을 때, 그는 변하지 않은 것 같다. 변했다면 <플래닛 테러>에서 자신의 성기가 한여름 엿가락처럼 흘러내리는 강간범을 연기하진 않았을 것이다. 변한 건 아마도 어느새 과잉 유희의 시대에 살고 있는, 그래서 지루함이 죄악이 된 시대의 우리일 것이다.
고백하건대, <데쓰 프루프>를 보고 난 뒤, 나는 <저수지의 개들> 이래 품어오던 타란티노에 대한 호의를 거둬들였다. 물론 그는 여전히 대단한 장인이다. 엔터테이너로서의 그의 남다른 점은 느리게 걸을 줄 안다는 것이다. 그는 영화적 리듬의 대가다. 버터플라이가 어둠 속에서 마이크의 차를 바라보는, 고요하며 불길하고 서정적이며 관능적인 신은 아찔하다. 이런 숨막히는 정적의 신들이 없었다면 뒤이을 광란의 차 충돌신이 그토록 자극적이는 않았을 것이다. 타란티노는 활 시위를 천천히 그러나 끊어져 나갈 만큼 힘껏 당긴다. 손을 놓는 순간 영화는 아무것도 막을 수 없을 힘과 속도로 미친 듯 질주한다. <재키 브라운>에선 드물게 활시위를 잡은 손을 놓지 않고도 긴장과 체념의 비범한 하모니를 연주한 적도 있다. 그리고 누구나 인정하듯, <킬 빌>에서 거의 천의무봉한 경지에 이른 그의 액션장면 연출과 편집은 다시 봐도 황홀하다.
선정성 영화의 쾌감 제대로 보여주는 전반부
<데쓰 프루프>는 여전히 타란티노적인, 대책없는 무한 유희의 영화다. 굳이 다른 점을 찾는다면 낡음을 물질적으로 조작하고 노출한다는 것이다. 스크래치, 사라진 릴, 중복 프레임, 탈색과 변색, 그리고 이들이 전시하는 모조로서의 낡음. 이것은 셀룰로이드에의 향수일까. 그럴지 모르겠다. 타란티노는 디지털에 대한 필름의 우위를 주장하다, 디지털로 촬영된 로드리게즈의 <씬 시티>의 한 에피소드를 초빙 감독으로 연출하고 나서 자신의 주장을 접었다. 그러니 이것은 필름 시대에 대한 타란티노의 만사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 타란티노가 그리워하는 것은 그가 소년 시절에 체험한 싸구려 극장의 익스플로이테이션 무비, 즉 선정적이고 더러운 영화다. 그 체험을 그 공간에서 공유하지 않은 나를 포함한 사람들에게 그 조작되고 전시되는 낡음은 영화의 투명성을 가리는, 그럼으로써 그것이 없었다면 제기될 수 있는 윤리적 질문을 무색게 하는 반투명의 막이다. 그러니까 이건 그냥 입 닥치고 한판 놀자는 제안이다. 타란티노 영화는 실은 늘 그랬다. 그러고 보면 이 낡음의 모조는 타란티노로서는 꽤 예의 바른 안내장 같은 것이다. 음담패설의 자리에 우국지사의 표정으로 앉아 있으려면 괜히 오셔서 분위기 깨지 말라는.
나는 이 영화의 악취미를 윤리적 잣대로 비난함으로써 분위기를 깰 생각은 없다. 장 르누아르는 악취미 옹호 연대를 결성하며 “아직도 전지전능한 채로 남아 있는 신은 ‘좋은 취미’라는 신이다. 이것은 사실상 범상함의 취미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는데, 나는 그의 견해가 여전히 옳다고 믿는다. <데쓰 프루프>에서 수상쩍은 것은 악취미가 아니라 악취미의 위장이다. 선정성 영화는 대개 자신의 악취미를 계몽의 결말로 서둘러 봉합한다. 싸게 빨리 만들어진 탓에 이 봉합은 서투르기 짝이 없고 그 때문에 악취미의 에너지는 사라지지 않으며 위장은 실패한다. 전기톱 살인마의 영화를 보는 이유는 그가 결국 처벌받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무자비한 살인행각의 자극과 쾌감 때문이다.
문제는 위장이 성공적일 경우다. <데쓰 프루프>의 전반부는 선정성 영화의 전형을 보여준다. 여인들은 음란하고, 남근의 침입을 두려워하면서 은밀히 갈망한다. 카메라는 핫팬츠를 입은 여인의 엉덩이를 앙각으로 잡는 숏에서 시작해, 그들의 미끈한 다리와 보일 듯 말 듯한 엉덩이의 굴곡을 틈만 나면 탐닉한다. 비는 술 취한 그들을 젖게 만들고, 가련한 여인 버터플라이는 흐르는 치즈를 손으로 먹는 맹수 같은 사내에게 눈길이 자꾸 간다. 버터플라이는 얼마 뒤면 자기와 친구들의 생을 앗아갈, 그러나 부드러운 음성으로 프로스트의 시를 읊조리는 살인마 스턴트맨 마이크에게 어느 틈엔가 매혹돼 그를 위해 관능적인 랩댄스를 추며, 그녀를 보는 남성(관객)의 욕정을 부풀려놓는다. 늘씬한 금발 미녀는 마이크를 무시하면서도(“저런 촌스런 늙은이와는 같이 안 자”) 그의 낡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차를 얻어 탄다.
중년이지만 건장하고 치밀하고 부드러우며 냉정한 살인마 마이크는 한치의 빈틈도 없이 시속 200마일로 차 충돌을 결행해 다섯 여인들의 사지를 찢어놓는다. 영화 사상 가장 충격적인 충돌장면의 하나로 꼽힐 이 신은 매번 다른 각도로 네번 리플레이되면서, 당돌하고 관능적인 여인들의 신체 부위가 손상되고 떨어져 나가는 장면을 슬로 모션으로 생생하게 묘사한다. 이 장면은 끔찍하지만 더할 수 없이 자극적이다. 이것은 괴물의 남근 형상의 촉수가 여인의 입과 질을 뚫고 들어가 여인의 몸을 파열시키는 일본 괴수 포르노의 가학적 상상력을 공유하고 있다. 남성 관객으로서의 나는 잔인하고 외설적인 이 장면에 공포와 동시에 강렬한 쾌감을 느낀다. 내가 이 영화를 다시 본다면 이 장면 때문일 것이다. 선정성 영화는 그런 것이다.
결국은 관객의 감각을 시험하는 게임
문제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란 점이다. ‘14개월 뒤’라는 중간 자막으로 시작되는 후반부의 마이크는 다른 세명의 여인과 조우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 이상하다. 전반부에서 그토록 강인하고 치밀하던 마이크가 이번에는 어설프기 짝이 없다. 여인들 주변을 얼쩡거리다가 별다른 계획도 없이 난데없이 등장해 자신의 차로 세 여인이 탄 차를 밀어붙인다. 전반부와는 달리 알리바이도 확보하지 않은 상태인데다 시적인 대사와 팽팽한 긴장의 전조도 없고 어쩐지 공격도 시원치 않다. 반면 후반부의 여인들은 미모도 떨어지고 덜 관능적인 대신 훨씬 강해졌고 모델인 가장 관능적인 금발 미녀는 차에 타지 않았다. 차에 오른 한 여인은 뉴질랜드 출신의 스턴트맨이며 또 다른 여인은 총을 지녔다. 총 한방이 팔에 스쳤을 뿐인데 마이크는 아이처럼 징징거리고 여인들이 반격해오자 내빼기에 바쁘다. 여인을 살해하기 위해 갈비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마다하지 않았던 전반부의 그 강하고 잔혹한 남자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차에서 끌어내려진 사내가 여인들에게 죽도록 두들겨 맞을 때 스크린에는 벼락같이 ‘The End’가 떠오르고 관객은 환호한다.
우리는 무엇에 환호를 보낸 것일까. 단언컨대 <데쓰 프루프>는 한편의 영화가 아니다. 비슷한 줄기의 두 이야기를 한데 묶어놓았고, 한 남자배우가 연기하고 있을 뿐이다. 전반부의 마이크와 후반부의 마이크는 닮았지만 전혀 다른 인물이다. 싸구려 난장판이니까 그런 결함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런 구성의 모델이 된 선정성 영화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이 구성은 이 영화의 선정적 자질을 의도된 엉성함이라는 포스트모던 예술의 클리셰로 위장하고 있다. 이 위장을 간과할 수 없는 건 그것이 우리의 오인을 유도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연 전반부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마이크가 실패하고 그 당돌한 여인들이 살아남길 바랐는가. 오히려 그의 성공으로 거만하고 관능적인 여인들의 찢겨나가는 육신을 보고 자극받지 않았는가. 후반부에 응징당한 남자는 멋도 없고 머리도 나쁜데 가학적이기만 한 찌질한 남자 아닌가. 못생긴 여인들이 행한 이 남자에 대한 처벌(전반부에 비하면 너무나 인간적인)에 환호함으로써, 전반부에서 우리가 가졌던 어두운 쾌락이 후반부의 밝고 유쾌한 승리로 해소되었다고 착각하는 건 아닌가.
이 모든 사태를 타란티노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우리의 감각을 한껏 부추긴 뒤 우리의 오인을 비웃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 오인을 알아차린다 한들, 그는 그것이 이번의 게임이라고 말하고는 돌아설 것이다. 무한 유희정신이 윤리의 계율 혹은 진실과 진정성의 중압으로부터의 해방자가 되기를 멈추고, 감각과 판단력을 시험하는 게임이 될 때 그것은 자기 복제의 기술일 뿐이다. 그 게임의 기술이 아무리 능수능란해도 이젠 더이상 끼어들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