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여름, <씨네21>은 <어깨너머의 연인> 촬영을 앞둔 이미연을 만난 적 있다(<씨네21> 557호). <중독> 이후 4년이라는 긴 시간의 공백이 궁금해서 마련한 자리였다. 하지만 당시 인터뷰 기사를 더듬어보면, 지난 침묵의 이유보다 앞으로의 대화에 대한 기대가 가득하다. 홍경표 촬영감독과 희수 역의 이태란을 직접 섭외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던” 에피소드를 보자. 이미연이 <어깨너머의 연인>에 대해 얼마만큼 애착을 갖고 있는지를 단박에 보여준다. “연애하면 결혼해야 한다”고 여전히 시대착오적인 사고를 갖고 있다는 이미연은 “섹스는 단지 영양제일 뿐”이라고 여기는 정완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본인도 궁금했을 것이다. 하지만 개봉이 미뤄지면서 결과를 보기란 쉽지 않았다. “정확한 내막이야 모르죠. 일본에서 투자를 받은 작품이라서 그런가. 영화를 오래했어도 배급쪽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게 없어서….” 정완이라는 캐릭터를 벗은 지 1년이 넘었으나, 이미연에게 정완은 아직 ‘어깨너머의 연인’처럼 설레는 존재다. 어쩌면 캐릭터에 대한 진득한 애정은 “청순미모 휘날리며 제멋으로 살던” 데뷔 시절이었다면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갈수록 관객의 기대치는 높아지는데 뭔가 새로운 것을 보여줘야 하잖아요. 더 나아져야 하는데. 그런데 그게 딱딱 맞아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그러지 말고 앞으로 좋은 시나리오 있으면 좀 알려달라니까요. 제가 소심해서 감독님들 직접 만나서 로비를 잘 못해요.” 어느새 현장에 가면 이제는 “누구를 돌봐야 직성이 풀리는” 왕언니가 됐다는 이미연이지만, 일에 대한 욕심만큼은 큰 눈 가득, 어느 신인배우 이상이었다. “지금까지 제가 한 역할들이 대개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꿈꾸다가 상처입는 인물들이었잖아요. 그러다보니 주변에서도 그래요. 그만 하늘에서 내려오라고, 그만 꿈꾸라고. <어깨너머의 연인>은 그런 점에서 첫발을 내디딘 셈이죠.”
-처음 만난 사람이라도 악수를 청하나.
=예전부터 그랬던 건 아니고. 그동안 나름대로 내가 힘이나 여유가 생긴 거겠지. 내 편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도 생기고. 좀 편안하게 마음을 가질 수 있으니까 그런 제스처가 가능할 거다. 그렇다고 아무 손이나 덥석 잡는 건 아니다.
-그동안 <씨네21> 표지는 주로 남자 사진기자가 찍었다. 오늘은 여자다. 좀 다른가.
=남자냐 여자냐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다만 너무 많이 아는 사이면 이야기해야 하는 것을 좀더 못하게 되고 그런 게 있다. 상대를 더 잘 아니까. 이렇게 말하면 손홍주 기자가 삐칠 텐데. (웃음)
-<어깨너머의 연인> 촬영 끝난 게 1년이 넘었다. 개봉이 이렇게 늦어진 적은 처음일 텐데.
=마지막 촬영이 지난해 8월 말이니까. 내 입장에서는 촬영할 때 느낌을 갖고서 인터뷰를 해야 관객에게 이 영화가 어떤 느낌인지 잘 전달할 수 있는데. 이번엔 그게 쉽지 않아서 힘들다.
-<황금어장>의 ‘무릎팍 도사’에까지 출연했다.
=오락프로그램에 나간 건 8, 9년쯤 됐나. 김혜수씨나 이홍렬 아저씨가 진행하던 토크쇼에 나간 게 마지막이니까. 이번엔 다른 때보다 훨씬 더 홍보를 많이 하러 다니게 된다. 책임감이 전보다 더하다. <중독>이나 <태풍>이나 짐을 나눠 가질 동료들이 있었는데. 박신양씨가 있었고, 장동건씨가 있었고. 그런데 이번엔 감독님도 이제 두 번째 영화이고. (이)태란이도 처음이고. 힘들어도 ‘나 몰라라’ 할 수 없는 거지. 그래서 처음 마음으로 돌아가보자, 그때 그 마음이 뭐였는지 좀 찾아보자, 그런 심정으로 지금도 시나리오를 갖고 다닌다.
-시나리오 좀 볼 수 있나. 완전 너덜너덜하네.
=나한테는 일기장 같은 거다. 중간중간에 촬영 때 써놓은 멘트들이 있다. 그걸 다시 읽으면 그때 마음이 어땠는지 느낄 수가 있다. 이사갈 때는 짐이 되지만 너무 소중해서 다른 시나리오들도 모아뒀다. 가끔씩 꺼내서 본다. 그러면서 그때 캐릭터를 좀더 열어두고 표현할 수 있지 않았을까 아쉬워하기도 하고.
-시나리오의 (각 신의 첫머리에 붙어 있는) 이 사진들은 관련 의상들인가.
=맞다. 영화에서 의상이 굉장히 중요하다. 인물의 성격을 보여주니까. 정완이 좋아하는 색은 뭔지, 옷은 어떤 걸 좋아하는지, 또 그런 일관성들이 흐트러지면 안 되니까. <어깨너머의 연인>의 정완은 옷을 일단 많이 갈아입지 말자는 게 큰 원칙이었다. 사실 일반인들은 청바지 몇개, 외투 몇개로 살잖나. 그걸 바꿔서 매치할 따름이지. 이를테면 영화의 처음에 정완이가 머리를 내리고 나오는데, 세상과 벽을 치고 사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매니큐어도 손가락 하나만 칠해서 뭔가 흔들리고 있는 여자라는 느낌을 표현하고 싶었고. 후반에 마르코라는 사람을 알게 되면서 마음의 상처를 치유받게 되는데, 그제야 머리를 올리지. 앞으로 올 세상이야 좋은 일만은 아니겠지만 나쁜 것이든 아픈 것이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을 그렇게 보여주고 싶었다.
-일본 원작은 언제 읽었나.
=영화로 만들어지기 3년 전에 읽었다. 원래 한 작가가 좋으면 그 작가 전작을 훑는데. 신경숙, 공지영 뭐 이러다가 에쿠니 가오리에 빠져서. 일본 소설은 독특한 상황이나 색다른 캐릭터 때문에 재미를 붙였다. <어깨너머의 연인>은 처음 읽고서는 너무 세다, 우리 정서랑 다르구나 그랬는데. 영화는 두 여자의 구도와 약간의 성향을 빌려왔을 뿐 많이 다르니까. 영화 찍을 때 원작을 다시 읽진 않았다.
-<어깨너머의 연인>의 정완은 과거 맡았던 극적인 역할들과는 다르다.
=<중독> 끝난 다음에 배우 이미연으로나 여자 이미연으로나 살아오면서 힘들었고 지쳤던 것 같다. 즐길 수 있을 만큼만 고통스러워야 하는데. 일단 좀 쉬자고 하면서 골랐던 작품이 <어깨너머의 연인>이었다. 상식적인 캐릭터를 해보자 싶었던 거지. 주변에서는 가벼운 코미디를 권해서 몇개의 시나리오를 봤는데 설득이 안 되더라. 남들에게 설득하려면 내가 설득돼야 하는데. 그러다가 요즘 여성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꾸미지 않고 현실적으로 그린 이 작품을 택한 것 같다. 남자 관객은 어, 어, 하다가 영화 끝났네, 할지 모르겠지만 여자 관객은 좀 다르게 볼 거라고 본다.
-일상 연기라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나답게 연기하면 되겠다 싶었는데, 막상 그게 어려운 일이다. 의상이나 액세서리로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주기도 했는데, 관객 입장에선 바로바로 반응을 못할 수도 있고. 귀걸이를 했었어, 뺐어, 뭐 그런 것까지 보고 느끼기란 쉽지 않으니까.
-마케팅 문구처럼 쿨한 여자라고 정완을 정의하기는 좀 그런데.
=짧은 연예프로그램에서는 30대 여자들의 일과 사랑을 다룬 영화이고 정완은 쿨한 여자라고 하긴 한다. 그런데 실제 정완은 난 사랑을 믿지 않아라고 말하면서도 사랑한다는 달콤한 말을 듣고 싶어하는 성격의 여자다.
-정완은 쿨한 여자가 아니라고 했는데. 본인은 어떤 편인가.
=위험한 사랑 못하지. 연애가 체질이라고 말하지도 못하고. 연애하면 결혼해야 한다는 쪽이라서. 내가 좀 보수적이다. 살다보니까 그런 일도 겪었지만, 사람은 잘 안 바뀌는 것 같다. 약간 뒤끝도 있고. 사람 말 한마디 한마디에 많이 상처받는 편이고. 외향적으로 보여서 다들 미연아 어떻더라, 쉽게 말하곤 하는데 그런 말 들으면 집에 가서 그 사람이 왜 그런 이야기를 했을까 끙끙 앓는 소심형이다. 정확히 A형 여자인 거지. 사람한테 상처받고 사람으로 치유하는 것 아닌가 싶다.
-이미연이라는 배우는 기가 세다고들 한다. 인터뷰를 누가 할지 정하는데 다들 주춤했었다. 특히 여성들이 더 무서워하는 것 같다.
=하하하하하. 너무 오래해서 그런가. 그런데 선입견이다.
-여성감독과는 첫 작업인데. 사이는 어땠나.
=묘한 기류가 흐른 적도 있긴 했다. (웃음) 우리 감독님이 좀 새초롬하시다. 그런 상황에서 전에는 ‘아, 왜 그래’ 하고 장난으로 넘기곤 했는데, 이번엔 똑같은 상황이라도 ‘아, 감독님 식사는 하셨어요’ 묻게 되더라. 그래도 남자감독님들과는 다른 점이 있다. 영화에서 태란이랑 집에 같이 있는 장면에선 속옷을 안 입고 찍었는데. 친한 친구랑 같이 있는데 속옷을 챙겨 입지는 않잖나. 이런 디테일 같은 경우에 남자감독님이었다면 의견을 나누기가 좀 뭣했을 것이다.
-상대 배우가 한참 후배이다보니 베드신 같은 경우는 어려워했을 텐데.
=우린 아예 리허설을 했다. 그 전날에. 사실 약간의 러브신이라도 현장에서 감독과 배우, 배우와 배우들끼리 기싸움을 하곤 한다. 노출을 이만큼만 해야지, 하는 식으로 쓸데없는 신경전을 벌이곤 하는데 그런 괜한 싸움을 해서 무엇하나. 정작 그 장면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뭔가, 그걸 공유해야 하는데. 우리의 경우는 옷 벗고 바지 벗고 모든 게 자연스러워질 때까지 리허설을 반복했다. 나도 상대배우한테 해야 할 액션 다 해라, 불편하면 이야기하고, 그랬고.
-홍경표 촬영감독을 섭외하는 데 직접 뛰었다던데.
=<태풍> 하면서 만났는데 이 장면에서 인물의 어떤 감정을 표현해야 할지 굉장히 정확하게 안다. 시나리오에는 없는 감정이 즉흥적으로 나오면 멈추지 않고 그걸 카메라에 담을 줄 아는 분이라 배우 입장에서는 더없이 좋다. 뭣보다 자신의 필모에 대한 자긍심 때문에 영화를 허투루 찍을 분이 아니니까. 아군하나 더 만든 거지.
-정완보다 희수에게 더 끌리진 않았나.
=너무 내 이야기처럼 보이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들더라. 발랄한 캐릭터가 맘에 들긴 했는데.
-<중독> 끝나고 나서 드라마를 하긴 했지만, 그전보다는 좀 시간이 많이 났을 텐데.
=완전한 자유의 시간은 없는 것 같다. <중독> 끝나고 나서도 2주일에 한번씩 광고 일이 있었고. 또 영화 한편 고르는 게 얼마나 고단한 일인가. ‘어, 이거 재미없어’ 하고 시나리오 던지는 게 아니라 긴가민가 싶으면 주변과 상의해야 하고, 그래도 잘 모르겠으면 감독과 미팅도 해보고. 쉬는 게 쉬는 게 아닌 거지. 몸과 마음이 텐션을 갖고 있지 않으면 기회가 왔을 때 어떻게 하겠나. 그나마 시간나면 여행을 많이 가려고 한다.
-광고 촬영이 많으니 여행 기회도 많지 않나.
=신기한 음식 보면 식탐이 마구 생기는데 다이어트해야 하니까 그것도 못 먹고, 그러다보면 못 즐긴다.
-아까 긴가민가하면 감독 미팅한다고 했는데. 꺼려지는 감독 유형이 있다면.
=하하하. 너무 고집 센 사람은 싫다. 전작에 대해 한을 갖고 있는 분들도 좀.
-현장 가면 다 동생들일 텐데. 선배가 되니까 좋은 점이 있지 않나.
=뭐가 좋아? 정말 뭐가 좋아? 좋은 점이 있으면 좀 말해달라. 자기 아픈 것만 생각하는 게 사람이잖나.
-선배가 되니까 안 좋은 점은 뭔가.
=눈치는 좀 빠르다. 이제는 딱 보면 ‘너 왜 그래’, ‘정신 좀 차려’, ‘힘 내고’ 그러게 된다. 혼자 앉아 있으면 다 보이는 거지. 한번은 그러더라.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때 만났던 분이 전에는 컷만 하면 얌체 표정으로 앉아 있었는데 많이 변했다면서. 그때만 해도 혼자 잘나서 영화를 끌고 간다고 생각했는데, 하다보니 그게 아니다. 팀워크라는 게 필요한 거지. 이번에도 홍경표 촬영감독님이 아침에 촬영이 있는데 새벽에 월드컵을 봐야 한다면서 호프집을 빌리셨다. 결국 빨간 옷 사입고 가서 응원했지, 뭐. 한편으로는 나도 연기에만 집중하고 싶은데 그런 역할까지 해야 한다. 기운이 모여야 영화가 만들어진다는 걸 이젠 알고 있으니까. 눈치만큼 또 노하우도 늘게 되는데. 사실 그 노하우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바라볼 때가 있다. 내 입장에서는 바보처럼 현장에서 아무것도 몰라, 그럴 수는 없잖나. 그러다보니 감독이나 스탭들과 부딪칠 때가 있지.
-다른 캐릭터를 받아들이려면 과거의 캐릭터를 떨쳐내야 하는데. 어떻게 하나.
=나는 책을 좀 많이 본다. 그 안에서 돌파구 같은 걸 찾는 것 같다. 물론 술도 마신다. 하지만 완전히 떨쳐내려고 하는 편은 아니다. <행복은…>의 은주도 아직 살아 있다. 완전히 죽일 순 없지. 또 다른 내 모습이니까.
-2007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남은 기간 동안 꼭 이루고 싶은 게 있다면.
=결혼? 농담이고. 결혼이라고 했더니만 우리 애들이 화들짝 놀라네. 맘에 드는 시나리오 딱 하나만 받아서 도장 찍고 싶다.
-결혼은 아니더라도 연애는 해야 하지 않겠나.
=언젠가는 하겠지, 뭐. 그런데 사람에 대한 신뢰를 하기가 쉽지 않다. 지금은 꼭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주변에 좋은 분들이 많으니까. 요즘 다들 나보고 얼굴 좋아졌다고 하는데 그분들 덕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