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죽지 않는다>의 마지막은 어떤 숭고미를 다룬다. 이 영화는 알려진 대로 소설가 최인호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으며, 70년대부터 명배우이자 감독이자 제작자로 활동하는 하명중이 연출이다. 작가 최호는 실버타운에 있는 자신의 처소를 뛰쳐나와, 뉴타운 개발이 진행 중인 구파발로 달려간다. 그의 돌발 행동을 이끄는 코드는 ‘알라뷰’라는 삐뚤삐뚤한 글자로, 곧 우리는 플래시백에 의해 최호의 유년기로 이끌려가는데, 거기에는 막내아들 최호가 개성댁으로 부르는 어머니(한혜숙)가 있다. 꼬마 최호는 귀엽고 다정한 소년이다. 병상의 아버지에게 신문 소설을 읽어주고, 발 마사지를 해준다. 글을 곧잘 읽는 이 소년은 나중에 어머니가 대문호가 될 최 작가라고 자랑스러워하는 젊은이로 성장한다. 소년 최호가 대학생으로 성장하면서 개성댁이라는 칭호는 이 여사로 바뀌는데, 어머니를 어머니로 부르지 않는 이런 별칭만큼이나 둘의 관계는 별다르다. 아버지에게 바쳤던 예의 서비스를 최호는 충실하게 어머니에게 돌리게 된다. 또 집의 문패를 자신의 이름으로 해달라고 장난스럽게 말한다. 그래서 이 집에는 최호라는 문패가 달린다.
한편, 이 여사는 남편과의 사별 뒤 하숙을 하면서 아이 셋을 키운다. 그래서 남아 있는 방이 없어 최호는 성인이 된 뒤에도 어머니와 함께 방을 쓰게 된다. 이러한 조건은 최호와 이 여사간에 특별한 친밀감을 형성하게 한다. 그러나 작가로 등단한 최호는 일종의 정신적 이유기를 갖게 되면서 어머니의 집을 나간다.
이 여사는 이러한 상황 앞에 거의 혼절한다. 수많은 편지를 아들에게 보내지만 어떤 이유인지 모두 반송된다. 여기서 딸을 결혼시키고, 아들 둘을 분가시킨 나이 든 여자의 외로운 마음을 담아내는 소박하면서도 수려한 장면이 등장한다. 그녀는 이웃 남자친구와 하염없이 소주를 마시는데, 이 옥외 술집에 동행한 것은 그 남자친구만이 아니다. 집에서 키우던 진돗개가 의자에 묶인 채 술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여사는 술을 농담삼아 권하다가 안주를 던져준다. 그리고 눈 내리는 길을 줄 묶인 진돗개를 친구삼아 돌아온다. 눈이 꽤 내리는 겨울 골목길에서 그녀는 진돗개에게 묻는다. “너도 나를 떠나고 싶니?” 개는 대답하지 않지만 그녀가 끈을 놓자 정말 진돗개는 끈을 눈 위로 끌며 떠난다.
반송된 편지들은 쌓이고 혼절한 정신의 이 여사는 치매를 앓아 노인병원에 갇힌다.
숭고하지만 경제성엔 무심한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
홀어머니와 아들의 애틋한 사랑으로 마치 동화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내던 이 영화는 이쯤에 이르면 가슴 저리는 모자 결별의 이야기가 된다. 스산하고 삭막하며 아득하다.
그러니 처음 거론하며 시작했던 그 ‘숭고미’(sublime)으로 돌아가보자. 막 신파나 멜로드라마로 가려던 영화는 그 충동을 절제하고 이 여사와 최호 작가의 이야기를 서울시 뉴타운이 만들어지기 직전, 폭발 직전의 폐허로 가져간다.
어머니가 자신에게 보냈으나 반송된 편지들을 최 작가는 폐가의 먼지 속에서 발견한다. 어머니의 사랑의 편지는 30여년의 시간을 거쳐 그의 마음속에 도착한다. 최호는 최호라는 자신의 문패를 떼어내고 거기에 어머니 이영희의 것을 붙인다. 검은 대리석 재질의 어머니 이름 세자가 새겨진 문패 위로 재개발 단지의 폭발과 스러져가는 집들이 어른거린다. 고양과 하강의 숭고한 순간이다. 아들이 어머니의 이름을 공식적으로 부르는 순간이다. 그러나 어머니가 집의 주인으로, 가장으로 자신의 상징을 돌려받는 시점이 바로 그 어머니가 주거하던 동네가 폐허화하는 순간이다. 이 역설 속에서 바로 어머니는 죽지 않고 산다. 마을 주민들은 오래전부터 살아와 베트남전에 참여한 이웃을 알고 있고, 최호의 등단을 지켜보았다. 마을 사람들이 드나들던 가게 위로 그의 등단을 알리는 현수막이 올라가기도 했다. 뒤에 <별들의 고향>으로 알려지게 되는 원제‘별들의 무덤’을 쓰던 집 주변, 주민들의 주거지를 잠식하는 뉴타운이라는 헛된 새로운 희망 안에서 이미 죽은 그녀는 늙은 아들이 단 문패로 되돌아온다. 그야말로 고향은 무덤이 된다. 여기서 어머니는 사용가치를 모두 소진한 그러나 30여년의 세월을 거친 뒤 상징적 가치를 되찾는 존재다. 최호라는 작가의 성장기의 어머니는 밥과 돈만을 주는 것이 아니라 리비도적 친밀성도 가지고 있는 존재다. 리비도의 경제적 질서로 보자면 어머니와 아들은 잉여이지만 또한 그 기반이다. 최호에게 여자친구가 생기고 또 아마도 홀어머니의 존재 때문에 그녀와 헤어진 뒤, 그는 어머니에게 ‘밥과 돈’만 주면 되는 것이냐고 형편없이 따져 묻는다.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의 어떤 무심함이라고 한다면 어머니가 뉴타운 개발 지역에 남기고 간 집이 자식들에게 주는 경제적 가치다. 영화는 가난한 홀어머니와 그녀의 곁을 떠나가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충실히 쫓으면서도 그러한 경제적 부분들에 대해서 별 언급이 없다.
어머니의 원시적인 자본윤리 보여주는 <권순분여사 납치사건>
이와 정확히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 <권순분여사 납치사건>이다. 이 영화는 ‘어머니와 돈’의 이야기다. 혹은 어머니의 경제적 가치이다. <열혈남아>에서도 거침없으나 상처받은 국밥집 어머니상을 보여준 나문희는 이 영화에서 국밥집 지존으로 등장한다.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가 훗날 아들에 의해 복원되는 ‘어머니의 이름’, 이 영희를 다루고 있다면, <권순분여사 납치사건>은 권 여사 스스로가 되찾는 ‘어머니의 재산’, 권순분의 경제력의 회복을 보여준다.
이 영화의 기획 컨셉이 좀 어리둥절하기는 하다. 아무리 추석 명절이 막 닥칠 때 개봉한다고는 해도 이건 <주유소 습격사건> <신라의 달밤> <광복절특사>와 같은 흥행작을 내놓은 시네마서비스의 김상진 감독이 아니라면 “그러니까요. 70이 넘은 국밥집 재벌 할머니가 유괴되었는데, 그 할머니와 유괴범들이 작당해서 500억원을 요구해요. 한마디로 유쾌한 유괴극이죠”라고 말해 제작비를 받아내는 것이 쉬운 일로 보이지는 않는다. 거기다 “덜 떨어진 세명의 유괴범들과 할머니는 여자 거인의 집에 머물면서 법죄의 치밀한 구성을 하게 되거든요”라고 말해보라.
이 영화는 사실 현실성은 거의 제로에 가까운 만화적 상상력에 기대고 있는데, 그 윤리적 저변이 그리 건강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이 영화가 만화적 상상에 기대야 하는 이유는 70살이 넘은 권순분 할머니가 자신의 인질금으로 500억원을 요구해서가 아니라, 그의 네명의 자식들의 한심한 불효 때문이다. 일찌감치 자식들에게 재산 분배를 해주었던 권 여사는 그것이 큰 잘못이었음을 깨닫고 있던 중 납치를 당하게 된다. 그러나 이 납치는 권 여사에겐 자신의 판타지가 실현되는 순간이다. 바로 자신의 재산을 자식들로부터 되찾아올 기회로 이 유괴사건을 활용하게 되는 것이다.
이 영화의 정치적 무의식은 두말할 것 없이 세대의 특성들, 그 세대간의 교환과 갈등과 화해라는 우회로에 놓여 있다. 먼저 60, 70대 노년세대는 386 전후 한 중년 세대에 자본을 물려준다. 386 전후한 그 세대들은 지자제 시행에 따라 그전 세대의 자본을 가지고 구의원을 거쳐 국회의원을 욕망하거나 로비를 통한 골프장 건설을 계획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돈으로 기사를 고용해 카섹스를 한다거나 아니면 카지노에서 무의도식한다. 반면 386 아래 세대들 20대와 30대는 그야말로 난감한 상황이다. 이른바 88만원, 비정규직 배틀로열 세대는 그전 세대로부터 받은 것이 없다. 그래서 이 영화는 이미 재산을 축적했다가 386세대에 그것을 빼앗긴 노년층과 88만원 세대간의 새로운 협약이 맺어지는 과정을 다룬다. 이들은 비도덕적이고 이기적인 중간 세대를 질타한다. 그리고 이들에게 다시 자본을 거둬들여 실버타운도 짓고 또 자신의 사업을 꾸릴 궁리를 함께하게 된다. 여기서 권순분 할머니는 자산가이지만 100여 가지 비법을 사용한 국밥을 팔아 그 자산을 착실하게 모은 사람이다. 이 100여 가지 비법은 <권순분여사 납치사건>에선 386세대가 아닌 그 다음 세대에 전수된다.
주식과 펀드, 투기로 구성되는 금융 경제의 시대, 이 영화는‘부동산’과 하루‘국밥’ 2500개 판매라는 비금융자본적 화법을 사용하기는 한다. 그러나 권순분 할머니의 부의 축적과 부의 분배를 보여주면서 거의 ‘원시’ 자본 윤리에 손을 들어주는 속내를 드러내고 있다. 어머니 권순분이 상징하는 바가 그것인 것이다. 이영희와 권순분. 과연 이상한 어머니, 좋은 할머니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