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떠난 적도 있고, 사람을 떠난 적도 있다. 내 생애의 모든 이별들이 애달프고 아름다웠었다 주장하진 못하겠다.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이별의 순간은, 더이상 견딜 수 없을 때 찾아오곤 했는데.
대부분의 이별은 상대방이 아니라 스스로를 견디지 못해 하는 것이다. 남겨진 사람은 큰소리로 통곡할 수 있지만, 떠나는 사람은 얼굴의 미세한 근육조차 움직일 자격 없는 헤어짐. 그 얼빠진 자책감의 기분에 대해 알고 있다. 그럼에도 외려 서둘러 떠나고 싶어 조바심냈던 이유는 뭘까. 스스로의 바닥을 봐버리고 싶은, 그리하여 더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어서 겪어버리고 싶은 위악적 욕망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인간이란 가끔 몹시도 잔인하고 또 어리석으니까.
보고 있을 때보다 극장을 나선 이후에 더욱 머리가 복잡해지는 영화가 있다. 허진호 감독의 새 영화 <행복>처럼. 영화는 뻔한 통속극과 유사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도시의 쾌락을 좇으며 살던 한 남자가 모든 걸 잃고 난 뒤 지고지순한 여자에게 잠시 기대었으나, 병이 낫자 그녀를 버리고 만다는 서사. 여자는 죽고 남자는 비참해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영수(황정민)가 일방적으로 은희(임수정)를 이용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 데도 의지할 곳 없던 시절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손에 건네진 들꽃 한 무더기를 희망이라는 힌트로 받아들이는 게 마땅하고, 그것은 사랑의 다른 이름일 수 있을 터이니.
잠시 서울에 다니러 간 영수가 옛 애인의 침대 위에서 널브러져 있을 때, 시골집에 남겨진 은희는 영수의 휴대폰에 몇번이나 전화를 걸어 간절한 음성메시지를 녹음한다. 선잠과 죄의식의 경계에서 영수는 끝내 전화를 받지 않는다. 딱 그 지점부터 옆자리의 여성관객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스물두세살 언저리, 함께 온 남자친구의 팔에 어깨를 폭 감싸인 채였다. 영수의 태도가 조금씩 매몰차질 때마다 그녀의 흐느낌은 점점 커져갔다.
그러고 보니 결별의 찰나에 영수는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함께 살던 작은 집을 떠날 때, 뒤에서 여자의 격한 울음소리가 들려오지만 남자는 돌아가지 않는다. 그의 눈동자가 무표정하게 흔들렸을까. 아마도 그는 명징하게 예감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사랑, 다시는 없다는 것. 이런 사람, 죽어도 없다는 것. 지금 떠나면 하나의 세계가 영원히 사라져버리리라. 완전무결하고 무조건적인 애정을 아낌없이 베풀어주는 단 한 사람을 여생에서 두번 다시 만나지 못하리라. 그렇지만 그는 그 안온한 공간을 스스로 걷어찬다. 내일이면 닥쳐올 후회를 알면서도 오늘의 헛된 갈망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들어간다. 문은 안에서 닫히고, 남자는 망망대해에 홀로 갇힌다.
오줌 누다 문득 거울 속 얼굴에 침을 뱉거나, 벌거벗고 양치질하다 핏물을 게워 올렸을 때 영수는 어쩌면 그 집으로 귀환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은희는 영수를 받아들였을까. 그랬을 것 같다. 그들은 무엇도 훼손되지 않은 척 소꿉장난의 연기를 조금 더 지속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허름한 병상에서 자포자기할지언정 영수는 두고 온 은희 곁으로 가지 못하는가. 영화를 통틀어 가장 비현실적인 듯 실존적인 선택이다. 인간이란 잔인하고 어리석지만, 때론 격렬히 이기적이지도 못한 존재이니까. <행복>을 보고 나서 내가 회전목마를 타고 같은 자리를 뱅글뱅글 도는 것처럼 슬픈 현기증을 느꼈다면, 남들이 상투적이라 말하는 후반부 때문이다. 뼛속까지 나쁜 남자이지도 못한 이 못나고 애처로운 사내 탓이다.
현실의 사랑과 이별 앞에서는 가해자와 피해자를 날카롭게 판별하는 일이 불가능하고 무익하다. 나라는 한 사람이, 어떤 관계에선 영수가 되고 또 다른 관계에선 은희가 되기도 한다는 것. 심지어 하나의 관계 안에서 영수와 은희의 시절을 번갈아 겪기도 한다는 것. 그러니 사랑의 퍼즐은 모순인 듯 공평하고, 진부한 듯 신비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