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과 열정 사이]
[냉정과 열정 사이] 할리우드 엔딩이 아니어도 괜찮아
2007-10-26
글 : 김은형 (한겨레 esc 팀장)
할리우드적이지도 반할리우드적이지도 않은 작은 뚝심의 영화 <원스>

문득 할리우드라는 단어가 극장보다 일상에 더 밀착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극적인 반전과 해피엔딩이라는 할리우드의 보통명사적 특징을 걸러서 본다면 말이다. 지금은 찌질하지만 언젠간 보란 듯이 성공하겠어라는 순수한(순진한?) 개인적 열망에서부터 최근 부동산 투자, 주식 투자의 광풍에 이르기까지 사실 따지고 보면 모두가 ‘할리우드 엔딩’을 향한 치열한, 또는 안쓰러운 몸부림 아니겠는가.

하지만 나처럼 지적이면서 냉철한 사람들은 할리우드적 욕망이 가진 무모함과 위험성을 익히 알기 때문에 후배나 동료들의 할리우드적 꿈과 희망을 깨는 데 최선을 다한다. “네 여자친구가 진짜 널 좋아한다고 생각해? 월급 통장 보여주면 당장 도망갈걸”이라거나 “어차피 좀 있으면 회사 잘리고 공공근로사업에 나가게 될 텐데 뭘 그렇게 열심히 일해”라는 등 지혜로운 조언을 해주면서 말이다.

그래서 인생의 정답이 할리우드 엔딩에 대한 냉소에 있는가 하면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사랑은 영원하지 않고, 열심히 일해도 성공하기는 힘들며 원하는 후보가 대통령이 될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그렇다고 진정한 사랑은 없다거나 가족은 ‘불 쉿’이라거나, 성공은 역겨운 허상일 뿐이라고 단정지으며 방어막 50겹을 쌓는 것도 사는 데 별 도움 안 되긴 마찬가지다.

<원스>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세상을 너무 할리우드적인 것과 반할리우드적인 것으로 갈라서 고개를 양쪽으로 돌리며 살아온 건 아닐까. 물론 가난한 제작비로만 따지면 <원스>는 반할리우드적인 인디영화다. 하지만 <원스>는 할리우드영화처럼 허장성세를 부리지도 않으면서도 ‘어차피 안 되게 돼 있어’라고 징징거리지도 않는다. 다만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 곁에 있는 것, 하고 싶은 것에 조용히 집중하고 묵묵히 걸어간다.

웃기는 이야기지만 그렇기 때문에 <원스>를 따라가는 건 나에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동안 할리우드적 세계와 반할리우드적 세계라는 이분법적 세계관에 찌들어 살아온 탓이다. 사실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아름다운 음악에 감동받으며 그 정직하고 순수한 영화적 리듬을 따라가기보다는 내내 할리우드적 기대와 반할리우드적 근심으로 전전긍긍했다. 약에 취한 찌질이가 남자의 기타가방 속 돈을 훔쳐갔을 때 그것이 뭔가 이 영화의 대단한 복선이 될 거라 걱정했고, 여자의 집에 가서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게다가 난데없이 건너뛴 것 같은 장면에서 남자가 “정말 결혼했냐”고 말했을 때 둘의 사랑이 이뤄지지 않을까 불안했고, 대여료가 엄청나게 비싼 녹음 스튜디오에서 태도 불량인 엔지니어가 등장했을 때 주인공 남자가 ‘어차피 녹음, 음반 발매 이딴 건 다 무의미해’라며 스튜디오를 뛰쳐나올까 초조했다. 심지어 스튜디오 녹음을 마치고 녹음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트렁크에까지 꾸역꾸역 밴드를 태우고 낡은 벤츠가 떠났을 때 이 차가 뒤집혀서 모든 게 다 끝나버리는 게 아닐까라는 걱정까지 했더랬다. 시쳇말로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거다. 젠장!

하지만 내가 했던 반할리우드적 우려는 영화에서 현실이 되지 않았고 당연히도 할리우드적인 소망- 두 주인공은 사랑으로 맺어지며 음반은 날개 돋친 듯 팔린다- 역시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닌 결말은 또 아니다. 두 주인공의 삶은 서로를 만나기 전과는 확실하게 달라졌으니까.

누구나 할리우드 엔딩을 바라지만 그런 엔딩은 찾아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엔딩이 없더라도 인생의 빛나는 순간까지 없는 건 아니다. <원스>에서 피로와 허기와 목마름의 시간을 마치고 달려간 바닷가에서의 짧은 휴식이 아마도 그렇게 빛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두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그런 순간들이 삶에서 조금 다른 선택, 조금 더 현명한 선택을 하게끔 이끄는 용기가 되는 것 같다. 인생의 극적 반전은 이뤄지지 않더라도 삶은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하나의 모양새를 갖춰나가는 것이다.

마지막 연재글을 쓰면서도 어떤 의미에서 ‘할리우드 엔딩’을 기대했던 것 같다. 내 글을 보며 ‘이런 쓰레기가’라고 개탄했던 독자도 눈물을 흘릴 정도로 한방의 감동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역시나 할리우드 엔딩은 없다(그것도 실력이 돼야 한다는 --;;). 하지만 오랫동안 연재를 하면서 빛났던 순간이 짧게나마 있었을 거라고 자위하련다. 모두 건강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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