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있습니다.)
영화의 중반까지는 시선을 뗄 수 없을 만큼 탄력적인 이야기가 전개됐다. 의문의 죽음, 내의원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과학수사와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단서들 그리고 죽음의 주위를 둘러싸고 모여드는 궁녀들의 비밀스러운 삶이 지닌 의문의 파편들. <궁녀>가 궁중 미스터리 스릴러를 표방하며 의욕적으로 그 베일을 벗었다. 최근 유행하는 공간(궁, 병원 등)을 중심으로 한 역사추리 혹은 역사기담의 연장선상에 있으면서 그 주체로 역사에서 배제되었던 타자들을 소환시킴으로써 영화 <궁녀>는 대중의 산뜻한 관심을 받기에 충분했다.
또한 권력을 중심으로 한 어전이 아니라 전문성의 영역인 궁녀들의 일상적 공간에 주목함으로써 전에는 몰랐던 궁의 은밀한 공간들이 드러났다. 카메라는 궁궐의 각 모서리와 숨은 방들과 지하를 누비며 미시적인 공간들을 조명했고, 더불어 조선시대 궁녀들의 일상과 권력관계를 발견하는 쾌감을 느낄 수 있었다. 사물들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던 사소함의 공간에 배치되어 있었다. 내의원 수방(繡房), 수라간의 집기들, 구중궁궐의 온갖 방과 창고의 열쇠들이 나열된 상궁들의 집무실, 궁녀들의 실제 거처의 소품들 등. 효과적인 공간 연출과 더불어 미스터리에 대한 단서들을 하나하나 곶감 내주듯 배치하며 영화는 중반까지 그렇게 참으로 씩씩하게 전개된다, 주저함이 없다.
소재와 공간 등 참신한 시작
‘살고 싶으면 입 다물라’는 카피와 입에 베일을 드리우고 있는 궁녀들이 도열한 이미지를 통해 영화는 호기심 앞에 관객을 불러들인다. 이러한 전략은 어느 정도 성공했다. 다양한 장르의 혼종 장르를 표방한 영화답게 초반의 몰입도는 상당했다. 로맨스가 없다는 것을 미처 눈치채지도 못할 정도다. 한정된 공간에서 전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지루하지 않게끔 서사는 탄력적이었고 미스터리에 다가가는 접근 방식은 스피디했다. 이러한 몰입을 깔끔하게 이끌어가는 견인차가 내의녀 천령 역의 당찬 배우 박진희라는 점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합리적 사고의 영역이 비합리적인 원한의 영역으로 이행될 때 나타난다. 더 정확히 말해보자. 이는 미스터리에서 호러로의 장르 이행에서 나타나는 문제가 아니라, 관객이 품은 기대지평에 대한 위반의 지점에서 나타나는 문제다.
장르영화를 보러오는 관객은 그 장르에 대한 심리적 관습의 틀을 가지고 있다. 로맨틱코미디를 보러 오는 관객과 하드고어슬래시무비를 보러 오는 관객의 기대지평과 심리적 방어기제가 같을 수는 없다. 궁녀들이 나오는 미스터리 사극을 기대하고 온 관객이 불편해하는 점이 바로 이 지점에서다. 한순간 영화는 눈뜨고 보기 어려운 핏빛 잔혹극으로, 귀신이 등장하는 호러물로 그 질이 바뀌어버린다. 초반의 담백 깔끔한 맛이 갑자기 익숙한 원한의 질퍽한 정서로 바뀌는 것, 너그럽게 생각하면 이 또한 서사가 설득력이 있을 때 이해 가능한 문제다.
그러나 문제는 그 지점에서 관객이 상당한 불편함을 느꼈다는 점이다. <궁녀>의 일반시사회 도중 한 관객이 실신했다는 말을 들었다. 광고 카피의 ‘입 다물라’는 표현은 마치 서사에 반전이 있을 듯한, 이 영화가 대단한 진실을 은폐한 미스터리일 듯한 기대감을 준다. 개봉 이전의 광고카피, 포스터 이미지 등은 영화에 대한 관객의 상상적 심상과 기대를 구성한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함구로 영화의 본질을 왜곡할 것이 아니라 영화 장르의 당혹스러운 반전에 대해 오히려 입을 열어야 한다. 장르 전이가 불가결했다면 왜 그런지에 대해 관객과 공유하는 장이 필요하다. 이러한 시도야말로 이 야심찬 장르영화의 미덕이 예기치 않은 불편함에 휘발되어버리지 않게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선 몇 장면에 주목해야 한다.
진실의 문자 vs 욕망의 문자
첫 번째 의문의 장면이 있다. 월령의 죽음을 둘러싼 배후를 조사하던 감찰상궁(김성령)이 그녀와 한방을 쓰던 수방궁녀 옥진(임정은)에게 월령에 대해 묻는다. 벙어리인 옥진은 숯으로 종이에 사각사각 글씨를 써서 건넨다. 질문과 옥진의 답변은 두번 오간다. 영화 초반의 긴장감을 유지하던 미스터리의 비밀이 오가는 장면일 수도 있지만, 관객은 옥진이 무엇을 쓰는지 감찰상궁이 어디까지 진실에 근접했는지 알 수 없다. 그 와중에 손에 닿지 않는 진실을 잡기 위해 내의녀 천령은 궁궐의 여기저기를 뛰어다닌다. 다른 한 장면을 보자. ‘모과를 던져주기에 예쁜 패옥을 보냈네, 보답이 아니라 영원한 사랑을 위해서라오’(投我以木瓜 報之以瓊(王+居) 匪報也 永以爲好也). 이 시구는 옥진의 신체에 참혹한 방식으로 새겨진다. 이 두 장면에서 수방궁녀 옥진의 ‘쓰기’는 그 매재를 달리하면서 각각 영화의 비밀에 다가가는 방식이 된다. 하나는 종이에, 하나는 자신의 육신에. 하나는 공적 영역에 진실을 말하는 방식으로, 다른 하나는 사적 육체에 욕망을 새기는 방식으로.
관건은 이 영화가 ‘진실의 문자’는 은폐하면서 옥진의 몸에 잔혹하게 새겨진 ‘욕망의 문자’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이 점이 중요하다. 미스터리에서 호러로의 이행에 대한 단서가 되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이 두 장면은 영화 초반에 은폐된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합리성을 표방하며 달려가던 영화가(천령이 귀신을 보았다는 내의원 견습궁녀에게 ‘내의녀가 귀신이 무어야?’라고 물었던 것을 상기해보자), 왜 갑자기 원한 맺힌 초자연적 영역으로 넘어갔는가의 문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의 메시지는 전문직 여성들이 합리적으로 구축해가는 체계 내부에서 발생한 미스터리에 대한 진실 규명에 있지 않고 그녀들의 폐쇄된 공간에 쌓인 욕망과 원한의 억압적 모순을 드러내는 데 있다. 궁녀들이 사는 구중궁궐 공간은 합리의 이성적 빛이 투명하게 비추는 곳이 아니라, 어둡고 침침하며 서서히 미쳐 돌아가는 광기의 공간들이다. 궁녀들의 공간은 대개가 건물 지하이거나 감춰진 창고 등의 하강적 공간이다. 벼락처럼 떨어지는 임금의 승은을 입지 않는 한 이러한 위계에서 상승할 수 있는 방도란 없다. 그녀들은 모두 전문직 여성이기 이전에 왕의 여자이며 죽을 권리조차 없는 타자들이었다. 이들의 억압된 욕망과 한을 해소할 수 있는 방식이란, ‘쥐부리글려’ 장면에서 묘사되었듯이 애써 이를 덮고 누르는 방식일 수 없다. 영화가 이용하는 해결방식은 바로 자매애이다.
궁녀들의 억압된 욕망을 쫓다
체계 밖의 삶을 살던 궁녀의 영역은 반공반사(半公半私)의 영역이었다. 결혼과 가족제도라는 봉건적 윤리와 관습의 힘이 강한 사적 공간에 내몰렸던 일반 여성들과는 달리 왕비의 여관(女官)이라 할 수 있는 후궁, 궁녀와 같은 여성들은 공적인 영역에서 능력을 발휘했다. 영화는 그러나 이러한 궁녀들의 공적 영역보다는 사적 영역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 그들의 일상적 삶의 세부에 방점을 찍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욕망과 억압에 주목했다는 말이다.
영화에서 궁녀 출신으로서 유일하게 공간적 상승을 보여준 사람은 희빈(윤세아)뿐이다. 대비와 중전들의 알력다툼의 긴장 속에서 히스테릭하고도 불안한 성격으로 형상화된 희빈은 결국 중전이 죽자 왕손을 안고 왕을 알현하러 올라간다. 그녀는 왕과 관련된 금빛 욕망의 빛에 의탁하지 않았다. 왕의 남근과 권력을 이용하여 신분상승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죽은 원령이 갖고 있던 황금빛 호박 노리개는 왕족의 상징물이며, 옥진이 몸에 수놓는 실의 색은 금빛이다. 권력과 욕망을 향한 그러한 금빛은 대개 잔혹한 붉은빛으로 변질되게 마련이다. 월령은 살해되었고 노리개를 훔쳤던 정렬(전혜진)은 광기에 빠졌으며 옥진은 피로 금실을 물들였다. 희빈은 오로지 궁녀들의 힘으로 상승했다. 왕의 권위로서 하달된 권력을 분유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친언니였던 월령의 대리출산과 기타 궁녀들의 연대로 그곳에 올라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권력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그녀가 택한 방식이 바로 자매애였다. 공들여 배치된 모성애에 대한 단서는 오히려 불필요했다.
천령을 자신의 어의녀로 삼은 뒤 다른 지밀상궁들과 함께 신체(손)에 그들만의 비밀결사의 흔적을 새겨놓고는 피를 나누는 방식. 오로지 아래에서 상승하는 방식이란 이러한 궁녀들 사이의 피로 물든 자매애로서만 가능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승이 죽어서도 구천을 맴도는 궁녀들의 원한을 풀어줄 것인가. 눈물과 히스테리로 점철되었던 희빈과 그녀의 자매들의 삶을 뒤바꿀 것인가. 영화는 그에 대해 답하지 않고 수겹의 궁문을 닫아버린다. 여전히 궁녀들은 그 안에 갇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