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와 남자가 있다. 여자는 피아노 앞에, 남자는 그 옆 조그만 보조 의자에. 두 사람이 함께 만드는 최초의 음악은, 남자가 짚어주고 여자가 알아듣는 이국의 언어는 다음과 같다. 다다다다 다다다다…. 남자의 ‘다’는 다 다른데 여자는 그 ‘다’가 어떤 ‘다’인지 안다. 소리를 좇는 여자의 표정엔 꾸밈이 없다. 그녀가 건반을 짚기 전에 하는 일은 하나다. 남자의 음(音)을 집중해 듣는 것이다. 그녀는 ‘잘 치는’ 사람이지만 그전에 ‘잘 듣는’ 사람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들의 노래가 무사히 끝날 것이라 예감한다. 연주를 듣고 있던 악기점 주인이 박수를 칠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함께. 마음보다 몸이 먼저, 그런 순간에 주어지는 쾌락을 고대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환호’가 없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없어도 좋을 더 많은 것들 역시 없다. 악기점 주인은 노래하는 남자와 여자를 딱 한번 쳐다본다. 그것도 잠깐, 노인 특유의 완고한 표정으로 흘깃. 나는 악기점 주인이 고개 드는 순간 이 영화가 좋아졌다. 그것은 피아노와 기타의 화음이 겹치는 순간뿐 아니라, 그들의 소리가 지금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보는’ 사람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이해란 ‘포옹’이 아닌 그런 ‘눈빛’ 안에서 이뤄지는 건지도 모른다고. 이들의 사랑이 악기에도 일일이 가격이 매겨지는 세속적인 공간에서 이뤄지는 담담한 찰나인 것처럼 말이다.
나는 <원스>가 표정에 관한 영화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노래 부르는 사람이 아닌 듣는 사람들에 관한. 귀 기울임에 대한 이야기. 영화는 ‘그녀는 어딨죠?’라고 묻는 여자를 비롯해 프로듀서, 남자의 생부, 아기, 파티에 모인 청자(聽者)들을 보여준다. 노래는 길고 표정은 짧다. 이들은 작게 웃고 적게 말한다. ‘와우’라고 말할 때조차 이들은 그 말이 붕 뜨지 않게 호흡을 지그시 누른다. 숨을 고르는 노력 때문에, 우리는 노래가 끝난 뒤에도 음악이 그들 몸을 떠나지 않았다는 걸 안다. 조연들의 얼굴에는 구름 낀 아일랜드 하늘과 어울리는 경건함이 깃들어 있다. 그것은 아름다운 음악에 대한 존중과 그 노래를 만든 사람에 대한 존중, 그리고 그것을 존중할 줄 아는 자기 자신에 대한 존경에서 빚어지는 표정이다. 그들은 음악을 설명하거나 과장하지 않는다. 다만 ‘네 음악을 좀더 듣고 싶구나’라거나 ‘한번 더 녹음하자’고 말한다. 무뚝뚝한 표정으로 대출 서류에 승인 도장을 쾅쾅 찍고, 한밤중 CD플레이어의 건전지를 사러 나간다.
남자는 듣는 사람이 없을 때만 자신이 작곡한 노래를 부른다. 그러나 영화가 끝날 즈음, 그의 음악을 듣는 사람은 늘어간다. 열광하는 관중이 아닌 경청하는 소수. 남자를 ‘알아봐주는’ 사람들. 그리고 그 옆에 여자가 있다. 남자라는 하나의 점은, 자신과 연결된 다른 점들을 만나 이해와 소통의 선(線)을 늘려간다. <원스>는 사랑에 관한 영화지만, 예술가 혹은 개인이라는 한점이 다른 점을 만나 선을 잇는 과정을 보여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소통에 대한 환상을 주지 않으면서 소통을 믿게 하는 힘. 영원이 아닌 순간이지만, 짧기 때문에 더 소중한 한때. 감독은 삶의 한 부분을 지나치게 강조하지 않는다. 노래 듣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얼굴은, 그 표정의 ‘스침’은 주인공의 노래만큼 위안을 준다. 그 ‘얼굴’들 때문에 우리는 ‘지겹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타인을 만나고, 기타를 버리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살면서 우리가 겪는 사랑, 감동, 기쁨 역시 마찬가지리라. 영화가 끝난 뒤, ‘데일림플’이란 사람의 글귀가 떠올랐다. 그는 베르메르의 그림 <우유 따르는 하녀>를 보며 우유의 소박한 흐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궤적이 얼마나 우아한지 설명한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의 일부가 ‘일시적’인 것에서 오는 거란 것도 간과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의 삶에서 베르메르적 순간들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적어도 간헐적으로라도 평온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 뒤 한마디 덧붙인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영화는 여자가 창밖을 바라보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나는 영화관을 나서며 작게 중얼거린다. 삶의 아름다운 순간은 짧고, 쉽게 지나가버린다고. 하지만 그것은 얼마간 존재하며, 그것으로 충분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