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뉴스]
[외신기자클럽] 한국영화의 시조
2007-10-31
글 : 아드리앙 공보 (포지티브 기자. 영화평론가)
나운규 감독의 사망 70주년을 맞아 <아리랑>을 다시 생각하다
<아리랑>

챨리 채플린 사망 50주년 기념식을 치렀다. 놀라운 우연의 일치로 동시에 나운규 감독의 사망 70주년을 기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신상옥 감독이 기억난다. 동양의 카우보이 분위기를 풍기는 그는 이야기하는 모든 것이 비밀을 들추어 내는 것이라는 느낌을 주곤 했다. “두명의 감독이 내 어린 시절에 깊은 인상을 남겼는데, 채플린과 나운규였다”고 했다. 그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그는 <아리랑>을 본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명이었기에, 필자는 마치 사람들이 누군가가 바빌론의 공중 정원 산책을 이야기해주는 것에 귀기울이는 것처럼 귀를 기울이고 들었다.

나운규 감독은 1902년, 채플린보다 13년 뒤에 태어났다. 사진 속에서 감독이며 배우이기도 했던 이 두 사람은 똑같은 날렵한 우아함을 뽐내고 있었다. 그의 첫 작품 <아리랑>은 1926년 제작됐다. 한국은 1919년부터 영화를 촬영하기 시작했지만 <아리랑>은 주춧돌 같은 작품으로 남아 있다. 당시의 기사들이 증언한다. “서양영화에서 나타난 그들의 환경과 생활 방도가 다르기 때문에… (중략) 지금까지 본 그 영화 중 희로애락은 그이들의 것이오 우리만의 희로애락은 아니었다. (중략) 역에 있어 <아리랑>이 2차 상연을 하였으되 관객이 배전의 열광을 한 것도 그러한 이유가 될 것이다.”(<별건곤>, 1927년 3월호) 당대 관객의 눈에 나운규 감독은 서구의 기술을 순수하게 한국적인 정서의 방향성으로 전환시켰다. 그것은 아마도 전설의 문제가 아니다. 시나리오는 현재의 한국영화와 이상한 일치를 보여준다. 주인공은 정신적 혼란을 겪고 있다. 추석 당일 그는 여동생을 욕보이려 했던 일본 경찰을 낫으로 죽인다. 그리고 돌연 정신을 되찾고, 마을 사람들은 그가 손목에 수갑을 채우고 아리랑 고개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된다. 강간, 광기, 충동적인 살인 행위, 어찌할 바를 모르는 주인공의 방황 등의 이 멜로드라마의 기본적 뼈대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친숙하다. 어떤 의미에서는 박찬욱 감독이 이런 요소로 이루어진 것을 찍었음직도 하다. 단지 불안정한 이 흔적과 당대 평론들이 나운규 감독의 예술적 이바지가 상상적인 체계에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끔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형상은 폭넓게 신화에 속한다.

1937년 한국영화의 아버지는 만 35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채플린은 그의 마지막 무성영화인 <모던 타임즈>를 찍은 직후였다. 나운규 감독은 영원히 귀에 들리지 않게 남아 있을 것이지만, 좀더 독특한 방법으로… 눈에도 띄지 않게 되었다. <펠리니-로마>에서 로마시대의 벽화들이 공기에 노출되어 사라져버리는 것처럼, 전쟁은 한국 고전시대의 작품들과 <아리랑>이라는 걸작을 앗아갔다. 여기저기서 그 시대에 관한 조각들을 찾게 되지만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운규 감독이 채플린의 <황금광 시대>의 빵조각으로 춤을 추는 장면과 유사한 장면을 찍었을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신상옥 감독의 시선은 남아 있지만 <아리랑>이 그에게 어린 시절 추억의 부드러운 색조로 채색되어 나타나지는 않았는지?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필자도 여기에서 신 감독이 아주 오래전에 이야기해준 것을 미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보이지 않는 작품의 위대한 감독 나운규는 영화사에서 유일한 경우에 해당한다. 네 세대가 롤러스케이트를 탄 채플린과 함께 왈츠를 추며 몸이 함께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이 기간 동안 나운규 감독의 부재는 진짜 작품만큼이나 구체적인 신화적 뿌리가 솟았다. 그때부터 한국 무성영화는 중국의 시초로 뿌리내린 초월적 의문부호인 중국의 신화적인 하왕조와 흡사하다. 나운규는 채플린처럼 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는 황제가 됐다. 또는 그것보다 한국영화의 단군이 되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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