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리포트]
[현지보고] 아니 어떻게 그들을 한자리에 모았을까?
2007-10-30
글 : 김혜리
중량급 여배우들의 앙상블 <이브닝> 뉴욕 시사 현장

지난 5월31일 뉴욕. 영화 <이브닝>의 시사회에 참석하기 위해 포커스 피처스(Focus Features) 영화사가 마련한 승합차에 올라탄 각국 기자들의 수다는 단연 캐스팅에 집중됐다. “아니 어떻게 이 멤버를 모았대요?” “글렌 클로즈는 감독이 이스트반 자보의 <미팅 비너스>를 촬영했던 인연으로 섭외했을 테고….” <이브닝> 포스터에는 바네사 레드그레이브, 메릴 스트립, 글렌 클로즈, 토니 콜레트, 나타샤 리처드슨, 그리고 클레어 데인즈의 이름이 올라 있다. 흔히 쓰는 표현대로 한 비행기에 태웠다가 사고가 나면 크게 낭패볼 명단이다. 수잔 미노트의 베스트셀러 동명 소설을 또 한명의 스타 작가 마이클 커닝엄(<세월> <세상 끝의 집>)이 공동 각색했다는 사실도, 이스트반 자보, 쥬세페 토르나토레 등의 영화에서 촬영감독으로 명성을 날렸던 라요스 콜타이의 연출도, 휘황한 캐스팅에 견주면 미지근한 뉴스였다. 시사회장에 준비된 보도자료는 빠른 속도로 동이 났다.

영화 <이브닝>은, 침대에 누워 임종을 기다리는 노부인 앤 로드(바네사 레드그레이브)의 회상과 환상을 따라간다. 출렁이는 의식의 여정 사이사이, 죽어가는 어머니를 지켜보는 두딸 콘스탄스(나타샤 리처드슨)와 니나(토니 콜레트)의 현실이 끼어든다. 앤의 넋이 끝없이 회귀하는 장소는, 50년 전 여름 바닷가 저택에서 열린 단짝 친구 라일라 위텐본(메이미 검머)의 결혼식이다. 보수적인 집안 공기에 은밀히 반발하는 라일라와 버디(휴 댄시) 위텐본 남매는, 가수를 꿈꾸는 독립적인 성격의 앤을 마음 깊이 의지한다. 남매가 사랑하는 또 한명의 친구는 가정부의 아들로 남매와 같이 자라 의사가 된 해리스 아든(패트릭 윌슨). 앤과 해리스는 소개받은 순간부터 강렬히 끌린다. 그러나 예식을 앞둔 불안한 공기 속에서 앤은, 열다섯살부터 해리스를 짝사랑하던 라일라가 내키지 않는 결혼에 응했음을 알게 된다. 한편 심약한 버디는 해리스와 앤이 가까워지자, 둘 중 누구를 질투해야 할지 모르는 마음의 고통을 고백한다. 그리고 이어진 참담한 재앙은 앤의 인생 행로를 영영 바꿔놓는다. 세월이 지나 주부가 된 앤은 멀어져가는 꿈과 자라나는 딸들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마이클 커닝엄의 손끝으로 각색된 비극적 멜로드라마

소설 <이브닝>은 각색하기 난처한 원작이다. 현실과 내면의 리얼리티가 무시로 교차하고 시제가 오락가락하며, 인물의 대사는 따옴표를 쓰지 않고 대뜸 시작된다. 시사 이튿날 열린 배우와 제작진의 라운드 테이블 인터뷰는 원작자와 공동 각색을 맡은 마이클 커닝엄부터 진행됐다. “좋은 소설일수록 다른 장르로 각색하기가 어렵다. 오히려 유치한 소설이라면 각색이 쉬울 거다”라며 선수를 친 커닝엄은 아무래도 영화에 단단히 재미를 붙인 듯했다. 본인의 퓰리처상 수상작 <세월>을 각색자 데이비드 헤어에게 맡겨 <디 아워스>(2002)를 탄생시켰던 커닝엄은, 다른 소설 <세상 끝의 집>을 손수 각색해 영화화했고, <이브닝>에서는 남의 소설을 각색하고 제작까지 손을 뻗친 참이다. <이브닝>의 각색에서 가장 큰 모험은 원작에서 앤의 사랑을 가로막은 해리스의 임신한 약혼녀가 사라지고, 대신 주변인물 버디가 성 정체성이 모호한 캐릭터로 바뀌어 스토리의 키를 쥐게 됐다는 점. 버디와 해리스, 앤의 트라이앵글은 커닝엄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남녀 삼인조(threesome)- 삼각관계와 다른- 구성 그대로다. 커닝엄의 취향이 반영된 게 분명한 이 선택에 원작자는 이견이 없었을까? 커닝엄의 대답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싸우진 않았지만 의견 차이가 있긴 했다. 나는 버디를 중요한 캐릭터로 키우면 좀더 극적인 사건이 벌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망설이는 인물이야말로 흥미로운 드라마의 기폭제라고 그는 강조했다. 새로 창조되다시피한 버디를 연기한 배우 휴 댄시는 덧붙였다. “섹슈얼리티는 극중 배경인 50년 전만 해도 낯선 개념이었다. 버디는 성 정체성을 포함해 총체적 혼돈에 빠져 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매혹된다. 자신만 빼고 모든 타인이 되고 싶어한다. 남들에게 매달려 그들의 세계로 데리고 가주길 바란다.” 아무튼 각색 결과 <이브닝>은 낭만적이고 고풍스러운 연애 비극과 가족영화 사이에 자리한 드라마가 됐다. 라일라와 해리스의 관계는 <폭풍의 언덕>의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구도고, 청천벽력 같은 비극과 그 여운은 더글러스 서크의 멜로드라마와 <위대한 개츠비>를 떠올리게 만든다. <이브닝>이 <디 아워스>풍의 모던한 여성의 심리극일 거라는 예상은 빗나갔다.

메릴 스트립 모녀와 바네사 레드그레이브 모녀의 출연

기자들의 최대 관심사인 캐스팅 우여곡절은 콜타이 감독이 대답해주었다. “바네사 레드그레이브, 토니 콜레트, 클레어 데인즈가 먼저 물망에 올랐다. 원작자가 특히 클레어 데인즈를 마음에 두었다. 난 바네사 레드그레이브를 행여 잃을까 무척 겁이 났는데, 다행히 그녀가 확신을 갖고 기다려주었다. 런던의 호텔에서 처음 만난 바네사는 누이처럼 내 손을 잡고 내 전작 <페이틀리스>를 칭찬했다. 같은 호텔에서 클레어도 만나 <페이틀리스>를 보여주었다. 메이미 검머는 그녀가 메릴 스트립의 딸이라는 것을 미처 모르고 선택했다. 결국 에이전트를 통하지 않고 메릴에게도 스크립트가 전해졌고 그녀도 합류했다. 잘 보면 메이미의 외모는 극중 어머니인 글렌 클로즈와도 꽤 닮았다. 글렌 클로즈는 마지막으로 합류했다. 이런 캐스팅이면 영화 7편은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카메라맨 출신 감독이 심혈을 기울여 찍은 <이브닝>의 화면은 예쁜 프로덕션디자인과 아름다운 풍광의 도움으로 그림엽서가 부럽지 않다. 그럼에도 영화 최고의 장관은 메릴 스트립과 바네사 레드그레이브가 침대에 마주 보고 누워 눈빛을 나누는 순간이다. 배우들의 이름값은 접어두고, 찬찬히 들여다보면 영화 <이브닝> 안에는 모녀 관계의 복잡한 그물망이 있다(도표를 그릴 준비를 하시라). 바네사 레드그레이브는 극중 딸 콘스탄스인 나타샤 리처드슨과 실제 모녀다. 라일라 역의 메이미 검머는, 영화 말미의 나이든 라일라로 잠시 등장하는 메릴 스트립의 친딸이다. 극중 라일라의 어머니는 글렌 클로즈. 기억력 좋은 관객은 메릴 스트립과 클레어 데인즈가 <디 아워스>에서 모녀로 출연했다는 사실을 떠올릴 것이다. 게다가 바네사 레드그레이브는 <디 아워스>의 모티브가 된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각색한 동명영화에서 클라리사 댈러웨이로 분한 바 있다. 서서히 생명의 기운이 흘러나가는 어머니를 지켜보는 딸 콘스탄스로 분한 나타샤 리처드슨은 마이클 커닝엄의 제의를 받자마자 어머니 레드그레이브와 자신만의 장면을 써달라고 부탁했다고 기자들 앞에서 스스럼없이 회상했다. “아버지(토니 리처드슨)가 돌아가셨을 당시 일이 다시 밀려왔다. 엄마랑 따로 연기를 의논할 필요는 없었다. 그 기억의 이미지는 우리에게 너무도 강력하니까. 콘스탄스와 니나 자매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애증도 친숙했다. 언니는 나보다 날씬했고 나보다 먼저 엄마랑 영화를 찍었다.” 그러나 나타샤 리처드슨이 가족의 유명세를 처음부터 이처럼 담담하게 다뤘던 것은 아니다. 영국 연극영화계의 로열 패밀리로 통하는 리처드슨-레드그레이브 가문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립하기까지 그녀는 긴 시간의 단련을 거쳤다(리처드슨은 현재 남편 리암 니슨과 뉴욕으로 이주해 살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막 쇼 비즈니스에 발을 디딘 스물네살의 메이미 검머에게 어머니 메릴 스트립의 입지는 현재진행형의 억압일 터다. 뉴욕 연극 무대에서 그녀가 거두고 있는 소기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검머를 맞는 세상의 호기심은 첫째가 “얼마나 엄마를 닮았나?”이고 그 다음은 “어디 얼마나 잘하는지 보자”다. 뺨을 붉힌 검머가 기자들 앞에 나타나자, 아무도 티내지 않았지만 방 안의 모두가 엄마를 쏙 뺀 그녀의 콧날을 흘끔거렸다. 자, 누가 악역을 할 것인가. 강단 센 독일 기자가 입을 열었다. “어머니와 공연한 기분이 어때요?” 곧장 대답이 돌아왔다. “엄마랑 ‘같이 연기’한 장면은 없어요.” 그녀는 매우 예민한 음색을 지니고 있었다. 기자는 같은 작품에 출연한 소감이 어떠냐고 질문을 바꿨고 평이한 대화가 이어졌다. 메릴 스트립의 감동적인 애드리브가 언급되자, 동석한 노련한 클레어 데인즈가 동료 대신 장난스럽게 받아쳤다. “네에, 그분은 천재 맞아요.” 하지만 메이미 검머는 그것이 유전된 열정이건 환경이건 간에 배우 어머니가 있는 가정에서 철들기 전부터 연기를 호흡하며 자랐음을 추억했다. “네살 무렵 화장실을 제 분장실로 꾸미고 식구들 앞에서 연극을 했어요. 공연이 끝나면 ‘분장실’로 사인받으러 오라고 공지했죠. 물론 다들 제 말대로 따랐고요. (웃음)” 사실 메이미 검머는 4살의 마음을 가진 24살의 여자로 분한 1인극으로 호평을 받은 신예다. 여기, 그녀에게 전한 선배 나타샤 리처드슨의 조언이 있다. “나 역시 4살 때 아버지 영화로 데뷔했다. 메이미와 겹치는 출연 분량이 없어서 대화할 기회가 없었지만, 그녀가 지금 힘들 거라는 것은 잘 안다. 하지만 그저 계속 일을 하고 또 일을 하면 언젠가는 사람들의 반응이 달라지는 날이 온다. 영국에서 나는 누구의 딸이었지만, 지금 이곳 뉴욕에서 내 기사가 나면 그건 배우 리처드슨의 일 이야기다.” 인터뷰에 참석하지 않았으나, 바네사 레드그레이브와 메릴 스트립은 내내 그날 그 자리에 있었다. 세대를 가로지르는 여자들의 인생유전을 영화로 찍고 싶은 누군가가, 이 두쌍의 배우 모녀에 대한 시나리오를 쓴다면 어떨까? 그런 몽상 속에 <이브닝>을 위한 짧은 여행은 저물어갔다(<이브닝>은 11월21일 한국 개봉한다).

영화에 사적인 요소가 들어오는 순간이 좋다

‘앤 로드’ 역의 클레어 데인즈

클레어 데인즈는 뉴욕에서 나고 자랐다. 1994년 TV시리즈 <나의 이른바 인생>에서 조숙한 연기로 주목받은 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등의 작품에서 각광받은 그녀는 말하자면 MTV 세대의 스칼렛 요한슨 같은 존재였다. 이제 아이콘으로서 매력은 시들었지만 데인즈는 올 들어 <스타더스트> <이브닝> 등 부지런히 개봉작을 내고 있다. 방울만한 회녹색 눈동자를 굴리며 인터뷰 룸에 들어선 그녀는 양해를 구하며 화장실부터 다녀왔다. 그리고 “설사병 났다고 쓰는 건 아니죠?”라고 명랑하게 말문을 열었다. 지적 호기심과 자부심이 강한 이 젊은 여배우는 같은 값이면 좀더 분석적인 단어를 선호했다.

-영화에서 앤과 라일라, 두 여인의 우정이 각별하고 인상적이다.
=앤과 라일라는 다른 계급에 속하지만, 학교에서 만나 그런 점을 의식하지 못한 채 가까워진 친구다. 천성적으로 잘 맞는 거다. 해리스라는 남자에게 똑같이 이끌린 것도 그래서 아닐까.

-단짝을 연기한 메이미 검머와 가족이나 모녀관계에 대한 생각도 많이 공유했나.
=그보다 아이포드를 공유했다. (웃음) 현장에서는 스크래블 게임(십자말 퍼즐)도 많이 했다. 작가인 마이클 커닝엄이 당연히 휩쓸었다. 그는 한판에 세번이나 7자짜리 단어를 내놓는 만행도 저질렀다!

-동일 인물을 연기한 바네사 레드그레이브와 일관성을 논의하지 않았나.
=한 시간쯤 함께 연습했다. 극중에서 나이 든 앤은 사람을 잘 알아보지도 못하는 위독하고 비정상적인 상태이기 때문에 젊은 날을 연기하는 입장에서 비교적 해석의 자유가 컸다.

-소설 <이브닝>과 영화 <이브닝>의 큰 차이 중 하나는 글로만 묘사됐던 앤의 노래를 듣고 춤을 볼 수 있다는 점인데.
=노래보다는 춤이 편하다. 4살 때 춤을 처음 배웠고 3년 전부터 좀더 심각하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훌륭한 안무가를 만나 뉴욕에서 실험 댄스를 공연하기도 했다. 무용 공연과 연기는 그리 다르지 않다. 몸을 움직이는 작업에서 굉장한 즐거움을 느낀다.

-우는 딸을 달래며 직접 부르는 노래도 무척 아름다웠다.
=실은 메이미가 나보다 훨씬 예쁜 목소리를 갖고 있다. 아이들을 달랜 노래는 우리 엄마가 불러줬던 노래다. 드디어 우리 엄마 모습이 내 영화에 반영됐다! 영화에 그처럼 사적인 요소가 살짝 숨어들어오는 순간이 좋다. 특히 여배우들은 사생활에 벽을 쌓고 지내는 일이 많아서 그런 순간이 한층 귀하게 느껴진다.

-사람들이 모르는 당신의 일면이 있다면.
=음, 글쎄? 열한 번째 발가락?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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