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이하나] 긍정지수 1000%의 자연산 말괄량이
2007-11-01
글 : 강병진
사진 : 이혜정
<식객>의 이하나

“다음부터 미니스커트는 안 입을까봐요.” 검은색 미니스커트를 입고 카메라 앞에 선 그녀가 불편해 보였다. 사실 지켜보는 입장도 불편하긴 마찬가지다. 두편의 드라마에 걸쳐 갈 데까지 간 백수아가씨를 연기했던 이하나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옷은 트레이닝복이 아닐까. <연애시대>의 지호와 <메리대구 공방전>의 메리는 단벌 트레이닝복에도 기죽지 않았고 언니 옷을 훔쳐 입거나, 엄마가 커튼을 찢어 만들어준 옷을 입고도 당당한 여자였다. “평소에도 트레이닝복을 자주 입어요. 동네에서 가게 갈 때는 무릎이 나온 옷도 그냥 입고 다녀요. 그런데 이왕이면 예쁜 옷도 어울려 보이면 좋을 텐데…. (웃음)” 하지만 그 두편의 드라마 덕에 그녀는 출근시간 이후의 동네 골목에서 서로 하품하며 마주칠 것 같은 이웃집 처자로 각인됐다. 하품을 가리던 손을 걷고 나면 서로를 격려하는 미소를 짓고 있을 것 같은 여자. 그 미소 덕에 동네에 사는 10년차 고시생도, 삼수를 넘어 사수를 넘보는 재수생도, 매일 아침 도서관으로 출근하는 취업준비생도 새로운 하루를 다짐하는 풍경. 그녀의 미소는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무도 우리를 희망적으로 보지 않지만 그래도 우리는 버티고 있잖아!!”(<메리대구 공방전> 중 메리의 대사)

그녀가 <식객>에서 연기한 진수도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인물이다. 은둔요리고수인 성찬을 세상 밖으로 이끄는 진수는 그의 우승을 위해 끊임없이 응원하고 기운을 북돋운다. 게다가 그녀는 엄연한 전문직 종사자라는 게 다를 뿐 지호와 메리가 가진 성격을 그대로 지녔다. 대구와 찜질방에 앉아 ‘죽음의 고스톱’을 치던 메리처럼 진수는 도박장 취재를 나가서도 “스리고에 피박에 따따블은 물론이고 개평까지 안 주는” 타짜의 면모를 숨기지 못하고, 먹을 것에 집중하느라 남자의 고백마저 듣지 못했던 지호처럼 처음 보는 남자 앞에서 왕성한 식욕을 자랑한다. 지호와 메리가 어느 날 영상의 세계에 매료되어 언니나 엄마의 돈을 훔쳐 카메라를 구입하고 아카데미를 등록했다면 분명 진수 같은 VJ가 되지 않았을까. 그녀가 나이가 들어 주부를 연기한다고 해도 지호와 메리의 성장사처럼 보일지도 모를 일이다. “캐릭터를 복제하는 건 경계했지만, 사실 진수도 예뻐 보일 필요가 없는 캐릭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정말 안 예쁘게 나오더라고요. (웃음) 친구들도 포스터를 보고는 이게 제일 잘 나온 사진 맞냐, 옛날 볼살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반가웠다고 그러고…. 그래도 안 예쁘게 나오는 게 싫지는 않았어요. (웃음)”

사실 이하나는 지난 2년 남짓한 시간 동안 예뻐 보일 틈이 없었던 배우다. 입 주변에 양념을 묻혀가며 음식을 씹어먹던 지호나 대낮의 공원에서 서로 피자를 먹겠다고 남자와 싸움질을 하던 메리를 그녀는 ‘엽기적’이라는 수식을 마다않고 예쁜 척 없이 연기했다. 그럼에도 뿔테안경 하나로 미운 척을 하는 다른 미운오리들보다 예뻐 보였다면 그녀에게 가득 찬 긍정의 기운 때문일 것이다. 준표가 “너는 그냥 여동생일 뿐”이라며 고백을 거절했을 때 지호는 아무렇지 않은 듯 그의 음식들을 가져와 비워냈고, 오디션에 떨어져 낙담한 메리는 “하드 하나 사먹고” 기운을 차렸다. 메리의 온갖 작태에 대구가 “당신은 정말 황인종의 수치”라고 모욕했을 때는 어떤가. 역시 그녀는 굳이 괘념치 않겠다는 투로 내뱉는다. “날 마음에 두지 말라니까. 꺼져!” 이하나 자신도 그녀들의 성격이 “엽기적이라고 할 만큼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성격”이라지만 자신에게도 비슷한 면은 있다고 한다. “저도 양반다리로 앉는 거 좋아하고, 아무 데나 잘 걸터앉거나 주저앉고 그래요. 하지만 그들을 연기하면서 대리만족을 느낀 게 더 많았어요. 언제나 무사태평, 무사안일, 막무가내인 친구들이다보니. (웃음)”

이하나 자신도 지호와 메리, 진수처럼 낙담한 채로만 버티고 사는 사람은 아니다. 다만 그녀들이 굳이 비운에 신경쓰지 않겠다는 태도를 가졌다면, 이하나는 자신을 돌이켜보고 반성하며 이겨내는 쪽이다. 가수지망생이었던 시절 기획사가 도산하면서 그녀의 꿈 역시 무너졌을 때, 그녀가 손에 잡은 건 ‘하드’가 아니라 ‘펜’이었다. “일단 내 근심이 뭔지를 자존심 다 버리고 정말 잔인할 정도로 써봐요. 그리고 그 이유가 무엇인지 꼬리에 꼬리를 이으면서 써나가다보면 해답이 나오더라고요.” 그녀는 인터뷰 전날에도 어느 영화의 캐스팅보드에서 떨어진 탓에 펜을 부여잡았다고 털어놨다. “일단 첫 문장은 ‘나는 지금 왜 한숨을 쉬는가’였어요. 그러고나서 이유를 써가다보니 역시 답이 나오더라고요. 애초에 현재 저의 능력으로는 넘볼 자리가 아니었던 거죠.” 요즘 그녀가 백지를 채우고 있는 고민은 지금까지 비슷한 캐릭터로만 일관해온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이다. 이렇게 그냥 반짝 하고 사라지는 건 아닌지. 혹시 그런 이유 때문에 자신이 이겨내지 못할 정도의 절망에 빠지는 건 아닌지. 마음 같아서는 “지호와 메리, 진수를 3자대면을 시켜놓고 어떤 변화들이 있는지”를 보고 싶지만, 우선은 지금과는 다른 여자들을 만나는 게 급선무란다. 하지만 트레이닝복을 벗은 그녀를 과연 마음 편히 바라볼 수 있을까. 그녀의 대답은 애써 걱정하지 말라는 투다. “관객을 진지하게 생각하게끔 만드는 인물을 연기하고 싶어요. 악역도 해보고 싶고요. 제가 그런 역에 맞는 목소리는 이미 준비해놨거든요. 이걸 언제쯤 개시할지 항상 고민이에요. 안 어울릴 것 같죠? 에이, 비장의 무기인 줄도 모르시면서….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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