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VD]
허리케인이 드러낸 미국의 비극, <제방이 무너졌을 때>
2007-11-02
글 : ibuti

레드 제플린이 불러서 유명해진 옛 블루스 <제방이 무너지면>은 1927년의 미시시피 대홍수를 읊은 노래다. 노래의 한 구절은 이렇다. ‘비가 쏟아져 제방이 무너지면 난 머물 곳이 없네. 만약 제방이 무너지면, 어머니, 피난해야 돼요.’ 100년도 지나지 않아 같은 일이 같은 장소에서 다시 벌어졌다. 2005년 8월29일,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빠져나가기가 무섭게 제방이 터지는 바람에 뉴올리언스의 80%는 물에 잠기게 된다. <제방이 무너지면>에서 제목을 딴 <제방이 무너졌을 때>는 폭풍과 홍수로 생명과 삶의 터전을 잃은 뉴올리언스 시민의 비극을 그린 다큐멘터리로, 대부분 사람들이 자연재해로 기억하고 있는 카트리나의 참상이 기실 사악한 인간들에 의해 저질러진 죄악임을 밝히고자 한다. 스파이크 리는 자기 목소리를 뒤로 접은 채, 170여명의 분노와 슬픔으로 가득 찬 증언을 빌려 책임을 회피하는 권력자를 관객이 심판하는 법정으로 불러내는 작업을 펼친다. 1927년 대홍수 때 백인 거주지의 침수를 우려해 고의로 제방을 터뜨렸다고 믿는 많은 수의 흑인은 이번에도 유사한 의문을 품고 있다. 그 진위 여부를 떠나 중요한 사실은 정부를 향한 불신이 그토록 엄청나다는 점이다. 주민의 70%가 흑인인 뉴올리언스는 미국에서 생활수준이 가장 낮은 대도시로 분류된다. 뉴올리언스의 시민들은 이번 사태에 직면해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전혀 보장받지 못한 원인을 그런 현실에서 찾는다. 무너진 제방은 1965년 이래 40년 동안 완공되지 못한 것이었고, 연방정부는 폭풍의 심각성이 예견되었음에도 적절한 대책을 취하지 않았거니와 도시가 물에 잠기고 며칠이 지나도 구호조치를 하지 않았으며, 전국 44개 주로 흩어진 100만명에 가까운 뉴올리언스 시민을 위한 방안도 마련하지 않았다. 그런데 뉴올리언스가 물에 잠겨 있던 그 시간, 대통령과 부통령 그리고 국무장관은 휴가, 낚시, 쇼핑, 공연, 테니스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한다. 카니예 웨스트가 가수의 생명을 걸고 언명했듯이 조지 부시 일당은 흑인들에 대해 상관하지 않는다. <제방이 무너졌을 때>는 흑인을 포함한 유색인종과 가난한 자에 대한 뿌리 깊은 차별의식이야말로 미국의 진짜 비극이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과거와 현실에 대한 신랄한 비판에 그치지 않고 재난의 여파와 미래를 우려한다. 재즈의 탄생지인 뉴올리언스는 오랜 세월에 걸쳐 풍부하고 생기 넘치는 문화가 흑인공동체 등을 통해 유지되어온 곳이다. 그러나 도시의 몰락은 구성원에게서 역사와 문화를 박탈하고야 말 것이다.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돌아와서도 살 곳을 찾지 못한 사람들은 주민의 귀환과 도시의 재건을 막으려고 누군가가 수작을 피운다고, 정치권과 결탁한 개발업자가 땅을 뺏으려 한다고 의심하기도 한다. 하긴 그게 아니라면 보험회사가 폐허를 보고도 한푼도 주지 않으려 애쓰고, 연방정부는 정부대로 (여전히 허술해 보이는) 새 제방을 만드는 데 인색할 다른 이유가 없지 않은가. <제방이 무너졌을 때>는 음모이론을 만들어내려는 영화가 아니라, 자기 나라의 문제를 직시하지 않는 정부를 향한 쓴소리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성난 여자는 “우리는 다른 정부가 필요하다”라고 말한다. 전쟁에 열심이고 가진 자만을 위해 존재하는 현 미국 정부에 신물이 난 스파이크 리가 에둘러 말하고자 했던 건 바로 그 말인지 모른다. 스파이크 리는 지금껏 만든 드라마를 훌쩍 뛰어넘어 마침내 자기 형제의 심장을 관통하는 데 성공했다. <제방이 무너졌을 때>의 DVD 출시는 의미가 크다. 극장개봉 근처에도 못 간 4시간짜리 다큐멘터리를 홈비디오로 만나는 게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3장으로 나온 미국판 DVD에 수록된 부록들을 보지 못하는 건 아쉽다. 영상과 소리는 HBO에서 제작한 작품답게 수준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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