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오 해저드>라는 이름으로 영화 <레지던트 이블>의 원작 게임이 오락실에서 인기를 끌 무렵, 나는 뭣도 모르고 재밌겠다며 동전을 넣고 총을 잡았다가 삼분 만에 총을 던지고 도망쳐서 주변의 비웃음을 샀다. 실제로 저런 세계에 던져졌다 하더라도 아마도 나는 역시 그런 선택을 했을 것이다. 도망치고 도망치고 또 도망치다가 혹시 총을 가졌다면 고통을 얼른 끊고자 스스로를 해치우든지 아니면 버둥거리다가 굶주린 그들의 손에 뜯어 먹히든지. 그것도 극 초반에 먹혀버린 이름도 없는 희생자 중 한명이었을 것이다. 요컨대 나는 저런 곳에서 살아남을 만한 투지가 없는 것이다.
벌써 3편째가 나온 영화 <레지던트 이블>에서는 더 많은 시간이 지난 만큼 황폐화도 가속되었다. 사람이 살 만한 땅은 별로 남아 있지 않고 사람 역시 별로 남아 있지 않다. 대신 등장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희생자이거나 혹은 희생되지 않으려 애쓰는 생존자이거나 하는 식으로 이 편과 저 편의 명확한 구분이 없었던 전편과 달리 <레지던트 이블>의 생존자들은 확연하게 두편으로 갈린다. 같이 살고자 하는 자들과 홀로 살고자 하는 자들, 즉 덜 독한 사람들과 더 독한 사람들로 나뉘는 것이다. 자기들끼리만 안전한 지하에 콕 처박혀 말로 세계를 구하겠답시고 대책회의를 여는 지도자들이나 박사는 말할 것도 없고, 초반에 등장한 사기꾼 무리들도 정말이지 독한 것들이다. 그들이 무전기를 가지고 한 ‘보이스 피싱’에 걸려든 것이 앨리스 같은 괴물이었기에 망정이지 클레어 일행 같은 순둥이들이 걸려들었다가는 빼도 박도 못하고 절멸이었을 것이다. 전력에 도움은커녕 짐만 되는 어린애나 나이든 여자를 보호하느라 전투할 수 있는 인력의 손실을 겪고야 마는 클레어 일행은 그런 축들이 보기에는 철없는 낭만주의자일 뿐이다.
<레지던트 이블>의 세계는 판타지이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 편하게 팝콘을 씹으며 사람들이 좀비에게 뜯어 먹혀 비명을 지르는 장면을 담담히 구경하지만, 이 세계는 ‘승자독식’이라는 악마가 지배하는 현실과 묘하게 닮아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처럼, <레지던트 이블> 안에서도 거짓말이나 배신 등이 나쁘다는 것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살아남는 것이 모든 것을 긍정하는 것이다. 앨리스를 속여 무기와 장비를 빼앗고 몸은 투견에게 뜯어 먹히도록 하여 재밋거리로 삼으려던 인간들처럼, 현실에서도 그런 인간들은 부지런히 번식한다. 현실에서 그들은 우리말을 할 줄 아는 조선족을 고용해서 법원이나 검찰청을 사칭하거나 멀쩡한 자식을 납치했다며 거짓말을 해서 보이스 피싱을 하고, 학비나 용돈이 부족한 대학생들을 꼬드겨 여행가자고 하라며 친구를 4박5일만 데려오라고 하는 식으로 어수룩한 인간들을 피라미드의 밑바닥에 쥐포처럼 납작하게 깔아두고, 심심한 노인들을 꼬드겨 80만원짜리 자석요를 팔아먹는다.
이런 인간들은 수가 얕아 들키기나 하고 비웃음이라도 사지만 수가 높은 인간들은 자식을 우아한 학교로 위장전입시키고, 자석요와는 비교가 안 될 액수를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해먹고, 강고히 단합하여 서로의 허물을 사뿐하게 가린다. 그리고 이들은 쉽사리 들키지도 않을뿐더러 들키고 나서도 건재하고, 사람들은 이들을 비난하면서도 이들처럼 되고 싶어하고 이들과 친분을 가져 그 단물의 가용 범위 내에 있기를 원한다. 가장 침통한 것은 이들이 잿빛 살갗을 지닌 좀비나, 안티바이러스를 과용한 박사와 같은 괴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가족을 남부럽지 않게 살게 해주고자 하는 애정이 지극한 사람들이고, 자기 자식을 위해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사람들이고, 자신이 죽고 난 뒤에도 자식은 잘살 수 있도록 울타리를 만들어주고자 하는 소망이 투철하며 그 소망을 현실로 옮길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른바 열정에서는 따를 자 없는 사람들인 것이다. 어떤 수단을 사용하든 어떤 비난을 받든 무조건 살아남고자 하는, 남이야 죽거나 말거나 일단 나와 내 가족이 살고 봐야 한다는 이토록 뜨거운 열정에 불타는 사람들 틈에서 머뭇거리고 자신없어 하고 망설이는 괜히 생각이 많은 사람들은 저 <레지던트 이블>의 세계에서나 이 세계에서나 희생자가 되는 것이 정해진 수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갓 잡은 신선한 먹잇감이 될지언정 그 열정만은 닮지 않는 것이 좀비 아닌 인간으로서 지킬 수 있는 마지막 자존심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