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제니퍼 가너] 이웃집의 여전사
2007-11-08
글 : 문석
<킹덤>의 제니퍼 가너

제니퍼 가너는 지성파이기보다는 육체파 배우에 가깝다. 175cm의 키에 길게 뻗은 다리, 그리고 울룩불룩한 몸의 곡선을 드러내길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점뿐 아니라 무지막지하고 살벌한 격투신을 멋지게 소화한다는 면에서, 그녀는 머리보다는 몸뚱이를 더 믿는 듯 보인다. CIA와 비밀결사조직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하며 거침없는 액션을 펼쳐 보였던 TV시리즈 <앨리어스>부터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단검 두 자루를 든 채 어둠의 세력과 맞서 싸웠던 <데어데블>과 <엘렉트라>까지 제니퍼 가너의 경력을 요약해주는 하나의 단어는 ‘액션’이니까.

신작 <킹덤>에서도 제니퍼 가너는 강인한 여전사의 이미지를 또렷하게 드러낸다. <킹덤>에서 가너가 맡은 역할은 미국인 100여명이 사망한 테러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사우디아라비아로 날아간 FBI 요원 재닛 메이스. 그녀는 4명으로 이뤄진 FBI 수사팀에서 법의학을 담당하지만, 후반부의 클라이맥스에서는 총자루만 붙들고 있는 다른 세 남자와 달리 테러리스트들과 몸뚱이로 맞상대하는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 “나는 육체적인 장면이 있다고 해서 역할을 거절하지 않는다. 쇼나 더긴스(6년째 함께 일하고 있는 제니퍼 가너의 스턴트 대역)가 안전하다고 하면 나는 직접 연기를 한다. 몸에 멍 몇개가 생긴다고 죽기야 하겠냐.” <킹덤> 액션장면을 찍을 때 가너가 감독에게 요구한 것은 딱 한 가지였다. “가슴을 건드리지 말 것. 그땐 딸아이에게 모유를 먹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액션 연기에 익숙하고, 유난히 딱 벌어진 어깨를 자랑하는 가너라 할지라도 <킹덤>의 액션은 쉽지 않았다. 그건 피터 버그 감독 때문이었다. 액션 연기의 리얼리티를 중요하게 여기는 감독은 미리 정해놓은 ‘합’을 재연하기보다는 실제 싸움을 원했다. <킹덤>은 어쩌면 감독보다 배우로서 훨씬 오랜 경력을 쌓았던 피터 버그와 가너가 맺은 두 번째 ‘악연’이었는지도 모른다. 가너와 버그는 <앨리어스> 첫 시즌의 한 에피소드에서 배우 대 배우로 만나 격투신을 찍은 적이 있다. “그는 우리가 즉흥적으로 싸우기를 원했다. 촬영이 시작되자 실제로 그는 나를 때리려 했다. 스탭들이 나를 끄집어내고 쇼나를 대신 투입하긴 했지만, 며칠 동안은 얼굴에 난 상처를 가리기 위해 특수분장을 해야 했다.”

<앨리어스> 때 훈련을 위해 익힌 킥복싱이 이젠 취미가 됐다거나, <완벽한 그녀에게 딱 한가지 없는 것>의 언론 정킷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아침과 밤마다 <엘렉트라>를 위한 신체 훈련을 했다는 이야기는 안젤리나 졸리의 뒤를 잇는 여전사로서 제니퍼 가너의 이미지를 굳히는 신화처럼 들리지만, 사실 그녀의 목표는 ‘최고의 여자 액션배우’가 아니다. 한 외국 언론의 평가처럼 “그녀는 안젤리나 졸리와 달리, 타고난 어수룩한 느낌 때문에 남성으로부터 사랑받고, 여성에게 위협감을 느끼지 않도록 하”기 때문이다. 매사를 똑똑 부러지게 다루고, 눈빛만으로도 강력한 포스를 뿜어내는 졸리와 달리 “나는 이제야(<킹덤>을 준비하면서) 수니파와 시아파의 차이를 알게 됐다”고 스스럼없이 말하는 제니퍼 가너는 어딘가 허술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로맨틱코미디 <캐치 앤 릴리즈>에서 함께 연기한 티모시 올리펀트가 “정치적 그름을 무릅쓰고 말한다면 그녀는 그냥 쿨한 계집애다(She’s just a cool chick)”라고 한 것도 비슷한 맥락일 터. 특히 제니퍼 가너의 ‘어눌한 매력’을 극대화한 <완벽한 그녀에게 딱 한가지 없는 것>을 떠올린다면 여전사 이미지에 가려진 그녀의 본질은 더욱 쉽게 파악된다. 이 영화에서 어느 날 갑자기 육체가 서른살이 된 열세살짜리 꼬마 아이를 연기한 그녀는 유독 길고 강인한 턱선 뒤에 감춰졌던 천진난만한 미소와 보조개를 드러냈다.

‘여성판 슈워제네거’에 머물지 않겠다는 제니퍼 가너의 의지는 드러나고 있다. 베니스영화제에서 작품상을 받은 제이슨 라이트먼 감독의 <주노>에서 껑충 뛰어오른 연기력을 보여준 그녀는 자신의 영화사 밴덜리아 필름스를 차리고 <지금, 만나러 갑니다>의 미국 버전을 제작하고 있다. 그리고 처음 오르게 되는 브로드웨이 무대는 가너의 의지가 집약된 곳이다. 웨스트 버지니아주 찰스턴이라는 소도시에서 자라나 3살 때부터 발레를 전공했던 그녀의 꿈은 바로 연극 무대였기 때문이다. 대학 전공을 화학에서 연극으로 바꾼 것도 “가슴 한구석이 아니라 가슴 가장 앞쪽에” 담아뒀던 무대에 대한 열정 때문이었다. 1994년 대학 졸업 뒤 뉴욕에 머물며 모든 오디션에서 떨어져 미뤄둬야 했던 연극에 대한 꿈은 마침내 11월 초부터 상연되는 <시라노 드 벨주락>을 통해 빛을 보게 됐다. 코가 커서 슬픈 남자 시라노의 절절한 사랑을 알아채지 못하는 록산느 역을 맡게 된 그녀는 남편인 벤 애플릭이 첫 연출작 <가라, 아이야, 가라>에 도전한 것처럼 새로운 세계를 향해 큰 발을 딛은 것이다. 그렇다고 그녀가 단박에 육체파에서 연기파 또는 지성파로 바뀔 리는 만무하지만, “울음이 밤새 계속될지라도 즐거움이 아침에 온다”는 엄마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겨두고 있다는 제니퍼 가너라면 언젠가는 확실한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진제공 U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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