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김윤진] 스릴러가 사랑한 여자
2007-11-09
글 : 오정연
사진 : 오계옥
<세븐데이즈>의 김윤진

동포 배우에서, <쉬리>의 여전사로, 그리고 <로스트>의 월드 스타로. 미국에서 배우의 꿈을 키우던 김윤진이 20대 중반에 고국에 돌아온 뒤 정확히 10년 동안 걸어온 행보다. 그의 시원스런 베팅이 이번에는 숨가쁜 스릴러 <세븐데이즈>에 이르렀다. 전도유망한 변호사지만, 홀로 키우는 딸에게는 언제나 미안한 엄마, 유지연은 거짓말처럼 딸을 납치한 누군가에게서 위험한 제안을 받는다. 딸을 살리고 싶으면 살인범을 무죄로 석방시킬 것. 김윤진이 전작 <6월의 일기>에서 따돌림당하다 자살한 아들을 위해 연쇄살인범이 된 잘못된 모정을 연기했음을 떠올려본다. 아이는 물론 결혼도 안 한 여배우의 것이라기엔 사뭇 의아한 선택이지만 방점은 모성이 아니다. 어머니이되 한없이 자애롭지 않고, 여자이되 무작정 기대지 않는다. 피해자일 때 당당하고, 가해자일 때 애처로워 보일 줄 아는 그는, 전형성과 언제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왔다. 한결같이 꼿꼿하고 뜨거운 태도로 할리우드와 충무로를 향한 사랑을 감추지 않았던 그를, 지난 10월 초에 미리 만났다. <세븐데이즈>의 후반작업 때문에 <로스트> 시즌4의 촬영 중 한국을 찾은 그는 그간 마주했던 배우들과는 조금 달랐다. “자신들이 준비되지 않은 부분, 안 예쁘게 나올 만한 장면에 대한 무의식적인 반발이 강한 여배우들이 있다. 그런데 김윤진씨는 절대 그렇지 않다. 자신이 망가져도, 그 캐릭터가 되는 게 최우선 목표다. 촬영을 통해 자신이 진짜 배우임을 증명했다. 굉장히 감사한다.” 원신연 감독의 말이 아니어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넓은 무대를 품고 최선을 다하는 자의 여유였을 것이다.

-현장에서 굉장히 정신없었겠더라.
=우리 카메라는 몰래카메라였다. 원신연 감독님과 최영환 촬영감독님은 쌍둥이 형제처럼 둘이서만 얘기하고 안 가르쳐준다. 항상 분위기를 잘 봐야 한다. 메이크업하는 친구한테 “나 나와?”, 촬영감독님께는…(입모양으로 ‘나 나와요?’) 상대배우 위주의 반응숏 찍을 때는, 난 안 나오는 줄 알고 멍하니 있다보니 나도 찍고 있더라. 그러면 다시 변호사의 심각한 얼굴로 돌아가고. (웃음)

-시나리오의 어떤 부분이 좋았나.
=이렇게 말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그냥 재밌었다. 계속해서 심장이 퉁퉁거리는 롤러코스터처럼. 굳이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 하는 것도 좋았다. 사건 따라가기가 워낙 바빠서, 훅훅훅훅 지나가니까. 연기자로서는 답답한 건 있었다. 표현을 맘대로 하도록 감독님이 내버려두지 않았다. 근데 표현을 해도 안 보였겠더라. 휙 지나가버리니까 뭐. 보통 눈물 연기 같은 거 할 때는 카메라가 기다려도 주고, 쓱 줌인도 하고 그러잖나. 근데 우리 영화는 안 그래.

-이 영화에 꼭 내가 필요한가, 이런 생각은 안 했나.
=그렇게 휙 지나가도, 내가 가진 어떤 이미지가 살짝 보여야 했던 게 아닐까. 저 여자, 정말 뭐든지 다 잘할 것 같아. 근데 이건 정말 너무 감당하기 큰 사건 아닌가? 이런 느낌. 만일 나보다 훨씬 연약하고 부드러운 이미지의 배우가 지연을 연기했다면, 또 달랐겠지.

-임무를 완수할 것 같은 단단한 여자, 혹은 도저히 못해낼 것 같아 불안한 여자. 어떤 쪽으로 감독과 합의했나.
=나도 그걸 물어봤었는데, 그러시더라. “윤진씨 평상시 모습이 좋아요. 똑 부러질 것 같은데, 얘기하는 거 보면, 단어 선택이나 그런 게 가만히 보면 되게 어눌한 면이 많아요.” (웃음)

-개인적으로 유지연에게 몰입되는 순간은, 딸을 위해 이를 악물다가도 약한 모습이 스칠 때였다. 납치범의 전화를 사무장에게 온 것처럼 형사들 앞에서 위장하는 순간이나, 살인범을 무죄석방하라는 전화를 받은 직후 주저앉는 것처럼.
=그런 장면은 모두 세트 촬영이었는데, 현장 속도가 더 빨랐다. 잠깐만요, 이러면서 감정잡기도 미안했다. 세트 촬영 때 그냥 계속 울고 있었다. 한번 잡은 감정을 놓치면 다시는 못 잡을 것 같아서. 사실 감독님이 우는 걸 싫어했다. 그냥 내가 한참 울게 놔두고, 그 다음에 촬영에 들어가곤 했다. 그 느낌이 더 가슴이 아프다고. 근데 거기까지 가려면 계속 울어야 한다.

-유지연의 캐릭터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을 꼽는다면.
=납치범에게 처음으로 제안을 받고 전화를 끊은 뒤. 바로 사무장에게 전화를 거는 장면. 원래는 정말 전화를 끊자마자 사무장에게 전화하는 거였다. 근데 미치겠더라. 머리가 띵하고 속이 폭발할 것 같아서 잠시 주저앉았다가, 속상하고 짜증이 나서 엉엉 울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서 전화했다. 감독님도 놀라서 컷을 안 부르시더라. 결국 중간에 우는 장면은 다 잘리고, 주저앉았다가 일어나서 바로 전화하는 것처럼 연결되어 있더라. 어쨌건 유지연은 그런 여자다. 확 꺽이는 것 같다가 훅 하면서 재빨리 일어나는.

-확실히 중간에 유지연의 잠깐 무너지는 느낌이 남아 있긴 했다. 감독과 그런 식의 엇갈림이 많았을 텐데.
=머리로는 알아들었는데, 몸이 안 따라주는 거랄까.

-감독과 촬영감독 모두 아이가 있으신 분들이다.
=그렇다. 두분들도 답답한지 이게 만일 내 새끼면 나는 어땠을까 그러시는데, 내가 농담처럼 그랬다. “저는 내 새끼도 없는데 얼마나 답답할까요.”

-최근 조디 포스터가 나오는 <브레이브 원>이라는 영화가 있었는데….
=그 영화 대본을 읽은 적이 있다.

-앗, 정말? 어떻게.
=조디 포스터 친구 역을 제안받았다. 병원이랑 집으로 찾아오는 친구. 일단은 내가 조디 포스터 친구로 나오기엔 너무 어린 것 같았고, 둘째로 배역에 매력이….

-너무 작아서였나.
=작아도 매력이 있으면 되는데….

-그러게. 나도 그 영화를 봤지만 언뜻 그 친구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
=그렇다니까. 비중이 문제가 아니라 인상적으로 나오기가 힘들 것 같았다.

-그런 인연이 있었다니.
=인연이랄 거 있나. 그냥 대본만 읽은 거지.

-아무튼 조디 포스터는 최근작 네편이 모두 스릴러다. 할리우드에선 괜찮은 여배우에게 괜찮은 스릴러영화가 꽤 좋은 무대가 되어주는 것 같다. 당신도 <6월의 일기>에 이어 이 영화도 스릴러영화인 셈인데.
=나는 시나리오를 보고 이 영화가 해리슨 포드의 여자판이라고 생각했다. 해리슨 포드는 영화에서 늘 땀을 뻘뻘 흘리면서 비틀거리고, 긴장돼서 눈밑은 막 떨리고 그러잖나. 그는 스릴러영화에선 정말 최고다. 나도 그런 걸 해보고 싶었다. <그놈 목소리> 같은 영화 속 엄마와 아빠의 역할이 합쳐진 것 아닌가.

-미국 활동 이야기를 해보자. 그나저나 2006년 선댄스영화제에서 김소영 감독의 <방황의 날들> 파티 때 만나서 인사 나눴는데, 기억 안 나나.
=아. 그랬구나. 그때 양자경 등 아시아 출신이면서 미국에서도 활동하는 배우, 프로듀서, 감독 등과 함께하는 심포지엄에 참석했다. 선댄스는 그때가 처음이었는데, 너무너무 분위기가 좋더라. 그해 여름 휴가 때는 선댄스 랩에 3주간 참석해서 김소영 감독의 차기작 중 두 장면 정도 찍는 걸 도와줬다. 저~기에서 말타고 있는 로버트 레드퍼드도 구경하고. (웃음)

-그러고보니 그해 선댄스에는 할리우드의 유명 배우가 출연한 인디영화가 정말 많았다.
=어차피 대작들은 배우들이 자신을 보여주고, 변신할 수 있는 기회는 아니잖나. 작품당 150억원씩 받던 배우들이 고작 주당 2천달러 받으면서 인디영화에 출연하는 건 그 때문이다. 다들 그런다. 저예산영화에는 돈을 그렇게 안 받는 거라고 생각하고. 오히려 현장에서 스탭들한테 돈을 쓰면서.

-아시아계 배우가 미국에 정착하는 방법 중 하나로, 그런 식의 인디영화 출연이 있지 않을까.
=그럴 수도 있겠지. 어쨌건 블록버스터영화는 동양배우에게 원하는 전형이 있는데, 그걸 하기는 싫으니까. 하지만 정착하기 위해서는 저예산영화만으로는 안 된다. TV가 최고다.

-처음 미국에 다시 건너갈 때부터 그런 생각을 했던 건가. 무조건 TV라고.
=한국에서 드라마 <예감>을 하면서 하루아침에 유명해지는 경험을 했다. TV가 무섭구나, 방송이 빠르구나, 이런 걸 느꼈다. <넘버.3>의 송강호 정도 아니면 영화 한편으로 인지도를 갖는 건 불가능하다. 웬만큼 얼굴이 알려져야지 작품도 선택하고 사람들이 나를 찾지 않겠나. 그러려면 TV가 가장 빠르겠다, 생각한 거지.

-주연을 맡은 회의 촬영을 앞두고 있다던데.
=그렇다. 7회라고 들었다.

-<로스트> 시즌4의 촬영이 내년 3월에 끝나면 이후 계획이 중요할 것 같다.
=모르겠다. 한국영화일지, 미국영화일지, 둘 다 일지.

-할리우드 B급영화의 주연과 대형블록버스터의 조·단역 중 무엇이 좋을지 고민된다고 했었는데, 결론이 났나.
=내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서 주연급으로 캐스팅되는 건 하늘의 별따기보다 힘들 것 같다. 메이저리그에서 홈런 치는 게 어렵다면, 그래도 팀이 이기는 데 공헌하는, 그런 선수가 되고 싶기도 하고. 역시 마이너리그에서 솜씨를 확 발휘하고 싶기도 하고.

-최근 영화 중 <디스터비아>에서 한국계 배우가 주인공의 가까운 친구로 나왔는데….
=근데 또 너무 코믹적으로만 묘사됐다. 그보다 비중이 적어도, 매력있는, 사건의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다든가, 하는 식으로. 근데 참 그런 영화가 안 들어오네.

-자서전에서 배우로서의 커리어와 함께 결혼을 굉장히 비중있는 목표로 밝혔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평범한 여자의 경험을 하는 것이 또 좋은 배우가 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둘 중에 선택을 꼭 해야 할까? 하지만 난 슈퍼우먼이 아니니까, 두 가지 모두 완벽하게 해내겠다, 이런 건 아니다. 충분히 도움을 받을 거다.

-음. 일을 위한 준비는 이미 하고 있는 셈인데, 나머지를 위한 노력도 하고 있단 얘긴가.
=당연하다. 만남을 가질 때는 충실하려고 한다. 연기를 위해 고등학생 때부터 노력한 게 많은데 연애도 다르지 않다. 자연스런 인연, 운명 같은 사람, 이런 거 난 솔직히 의문이다. 모두 노력하기 나름이다.

-자서전의 마지막이 올해 3월이었다. 두 번째 자서전을 쓴다면 그 시작은 어딜까.
=할리우드의 영화촬영장. 뭐, 평범한 엄마가 되어서 마돈나처럼 동화를 쓸 수도 있고.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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