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숙은 우리 엄마라기보다는 친구의 엄마다. 홈드레스를 입고 우아한 미소로 반기는 친구의 엄마는 시장통에서 반찬을 팔고, 연속극에 눈물을 짜는 우리 엄마를 멋쩍게 만든다. 데뷔 이후 줄곧 그런 우아함의 태왕으로 살아온 김미숙에게는 네개의 신물이 있었다. 라디오에서 클래식 음악을 들려주던 낭랑한 목소리와 미술을 사랑하고 플루트를 즐겨부르는 지성미, 거기에 <로비스트>의 해리가 말했듯 “여전히 아름다운” 외모와 따뜻하고 자상한 엄마의 이미지. 덕분에 그녀의 후배 여배우들은 “미숙 언니처럼 되길” 바랐고, 평론가들은 한국에서 여배우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담론에 김미숙이란 이름을 꼬박꼬박 새겨넣었다. “후배들이 ‘김미숙 선배처럼 늙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준다면 정말 좋겠다. 외향적인 것보다는 인격적인 문제라든가, 삶의 태도에서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의 본이 된다고 하면 민망하고, 실망스럽지만 않았으면 좋지 않을까. (웃음)”
본인은 “우아함을 없앨 수 없다는 게 나의 가장 큰 단점”이라고 하지만, 사실 김미숙의 우아함은 그녀에게 다른 중년 여배우들과는 큰 차이를 만들어냈다. 드라마 <로비스트>의 마담 채는 성공한 여성사업가이지만 투피스 정장과 뿔테안경 대신 은색 가발을 쓰고, 현재 촬영 중인 영화 <연인>의 정희는 암으로 죽어가면서도 남편에게 젊은 시절의 아내를 떠올리게 만든다. 오는 11월15일 개봉하는 영화 <세븐데이즈>에서 연기한 한숙희 또한 자식을 잃었지만 눈물로만 오열하고, 침대에 누워만 있는 엄마가 아니다. <말아톤> 이후 그녀의 행보는 나이든 중년배우의 자구책이라기보다는 한국의 여배우들에게 또 다른 롤모델을 만들고 있다는 것에서 주목할 만하지 않을까. “나는 지금이 너무 행복하다. 그동안 내가 잘살아왔나 싶고, 앞으로 더 신중하고 여유있고 포용력있는 배우가 돼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쉽지 않은 건데, 내가 생각해도 술술 잘 풀리는 것 같더라. (웃음)”
-드라마 <황금신부>에 <로비스트>, 영화 <연인>을 촬영 중이다. 스케줄을 소화하는 게 힘들 것 같은데.
=일이 좀 많기는 하지만 배려해주는 사람들이 많아 괜찮다. 단지 서로 다른 캐릭터를 이틀씩 나눠서 하다보니까, 집중력이 많이 필요하다. 남들은 영화나 드라마나 너무 몰입해서 하고나면 정신적인 공황이 온다는데, 나는 안 그럴 것 같다. 아마 모든 게 끝나야 제정신이 돌아오지 않을까. (웃음)
-<세븐데이즈>는 어떻게 봤나.
=편집본만 봤는데, 촬영할 때의 느낌이 그대로 담긴 것 같더라. 원신연 감독이나 스탭들이 정말 완벽하게 준비를 한다. 그전에 영화 현장이나 드라마 현장이나 그 정도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걸 보지 못했거든. 특히 카메라 2대를 놓고 찍어서 배우들 호흡을 놓치지 않게 해준 게 정말 감사하지.
-<말아톤>의 경숙처럼 <세븐데이즈>의 한숙희도 무조건적으로 찬양받을 엄마는 아니다. 이번에도 그런 부분 때문에 끌린 건가.
=아무래도 범상치 않은 엄마였기 때문에 선택한 게 크지. 이런 엄마는 이전에 한번도 해보지 않았는 데, 내가 한다고 하니까 너무 재밌는 거다. 그런데 원신연 감독은 그렇게 마냥 튀는 엄마보다는 모정이 많이 느껴지는 엄마를 바란 것 같더라.
-죽은 딸의 방을 치우다가 오열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원신연 감독과는 어떤 계획을 세운 건가.
=사실 그 장면이 시나리오에는 너무 부담스럽게 쓰여 있었다. “몬스터로 변하는 한숙희….” (웃음) 3회차 정도 촬영했을 때 연기한 건데, 아직 한숙희가 내 몸에 있지 않을 때였다. 하지만 확실히 현장이라는 게 배우의 표현을 돕는 것 같더라. 완전 피바다인 세트를 엄마가 치우는 장면이 먼저였는데, 그때 부터 어떻게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났나 싶은 분노가 몸에 배더라고. 만약에 내 자식이 이런 일을 당했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했지. 하지만 어렵기는 정말 어렵더라. 해본 적이 없는 연기니까.
-<그놈 목소리>의 김남주는 연기를 하면서 자기 아이와는 절대 결부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고 하더라. 마찬가지로 <세븐데이즈>에서도 그런 고통이 많았을 텐데.
=당연히 고통스러웠지. 그런데 딸이 성인이라는 점이 큰 차이다. 정말 어린애가 그런 일을 당했다면 엄마가 드러내는 슬픔도 다른 식으로 표현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엄마가 먼저 딸을 분가시킨 상황이라 자식에 대한 애틋함이 조금은 다를 것 같았다. 말하자면 딸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런 식으로 스크린 밖의 상황에 대해서 여러 생각들을 많이 했다. 엄마는 딸을 정말 사랑한 걸까, 아니면 자기 안에 어떤 콤플렉스가 있는 건 아닐까. 왜 딸은 그런 문란한 남자관계에 빠졌을까. 또 한숙희는 심리학 교수라는 직업 때문에 오히려 심리적으로 불안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말아톤>을 찍을 때와는 조금 다른 입장에서 현장을 대했을 것 같다.
=사실 <말아톤>을 찍을 때는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한 게 많았다. 20년 만에 영화를 찍으니까, 스탭들이 원하는 걸 다 들어줘야 할 것만 같았지. 말하자면 ‘여기서 이만큼만 움직여주셔야 조명각도가 맞는다’고 그러면 꼭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런데 그런 게 나의 시행착오라고 생각이 들면서, 이후에는 이것저것 요구도 하게 되더라고. (웃음) 이번에 <연인>을 찍으면서도 그러고 있다. 김대승 감독한테 ‘꼭 필요한 것만 이야기해달라’고 했지. (웃음)
-<연인>은 어땠나. <연인>의 정희는 암 말기의 환자인데다가, 중년이 아닌 노년의 여자다. 선뜻 출연하겠다고 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처음에는 고사했지. 시나리오가 좋기는 한데 너무 아픈 이야기였다. 게다가 암 말기 환자를 연기하려면 그에 맞는 몸 상태를 만들어야 하는데, <로비스트>랑 <황금신부>를 같이 해야 하는 상황에서 체력적으로 부칠 것 같더라. 또 아직은 나를 그만큼 늙게 하기가 아까웠다. (웃음) ‘한 3년쯤 뒤에 하면 좋겠다, 아직은 내가 좀 아깝다’ 이런 생각을 했지. 그러다보니 김대승 감독 하나 빼고는 마음에 드는 게 없는 거다. 하지만 미련을 버리려 해도 계속 아른거리는 장면들이 있었다. 죽음을 앞두고 남편이랑 여행을 떠나는 모습이나 아들이 죽은 곳을 다시 찾는 장면이 잊혀지지가 않더라고. 심지어 백윤식 선배도 하신다는데 안 할 수가 없었던 거지. 그리고 김 감독님도 내 스케줄에 다 맞춰주겠다고 했고. 그래서 지금은 내가 일주일에 이틀만 줘도 나한테 아무 말도 못한다. (웃음)
-이전에 백윤식과 같이 연기한 적은 없었나.
=아마 몇번 상대역을 하긴 했을 거다. 정확하게 기억하는 건 1편인데, <동심초>라고 내가 데뷔해서 주인공을 처음 했던 드라마였지. 그때 선배랑 같이 신혼부부를 연기했다. 그런데 이제 말년을 함께하는 부부로 나오는 거니까, 인연이 참 재밌지. (웃음)
-그동안 어머니 역할을 정말 많이 맡았다. 자상한 어머니부터 억척스러운 어머니, 푼수기 있는 어머니까지. 하지만 예전에는 <사랑의 굴레>나 <사랑> 같은 작품에서 말 그대로의 연인을 많이 연기했었다. 특히 장동건이 상대역이었던 <사랑>은 당시에도 꽤 화제인 작품이었다. 연상연하의 커플이란 게 아직 와닿지 않는 때이기도 했지만, 두 배우가 신기할 정도로 잘 어울려 보였다.
=사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백윤식 아저씨만 빼고 다 연하의 남자랑만 연기했다. (웃음) 지금도 가끔은 순수한 중년의 로맨스를 연기해보고 싶다. 가정생활을 하고 회사생활에 지치는 이런 주변 이야기는 빼고 순수하게 40대 중반, 50대 초반 남녀의 사랑 이야기는 없을까 싶다. 그 나이 때에도 여성으로서나, 남성으로서의 감정은 남아 있는 거니까.
-드라마 <사랑을 할거야> 당시, 어느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30대 중반까지는 엄마 역은 안중에도 없었다”고 했다. 맨 처음 어머니 역할을 맡았을 때는 적잖이 놀랐을 것 같은데.
=정말 안중에 없었지. 그런데 배우로서 어떤 시기 때문에 갈등이 올 때가 있다. 특히 여배우한테 30대 중·후반이란 나이는 엄마도 아니고 처녀도 아닌, 그런 어중간한 시기다. 다행히 나는 선배들이 그럴 때를 대비할 수 있는 조언들을 많이 해주었다. 그런데 문제는 나한테 너무 큰 아이의 엄마를 하라는 거였지. (웃음) 조그만 애들 엄마는 얼마든지 하겠는데, 대학생 애들이 사랑에 빠지고 그걸 지켜보는 엄마를 하라니…. 그런 건 못하겠다고 했더니 할 만한 역할이 또 없더라고. (웃음)
-<사랑한다면>에서는 심은하의 엄마를 연기했다. 당시에도 어떻게 저렇게 젊은 엄마가 있을 수 있냐고 말이 많았는데.
=나도 처음에는 못하겠다고 했었다. (웃음) 그런데 어떤 생각을 했냐면 ‘빨리 늙고 빨리 돌아오자’했던 거지. 만약 사람들이 내가 그런 역할을 하는 걸 오버로 받아들인다면 당분간 이런 역할을 안 줄 거라고 생각했거든. (웃음) 또 내가 워낙 좋아하는 심은하 엄마였으니까 했었다. 말이 정말 많기는 많았다. 말도 안 되는 엄마라고. (웃음) 게다가 또 내가 일부러 늙게 꾸미질 않았다. 아무튼 그때 <사랑한다면>을 하고 돌아서니까 <사랑>이 들어왔다. 엄마 역할을 거부할 때는 할 게 없어서 라디오만 했었고, 그러다가 2년에 한번 정도 일일연속극에서 엄마를 연기하면서 여배우가 이러다가 할머니로 가는구나 했는데 말이지. (웃음)
-사실 그렇게나 많은 어머니를 연기했지만 그래도 언제나 로맨스를 갖고 있는 우아한 엄마들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사랑해 사랑해>의 봉자나 <사랑을 할거야>의 옥순처럼, 푼수기 다분한 캐릭터들을 맡기 시작했다. 본인 스스로도 우아함의 대명사라는 틀이 갑갑했던 건가. 기사를 검색해보면 “김미숙의 변신!” 이런 제목들이 꽤 많던데.
=변신이라고 생각하는구나. (웃음) 글쎄, 외모가 달라진 건 분명한데, 어떤 인물을 표현하려다가 그런 것뿐이지 특별히 변신해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로비스트>의 마담 채도 배경이 미국인데다가, 직업이 다르니까 색깔을 다르게 하려고 여러 설정을 가미한 것뿐이다. 기존에 했던 배역은 아무런 설정이 없는 엄마들이었지 않나.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캐릭터들도 우아하다고 하더라. 사실 나의 최대 단점은 어떻게 해도 우아함을 뺄 수 없다는 거다. (웃음) 푼수거나 억척엄마를 연기해도 기본적인 컬러를 빼지 못하는 게 있다. 그럼 결과적으로 우아하다는 건가? 꼭 그건 아닌데…. (웃음)
-설정을 한 것이라면 <로비스트>의 마담 채는 그런 설정의 극점에 있는 인물이다. 처음 배역이 들어왔을 때 본인도 놀라지 않았나.
=하하하하하. 채는 사실 어렵지 않게 생각했다. <로비스트>란 드라마를 하는데, 미국 촬영분량이 많다고 해서 바람 쐬면서 편하게 일할 수 있고, 괜찮은 배역이 있으면 달라고 했지. 그랬더니 마담 채를 만들어 온 거다. 보니까 부담이 되더라고. 전혀 상상해보지 못한 세계에 있는 여자 아닌가. 이탈리아계 미국인 마피아 두목의 부인인데, 그 남편이 또 본 남편인 것도 아니고. 거기다 무기거래를 하는 여자다. 겉으로는 편안하게 하겠다고 했지만 머릿속으로는 고민이 많았다.
-극중 해리가 마담 채의 어깨를 주무르는 장면이 화제였다. 게시판에는 ‘채리커플’을 이어줘야 한다는 게시물들로 도배가 되기도 했다. 그 장면을 촬영할 때는 어땠나.
=하하하하. 진짜 웃겼다. 긴장도 되고, 대사도 너무 느끼하고, 정말 쑥쓰러워서 끊임없이 딴짓을 했다. 사실 일국이도 쑥스럽겠지. 그런데 그러면 지켜보는 사람들도 쑥스러우니까 선배가 장난을 쳐주는 거지. 괜히 (송)일국이를 더듬기도 하면서. (웃음) 나중에는 일국이도 장난을 치더라고. ‘지퍼 내려드릴까요? 올려드릴까요? ’이러면서…. (웃음) 그런 연기는 정말 처음이었는데, 주위 친구들은 나더러 선수 같다고 하더라. (웃음)
-하지만 그런 연기가 단순한 이미지 변신 같지는 않다. 시트콤처럼 보이는 것도 아니고 망가지는 것도 아니다. 본인 스스로도 중년배우로서 새로운 자리를 찾아가려는 의도가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또 그 때문에 한국에서 여배우로 늙어간다는 것에 대한 담론에서 김미숙이라는 이름은 빠지지 않는 게 아닐까.
=그런가? 읽은 것 같기는 한데…. 그러니까, 우리 남편은 얼마나 좋겠어. (웃음)
-앞서도 말했지만, 요즘은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작품에 출연 중이다. 그런 의도와 같은 맥락에 있는 건가.
=일단 작품을 많이 하는 게 좋은 건 아니다. 시간적으로 쫓기니까. 그렇다고 해서 이른바 말하듯 ‘메뚜기도 한철인데…’ 이런 생각에 출연작을 늘린 것도 아니다. 단지 지금 나한테 일이 몰리고 있는 거지. 오는 작품을 다 할 수는 없지만 할 수 있는 물리적인 시간 내에서는 최선을 다하려 하는 거고, 내가 그럴 수 있도록 옆에서 배려를 많이 해주는 팀을 잘 만난 게 아닌가 싶다.
-그래도 다른 중년 여배우에 비해 독보적인 자리를 지켰다는 느낌은 본인도 있지 않을까.
=정말 운이 좋은 거지. 지금은 내 자리가 어느 범주 안에 들어섰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내 스스로 자신감도 많이 느끼는 중이고. 이 자리는 누구도 못 오겠구나, 혹은 안 오려고 하겠구나, 심지어 못 오게 해야지, 이런 생각도 한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