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엄지원] 시대를 건너온 순수의 초상
2007-11-16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스카우트>의 엄지원

배두나의 손놀림, 전도연의 눈웃음, 임수정의 시선, 공효진의 말투, 김정은의 울먹임에 비교할 만하다. 반쯤 말과 섞여서 터져나오는 흐느낌과 울 때 빨개지는 그 코의 자연적인 반응이 좋다. 게다가 애교인 것도 같고 능청인 것도 같은 약간의 비음은 언제나 초현실적이다. 엄지원이 지닌 몸의 세세한 감각이 좋다. 하지만 기록적일 만큼 아름다웠던 <극장전>의 영실을 제외한다면 지금까지 엄지원의 역할은 그녀의 구체적인 감각이 돋보이기보다 스스로의 말처럼 남자들이 염원하는 이상적 이미지에 초점이 맞춰진 쪽이었을 것이다. 혹은 그 이미지 중에서 영실의 이미지가 가장 압도적이었다.

<스카우트>의 세영도 어쩌면 이미지다. 하지만 잔인했던 시대의 70년대 학번, 80년 광주의 활동가라고는 해도, 영화의 정서 안에서 어딘가 귀여운 소시민의 캐릭터로 포현되어 있는 것이 긍정해줄 만한 부분이다. 대학 1학년 새내기로 같은 과 선배이자 야구선수인 호창(임창정)을 만나 풋사랑에 빠졌지만 시대의 흐름에 밀려 헤어지고 다시 7년 만에 비운의 공간에서 재회하게 된 활동가 여성으로서의 세영에게 어떤 구체적인 세부는 없지만, 그녀가 호창에게 울며 마지막 이별을 고하고 혹은 슬며시 그를 도와 착한 짓을 하거나 절실하게 감정을 털어놓을 때 엄지원의 목소리는 자주 비음이고 코는 종종 빨개져서 살아 있는 사람 같다. 선동열을 스카우트하기 위한 상상의 소동과 80년대의 분위기가 만나는 사이에서 세영이란 인물의 몫은 꽤 컸던 것인데, 그 세영을 연기한 엄지원은, 그러니까 그녀의 목소리와 콧잔등은 일종의 발랄한 타임머신 역할을 하고 있다.

-기자 간담회는 보지 못했다. 반응들이 어땠나.
=감독에게 질문이 많으면 영화가 만족스럽게 나왔다는 얘기라며, 질문을 많이 받아 기분 좋다고 감독님이 끝난 뒤에 말씀하시더라

-본인에게는 어떤 질문들을 하던가.
=기억나는 게 한 가지 있다. 기존에 있던 색이 많이 없어진 것 같은데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 “내가 색이 없어졌나? 그렇지 않다, 여러 장치들을 통해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재미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영화에서는 빈도수에 비해 밸런스를 맞추는 것에 초점을 두었다”고 답했다. 감독님은 그러시더라. 아마 그 질문은 칭찬이었을 거라고.

-김현석 감독은 재미있는 사람 같아 보인다.
=엉뚱하다.

-우연히 TV에서 <스카우트>팀의 짧은 방송 인터뷰를 봤다. 김현석 감독의 엉뚱함이 본의 아니게 배우들을 좀 어색한 상황으로 만드는 것처럼 보였다. (웃음) 임창정씨 캐스팅을 두고 “처음에는 좀 멀쩡한 사람과 하려고 했지만”이라고 말하거나, 그리고 엄지원씨 말할 때는 뭐라더라….
=아, 그거. 지원씨는 영화인들이 좋아하는 배우이고, 그동안 흥행에서 소외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흥행의 기쁨을 맛보게 해주고 싶었다는 말?

-당황스러웠나.
=그런 말이야 사석에서도 농담처럼 많이 주고받으니까 뭐 아무렇지도 않다. 내가 감독님에게 뭐라고 할 때도 있는데, 그러면 감독님은 “나도 영화 세편이나 만든, 그래도 흥행과 인지도 면에서 괜찮은 감독인데 너무하신 거 아닌가요, 지원씨?” 뭐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니까.

-현장에서 감독을 좀 꾸짖는 편이라는 뜻인가.
=감독님은 글쎄 여자를 너무 모른다니까. 그래서 연애가 잘 안 된 거라고 말해줬다. 세영이 머리에 나비 레이스 달아야 한다고도 하고, YMCA에서 일하는 여성이니까 치마 입어야 한다고도 하고. 결국 내가 꼭 바지 입어야 한다고 해서 그렇게 됐지만. 세영이에 관해서도 처음에는 추상적인 이미지가 강했던 것 같다. 물론 장르 면에서는 그런 게 필요하겠지만 나는 우리 영화에선 세영이가 이미지보다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왜 많은 영화들이 남자는 사람으로, 여자는 이미지로 다루지 않나. 그래도 김현석 감독은 지금까지 내가 같이 일한 감독 중 가장 젊은 축에 속해 많이 편했다. 그래서 나도 “세영이는 제가 알아서 할 거예요”라든가, “아니요, 그런 거 아니거든요” 이런 말을 하곤 했다. (웃음)

-그런 식으로 의견이 반영된 장면은 어디인가.
=세영이가 왜 호창이를 떠나는지. 헤어지는 장면이 중요하지 않나. 대중이 봤을 때 저래서 헤어졌구나 느껴야 하는 거고. 호창이의 어떤 행동이 세영이가 헤어지자고 할 만큼 충격적인 무엇이라면, 집 앞에서 이별하는 장면도 뭔가 조금이라도 말이 더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원래 시나리오에는 “우리 이제 그만 만나요”라는 게 다였지만, 그 다음 뭔가 더 말할 것 같았다. 그래서 “이제 다시 보고 싶지 않다”는 말을 더했다. 사실은 그때 내가 첫 번째 테이크에서 너무 추하게 울어서 감독님이 좀 감정을 줄여달라고 하더라. 두 번째 테이크에서는 눈물이 그렁그렁하는 정도로 했는데, 결국에는 추하게 우는 버전을 썼더라. (웃음) 하지만 재미있었다.

-현장에서 생각나는 걸 많이 해본 건가.
=영화가 거의 각본대로 나오기는 했는데, 현장에서 인물들의 대사나 말은 그날 나온 것들도 많이 있다. 호창이가 유치장에서 “얼굴도 예쁜 아가씨가 데모하지 마세요” 하면 “아저씨나 잘하세요”라고 세영이가 그러는데 그것도 원래는 없던 거고. 곤태(박철민)의 비광시도 감독님이 현장에서 직접 쓴 거고.

-현장에서 생각난 걸 음악으로까지 했나.
=나도 같이 노래 부르지 않나.(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오를 때 김현석, 엄지원, 박철민 세 사람이 ‘김엄박 트리오’라는 이름으로 이 노래를 부른다)

-임창정이나 박철민처럼 코미디 연기에 단련되어 있는 사람과 연기할 때는 어떤 점에 유의해야 하나.
=특별한 건 없지만, 리허설 많이 하지 않고 동선만 맞춘 다음 바로 촬영한 적도 많았는데, 어차피 리액션이니까 그들이 웃기면 웃다 대사하면 된다. 내 촬영이 없을 때도 다른 사람 것을 보는데 동적인 연기들을 보니까 재미있더라.

-80년대 운동권 여성으로 나온다. 해본 소감은.
=나야 그 시대상을 잘 모르는 세대 사람이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아팠다. 창정 오빠는 아까 마지막에 혼자 막 울더라. 그래서 울지 말라고 내가 토닥여줬는데, 생각해보면 세영이와 호창이도 잘 놔뒀으면 예쁘게 사귀었을 거다. 그들이 시대의 희생양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야 영화 속의 인물일 뿐이지만 사실 내가 모르는 누군가들이 정말 실제로 그렇게 희생되었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내 생각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그랬겠지. 모르고 있던 시대상에 대한 자각이 생긴 거다. 어떻게 이런 걸 모르고 살았을까 하는 인식이 좀 생겼다. 근현대사에 대한 생각도 하게 되고. 우리 아버지가 돈을 많이 버시는데도 불구하고(웃음), 내가 뭘 사다드려도 잘 안 하신다. 딸이 뭘 사다줘도 항상 아끼고 뭘 잘 안 하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개인적인 습관도 다 어두운 근현대사 속에 얽혀 있는 것 아니었을까 싶다. 이번 건 가벼운 영화지만 깊은 생각을 주는 것 같다.

-음… 너무 세미나 분위기로 가고 있으니까 좀 다른 얘기를 해보자.
=호호? 그런가??

-관객으로서 볼 때 본인 출연장면 중 가장 재미있는 곳은.
=대학 회상장면이 할 때도 볼 때도 즐겁다.

-개인적으로는 무척 웃겼던 장면이 하나 있다. 왜 호창과 세영이 YMCA 사무실에 쌓여 있는 짐을 나르기 전에 세영이 호창에게 무슨 말끝엔가 “그만 뚝!” 그러지 않나. 그러니까 혹시 그거….
=맞다! 그거 <극장전>의 오마주다!! 김현석 감독님이 나에게 바치는!

-관계가 있을 거라 생각하며 보았다.
=진짜로 그렇게 말씀하시고 넣은 거다. 감독님이 <극장전>의 영실이를 너무 좋아했다면서 그날 현장에서 만들어주셨다.

-오마주를 헌사받은 소감은.
=뭐라 그래야 하나. 부담스럽더라. 세자밖에 안 되지만 대사 잘해야 하는데 싶고, 호호호…. 아는 사람은 유쾌하게 보고, 모르는 사람은 그냥 보고 뭐 그런 장면 아닐까.

-기왕 가벼운 이야기로 넘어왔으니까… 야구는 좋아하나. 이 질문 하도 많이 들어 모범답안이 있을 텐데.
=물론 많이 들었다. 보통 여자들이 좋아하는 정도다.

-가령 룰을 아나.
=당연하지. 경기는 다 볼 줄 안다.

-즐겨보는 스포츠가 있나.
=음… 별로. 보는 것보다 하는 걸 더 좋아한다.

-승마를 한다는 기사를 예전에 본 적 있다.
=못하지는 않지만 잘하지도 않는 수준이다. 사실 여자들이 할 수 있는 운동이 많지는 않다. 하지만 승마는 어떤 식으로든 작품에서 언젠가 필요할 일이 생길 것 같았다. 취미로라도 하고 나면 작품에서 할 때 부담이 덜해지지 않을까 싶어서 배우게 됐다.

-욕심이 많아서 이것저것 많이 배운다는 말은 들었다.
=하긴 하는데 특별한 것이 없어서…. (웃음) 사람이 성공하려면 한 가지만 특별히 잘해야 한다고들 하던데.

-욕심 얘기를 하고보니, 혹시 전도연씨가 칸에서 여우주연상 탔을 때 혹시 배가 아프거나 하지는 않았나. 본인도 2005년에 칸에 가지 않았나.
=전혀! 내 일이 아니지만 되게 기뻤다. 나는 시상식장에서 다른 여배우들이 소감 말하면서 울면 같이 눈물이 난다. 그 마음이 어떤 건지 알 것 같아서. 당연히 좋은 영화를 해서 좋은 연기를 보여주고 상을 받는 건데, 그건 후배들에게도 시장이 넓어지는 걸 의미하는 거니까 축하할 일이다. (기자보며 살짝 꾸짖듯이)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스카우트>는 출연작 중에서 비교적 뚜렷한 캐릭터다.
=욕심으로는 세영이도 조금 미흡한 것 같지만, 조금 더 현실적이라고는 생각한다. 배우로서는 현실적인 캐릭터를 연기하는 게 재미있긴 하다.

-어쨌든 뭔가 조금씩 변화가 있는 것 같다.
=이제 방법을 좀 안 것 같다. 예전에는 방법을 알았더라도 선택의 폭이 많지 않았지만 지금은 폭이 넓어졌으니까 더 좋은 선택을 해나가게 되지 않을까?

-<씨네21>에 ‘속 내 인생의 영화’ 써준 적 있지 않나. 내부에서는 인기가 좋았다. 글을 잘 썼다고. 글을 써봐도 좋을 것 같은데.
=책 내고 싶다. 책에 대한 욕심도 많고 해서. 글쓰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

-누구는 글이란 머리가 아니라 엉덩이로 쓰는 거라고 하던데, 그러니까 본인도 글을 자주 써본다는 뜻이 되나.
=어… 그럼 아직 멀었다. 자주 쓰지는 않는다. 글은 그 사람을 많이 드러내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소설가가 아닌 이상 내가 글을 쓴다는 건 배우로서 영화에서 그 인물이 되는 것과는 또 다른 두려움이 있다. 나를 너무 보여주게 될까봐 겁나서. 실제로 집에서 밤새도록 목차까지 만들어본 적은 있다.

-무엇에 대한.
=술에 대한 단상이랄까, 호호호. 와인에 대한 책을 한번 써보고 싶어서 해봤다. 와인책들이 다 어렵지 않나. 용어들도 그렇고. 일상에서 와인과 접하는 기회들이 많으니까, 내가 배우 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술에 대한 에피소드와 와인에 대한 정보를 섞어 좀 쉽게 써보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밤부터 아침까지 목록 준비한 뒤에 일주일 정도 거기에만 불타오른 적 있었는데, 그 뒤로 뭐 귀찮아져서 흐지부지됐다. (웃음)

헤어&메이크업 뮤제네프·스타일리스트 박유라·의상협찬 오즈세컨, 최정인, swing, Dirty blonde, 퓨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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