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김혜수] 정 마담에서 마이 마더로
2007-11-23
글 : 주성철
사진 : 이혜정
<열한번째 엄마>의 김혜수

김혜수가 엄마가 됐다. 정확히 말해 친엄마는 아니지만 하여간 어쩌다보니 한 아이의 엄마가 된다. 유흥업소를 전전하다 병을 얻어 한 남자의 집에 잠시 머물게 된 그녀는 졸지에 한 아이와 꽤 긴 동거를 시작한다. 처음에는 서로 경계하고 무시하고 살지만, 혼자서 너무나 오랜 외로움을 견뎌왔던 두 사람은 점점 서로에게 가장 필요한 존재가 된다. <열한번째 엄마>의 김혜수에게선 <타짜>의 요염한 모습도, <바람피기 좋은 날>의 생기발랄한 모습도 찾아볼 수 없다. 어쩌면 ‘변신’이라는 측면에서 <좋지 아니한가>의 철부지 이모의 연장선이라 할 것이다. 영화에서 그녀가 하는 일이라곤 가만히 누워 철지난 음악을 듣거나, 바람이 쐬고 싶으면 마당으로 나가 무표정하게 담배를 피우는 것 정도다. 아이의 비상금을 뒤져 김밥과 떡볶이를 사다 먹는 일도 빼놓을 수 없다. 그렇게 삶에 대해 무심하면 할수록 아이에 대한 사랑은 더 커져만 간다.

이처럼 김혜수가 누군가의 보호자로 등장한다는 사실 자체가 꽤 낯설다. 그녀는 영화에서 언제나 매혹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한국 영화계에서 그녀가 보여준 상징성이란 어쩌면 바로 그런 것이다. 현재 촬영 중인 영화 <모던보이>에서도 미스터리한 모던 걸로 출연한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열한번째 엄마>는 지금껏 그녀의 영화들 중 가장 독특한 지점에 서 있는 영화다. 마치 이전 영화들처럼 짙은 메이크업으로 등장한 그녀는 러닝타임이 흐르면서 조금씩 자신의 얼굴에서 색을 지워나간다. 그러니까 어쩌면 <열한번째 엄마>는 김혜수가 지금껏 자신을 에워싸고 있던 배우 혹은 엔터테이너로서의 아우라를 벗고 천천히 자연인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다. 김혜수 개인의 숨결이 가장 짙게 스며든 영화라고나 할까. 그래서 가장 묻고 싶은 것이 많은 김혜수의 영화다.

-시나리오를 처음 읽다가 눈물을 왈칵 쏟았다던데.
=지방촬영을 갔다 와서 샤워를 하고 누워 아주 편안한 자세로 시나리오를 집어들었다. 향후 스케줄대로 밀려 있던 시나리오는 아니었고 매니지먼트사에서 한번 읽어보라고 줬던 시나리오였다. 그런데 한장 한장 읽으면서 더이상 편안한 자세가 되지 않았다. 다 읽고는 바로 전화해서 ‘이 작품 하고 싶다’고 말했다. 뭐랄까, 시나리오의 느낌이 너무나 강렬하고 충격적이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느낌이었나.
=영화 속의 나와 아이는 처음부터 서로를 무시한다. 경계라고 할 것도 없다. 무엇에든 날카롭게 반응하고 거슬려 한다. 눈앞에 사람들이 있다면 다 투명인간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의 느낌을 정리하자면, 너무 충격적이고 그래서 뜨거운 눈물이 흐르지만 함부로 울 수는 없는, 결말에 이르러서도 마음속에 꼬인 것들이 풀리지만 시원하게 풀리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연스레 스르르 풀어져서 퍼지는 느낌이었다. 말하다보니 왜 이리 추상적이지? (웃음) 그렇게 정말 이상한 감정에 휩싸였다. 영화 속 아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 진심으로 궁금했고.

-최근 <눈부신 날에>나 <마이 파더> 등 모성, 부성을 다룬 영화들을 보면 숨겨진 비밀이나 반전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열한번째 엄마>는 그런 것 없이 쭉 간다.
=굉장히 담담하다. 그게 이 영화의 장점이기도 하고. 시나리오 읽고 너무 충격적이었다는 얘기를 많이 하게 돼서 막상 영화를 보면 ‘뭐가 충격적이야?’라고 반응할 수도 있는데(웃음) 정말 시나리오의 느낌은 영화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그 속에서 슬프다는 감정은 극히 일부분인 요만한 것이다. 그리고 그걸 마음속에 꾹꾹 눌러담게 되고 왠지 함부로 울어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까지 준다. 그런 슬픔을 극대화해서 마음껏 울리려는 태도가 아니었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진한 여운이 남는.

-극중 아버지로 나오는 류승룡에게 맞고 쓰러지는 장면은 거의 실제 같았다. 그런 묘사들도 충분히 충격적이었다.
=오히려 영화에서는 순화한 게 그 정도다. 그렇게 영화는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장면들을 오히려 정리한 편이다. 실제로 맞았던 건 아니지만(웃음) 맞고 나뒹굴 때는 정말 날아가서 부딪히는 느낌으로 했다. 물론 정말 실제 같은 느낌을 원했고. 영화가 생생한 현실 같은 느낌을 줘야 했다.

-그런 점에서 <열한번째 엄마>는 이전작 <좋지 아니한가>처럼 배우 개인으로서 어떤 변화를 모색하는 단계로 보이기도 한다. 두 영화에서 당신은 전혀 매혹의 대상이 아니다.
=매혹의 대상이라. 나 스스로는 영화에서 매혹의 대상이 됐던 게 악랄한 캐릭터지만 <타짜>가 유일했던 것 같다. 정말 그렇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나는 로맨틱코미디를 많이 했던 배우라고 생각한다. 난 정말 변화에 대한 강박이 없다. 정말 어쩌다보니 올 한해 그런 모습을 많이 보였는데 스스로는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고 생각한다. 다채로운 캐릭터를 연기해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정말 좋은 기회였던 것 같고.

-다른 인터뷰 기사를 통해 실제로 입양을 시도했다는 얘기도 봤다.
=정말 ‘시도’를 했다기보다 관심이 있어서 문의전화를 한 적 있다. 마음의 준비가 돼서(웃음) 세세하게 문의를 했던 건 아니고 정말 궁금해서 전화했던 거였다. 예전에 TV다큐를 보다가 위탁모에 관한 내용을 보고 ‘정말 저렇게 사시는 분들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일정기간 동안 정말 진심으로 다른 아이의 보호자가 된다는 게 얼마나 숭고한 일인가. 그래서 문의를 드렸던 거였다. 입양이라는 게 순간적인 감정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지속적인 책임과 애정이 수반돼야 하는 일 아니겠나.

-그러고보면 <열한번째 엄마>는 모성의 드라마이기도 하지만, 그 배경에는 사회안전망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짙게 깔려 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이 영화를 택한 가장 중요한 이유가 그것이기도 하고. 영화를 보는 관객 열명 중 하나라도 그런 느낌을 갖는다면 정말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촬영지가 봉천동인데 아직도 서울 한복판에 그런 곳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실제 촬영을 하는데도 마음이 안 좋을 때가 많았다. 영화에서 나오는 마을 모습이 거의 실제 그대로다. 영화에는 안 나오지만 대문을 나오면 아파트가 있고 그 밑으로 낡은 집들이 있는데, 파란색 비닐로만 포장된 비닐하우스도 있다. 거기에 숫자가 번지수처럼 적혀 있긴 한데 정말 거기에 사람이 사는지는 몰랐다. 한번은 우연히 거기서 나오는 여학생과 눈이 마주친 적 있다. 정말 그 표정과 느낌이 이상했는데 아마도 밖에 촬영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계속 언제 나갈까 숨죽이며 고민하다가 그때 나오는 것이었을 거다. 일부러 서로 시선을 피하는데 참 마음이 안 좋았다.

-마당에서 높다란 고층아파트를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는 당신의 모습이 더 절망적인 것도 그런 점 때문인 것 같다.
=보통 야외 촬영을 하면 사람들이 몰려나오는 게 흔한 일인데 이번 영화를 찍으면서는 정말 단 한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마음의 여유도 없고 관심도 없고 그냥 나가기 싫은 거다. 실제로 아파트 그늘 때문에 오후 2, 3시가 되면 해가 완전히 진다. 정말 빛이 안 드는 곳이다. 그런데도 그쪽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봉천동이라는 이름을 바꿔달라고 데모하고 그런다더라. 영화 속 아들 재수(김영찬)도 학교에서 식권을 받아 평소에 끼니를 해결하는데 난 정말 그런 게 있는 줄 몰랐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전혀 알지 못하는 세계가 있고, 또 알면서도 모른 척하게 되는 것도 있는데, 정말 이 영화 시나리오를 다 읽고 덮는 순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대해 투정부리는 것에 오히려 감사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마음이 생겨도 늘 까먹게 되긴 하지만 관심을 갖고 되새겨야 할 부분이 아닐까.

-영화에서 슈트케이스를 끌고 달동네를 오르는 뒷모습이 힘겨워 보였다. 이 정도로 아픈 사람을 연기한 걸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예전에 TV드라마에서 그런 비슷한 모습을 연기한 적이 있긴 한데 그때는 사실 별로 와닿지 않았다. 그때는 사실 내가 그런 리얼리티를 간파할 만한 상태가 못 됐다. 그러니까 사실 진심으로 작품을 통해 이런 인생의 레벨을 연기한 게 처음이다. 이 영화를 대하는 태도가 이전과 달랐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고. 하지만 연기의 포인트는 아픈 사람이라는 점이 아니라, 촬영기간 내내 내 마음의 태도는 가장 날이 서서 최대한 시니컬한 모습을 유지하는 거였다. 살면서 행복한 상황보다는 상처받은 상황이 더 많은, 그래서 극도로 예민하고 언제든 상처받기 쉬운 상태로 있는 것이었다. 그 감정을 유지하는 게 무척 힘들었다.

-캐릭터에 대해 김진성 감독과는 어떤 대화를 나눴나.
=감독님이 늘 상기시켜준 건, 이 여자의 기본적인 삶의 태도에 대해 전혀 친절하지 않은 까칠한 태도를 계속 유지하라는 것이었다. 이 여자의 인생을 볼 때 설사 아이에게 마음을 열었다고 해도 갑자기 부드러운 사람이 될 수는 없다. 그건 가짜다. 그런 느낌이 중요했고 실제로 현장에서는 늘 급박했기 때문에 충분한 대화를 나눌 시간이 부족했다. 그런 여건이 오히려 연기하는 데는 좋았다. 보통 몰입했다가도 일주일 정도 쉬고 촬영장에 가면 마음이 뜨게 되는데 그런 여유가 없어서 오히려 다행이었던 거다.

-그런 가운데서도 아이의 식권을 뺏어서 만두와 떡볶이를 사먹고, 아이가 냉동실에 숨겨놓은 야쿠르트를 뺏어먹는 모습이 아기자기해서 좋았다.
=나도 초반의 그런 장면들이 좋다. 물론 예상 가능한 것이지만 아이와 가까워지기 직전의 그런 과정들이 마음에 든다. 아이와 엄마는 그렇게 티격태격하면서 미운 정이 든 게 아니라, 아이를 보면서 마치 거울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을 거다. 아이를 보면서 과거의 자신을 떠올렸을 거고. 아이를 향한 모성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사람 대 사람의 이야기일 수도 있는 거다.

-당신이 영화에서 모성을 보여줬던 건 <분홍신>(2005) 때였던 것 같다.
=모성이라는 게 맹목적으로 베풀기만 하는 거라는 건 머리로 생각하는 거다. 그래서 <열한번째 엄마>는 모성을 본격적으로 다룬 영화라기보다, 상처받은 인간들이 마음을 여는 과정을 아주 담담한 태도로 담아내는 영화라고 보는 게 정확할 것이다. 오히려 모성에만 포커스를 뒀다면 내 자신이 감당하기 힘들었을 거다. <분홍신>에서는 이 영화와 달리 친엄마와 딸로 등장하지만 모성 이면에 여성성으로 충돌하고 갈등하는 역할이라 흥미로웠고, 이 영화 역시 모성에만 온전히 포커스를 맞췄다면 아직은 나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한계가 있었을 것 같다.

-이전 영화들과 비교하면 <열한번째 엄마>를 끝냈을 때의 기분은 좀 다를 것 같다. 캐릭터에서 빠져나오기도 힘들었을 것 같고.
=나는 한 캐릭터에 몰입하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걸리지만 촬영이 끝나면 아주 산뜻하게 빠져나오는 편이다. 그런데 이번 영화는 좀 달랐다. 일단 괴로운 정서 상태가 영화가 끝나고 바로 소멸되지는 않았다. 그래도 캐릭터에서 헤쳐나오기 힘들었던 때는 아마 <얼굴없는 미녀>가 더 셌던 것 같다. 이번 영화는 아마 그 다음 정도?

-영화 속 아이가 아들이 아니라 딸이었다면 느낌이 좀 달랐을까.
=많이 달랐을 것 같다. 동성과 이성이라는 건 실제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를 감안하더라도 다른 것 같다. 내가 리안 감독의 <결혼 피로연>을 좋아하는데 거기에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이 세상 모든 사랑이 다 들어 있기 때문이다. 젊은이의 사랑, 늙은이의 사랑, 동성간의 사랑, 이성간의 사랑, 그리고 아버지의 사랑과 어머니의 사랑, 정말 기가 막히다. 그래서 딸이었다면 아마도 다르지 않았을까. 그러면 좀더 다른 연기를 하지 않았을까.

-현재 촬영 중인 영화가 <모던 보이>라 <열한번째 엄마>를 홍보하고 있는 요즘, 묘하게 감정이 오갈 것 같다.
=<열한번째 엄마>가 마음속에 잔잔한 파도를 주는 영화라 가을이 어울린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모던 보이>에서는 또 다른 모습이니 참 묘하긴 하다. 사실 현재 내 감정 상태는 <모던 보이>의 조난실에 가까운데 매일 <열한번째 엄마>와 관련된 인터뷰를 진행하며 그 기억을 떠올려야 하니까. 내일은 또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밤에는 <모던 보이> 안무를 연습하고 점검해야 한다. 그래도 <열한번째 엄마>는 언제나 배우로서의 초심을 떠올리게 한다. ‘이 작품을 해야겠다’는 의지가 너무나 강했던 영화라 그 느낌이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헤어 이화(라뷰티코아 도산점)·메이크업 우리(라떼뜨)·스타일리스트 유상미(인트랜드)·의상협찬 CHRIS.CHRISTY, 575 denim, 나무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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