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레이 윈스턴] 디지털의 옷을 입은 일그러진 영웅
2007-11-22
글 : 김도훈
<베오울프>의 레이 윈스턴

레이 윈스턴은 전신성형으로 역할을 따냈다. 하긴, 성형없이 그게 가능한 일이었을까. 로버트 저메키스가 원했던 것은 빨래판 같은 배와 시에라 마드라의 황금 같은 머리칼을 흩날리는 젊고 의기양양한 영웅이었다. 뱃살 출렁이는 50대 영국 배우가 전신성형 없이 안젤리나 졸리의 사랑을 받는 고대의 영웅 역할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물론, 윈스턴이 <베오울프>의 주인공을 따내기 위해서 몸에 흉악한 메스를 들이댄 것은 아니다. 멕 라이언의 입술을 붕어처럼 부풀릴 수는 있을지언정, 현대 성형의학이라는 것이 겨우 몇달 만에 윈스턴의 육체를 30여년 전으로 되돌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은 컴퓨터를 손에 든 특수효과팀의 마법. 바로 ‘퍼포먼스 캡처’를 통한 성형수술 및 다이어트 요법이다. 그리고 누구보다 만족하는 것은 레이 윈스턴 자신이다. “처음에 베오울프를 보면 전혀 나같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일단 영화가 시작되면 전사의 모습에서 내가 느껴지기 시작한다는 거다. 나의 표정이나 세세한 움직임들을 모두 느낄 수 있다. 기술이란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그런데 왜 하필 저메키스는 브래드 피트처럼 금발과 복근을 지닌 젊은 스타 대신 푸짐한 미소의 윈스턴을 캐스팅했을까. 30년의 나이를 CG로 되돌리는 까다로운 작업을 감수한 이유는 뭘까.

레이 윈스턴은 그리 잘 알려진 배우는 아니지만, 그를 오랫동안 눈여겨본 사람이라면 딱 하나의 이미지를 떠올릴 것이다. 주먹질 하나로 바닥 짚고 일어선 영국 노동계급 출신의 갱스터. 윈스턴의 부모는 과일과 야채를 팔며 생계를 잇는 전형적인 노동계급이었고 60∼70년대 영국에서 노동계급 아이들이 성공할 수 있는 길은 딱 두개였다. 밴드를 조직하거나 혹은 운동선수가 되는 것. 윈스턴은 12살의 나이로 아마추어 클럽에서 복싱을 시작했는데 어찌나 잘 두들겼는지 ‘런던 스쿨보이 챔피언’을 세번이나 가져간데다 영국 대표로 국가 대항전에도 출전할 정도였다. 하지만 윈스턴은 주먹 대장보다는 배우가 되고 싶었다. 어린 시절 “<101 달마시안>을 보다가 크루엘라에게 열받아 스크린 앞으로 뛰어나갈” 만큼 본능적인 정열을 가진 아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을 게다.

18살의 나이로 드라마 스쿨에 입학한 윈스턴은 생각처럼 세상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중산계급 소년들과 셰익스피어 희극을 무대에 올리기에 윈스턴은 지나치게 직설적이고 ‘노동계급적’이었다. “학교 선생들은 몇번이나 나를 쫓아내려고 했다. 내 악센트가 다른 아이들에게 위협적으로 들린다는 지적과 함께.”(영국에서 악센트는 사용하는 사람의 계급을 대변하기도 한다) 결국 그는 교장선생의 차를 두들겨 부순 혐의로 퇴학을 당했는데, 그 가슴 무너지는 사건이 오히려 기회로 돌아왔다. 당시 <BBC> 드라마 <스컴>(Scum)의 주인공을 캐스팅하러 학교에 들렀던 알란 클라크 감독이 마지막 작별 인사를 위해 교실로 들어오는 윈스턴의 걸음걸이에 반해버렸던 것이다. 소년원을 무대로 한 사회드라마 <스컴>은 제작이 완료된 뒤에도 지나친 폭력성 때문에 방영이 무기한 보류됐으나 이듬해 극장용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어냈다. 배우 레이 윈스턴의 시작이었다.

<베오울프>

오랫동안 영국영화와 TV계의 조연으로 활동한 윈스턴은 조너선 글레이저의 아이러니로 가득한 코미디영화 <섹시 비스트>(2000)를 통해 할리우드의 레이더에 걸려들었고, <리플리의 게임>(2002), 앤서니 밍겔라의 <콜드 마운틴>(2003), 마틴 스코시즈의 <디파티트>(2006)를 통해 거칠고 무자비한 늙은 갱스터의 마음을 연기해왔다. 저메키스가 그를 선택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베오울프>의 베오울프는 오래된 서사시 그대로의 완벽한 영웅상이 아니다. 이 남자는 자신을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 허풍을 일삼고, 아름다운 여자라면 무조건 아랫도리를 들이대고, 사사로운 감정에 사로잡혀 대의를 보지 못하는 소인배다. 저메키스의 <베오울프>는 장난감을 든 꼬맹이와 다름없는 비겁한 남자들이 저지른 원죄에 대한 이야기고, 레이 윈스턴에게 측은한 영웅(혹은 갱스터)의 모습은 외모와 상관없이 맞춤 슈트처럼 몸에 딱 맞아떨어진다. 컴퓨터그래픽으로 윈스턴에게 자유를 선사한 디지털의 신에게 감사하는 수밖에.

레이 윈스턴의 다음 작품은 <인디아나 존스4: 수정해골의 왕국>이다. 그에게는 드문 ‘청소년 관람가’등급의 가족영화다. 하지만 무슨 내용이냐고 묻는다면 그는 곧바로 갱스터 본연의 자세로 돌아올 것이다. “내용? 그걸 말해준다면 당신을 죽이는 수밖에. 계약서에 따르면 내가 영화에 관한 비밀을 말해준 어떤 사람이든 죽일 수 있거든. (웃음)” 조심하는 게 좋다. 제임스 캐그니와 전설적인 영국 축구선수 바비 무어를 우상으로 삼고 있는 그는 한살배기 막내딸이 “경박한 미국 악센트를 배울까봐 걱정돼서” 여전히 영국 에섹스에 살며 아직도 체육관에서 복싱 트레이닝을 받는다. 게다가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의 경기를 위해서라면 어떤 감독에게서도 휴가를 받아낼 준비가 되어 있단다. 그는 늦게 발견됐지만 여전히 흥분되는 ‘사내’다.

사진제공 RE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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