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의 마지막 장면에서부터 풀어나가보자. 마지막 질문은 금지된 문항이었다. “도대체 오언 윌슨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애당초 그 질문은 삼가달라고 영화사쪽이 신신당부했건만 결국 누군가가 던지고 말았다. 인터뷰가 끝났음을 알리는 문 밖 노크 소리와 질문의 마지막 문장과 감독 웨스 앤더슨의 한숨 소리가 절묘히 맞아 돌아갔다. 영화사 관계자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고, 질문자는 머쓱해했고, 앤더슨은 애써 무심한 표정을 지었다. 나머지 참석자들은 침만 삼키며 귀를 쫑긋 기울인다. “글쎄요, 저도 모르겠네요. 아무튼 오언이랑 저랑은 절친한 친구예요. 빨리 회복되기만 바랄 뿐이죠.”
인터뷰 일주일 뒤, <가디언>에 실린 단독 인터뷰 말미에도 같은 질문이 걸려 있다. 답변이 이전보다 길어진 것을 보면 오언 윌슨에 대한 질문은 더이상 금기가 아닌 듯싶다. 이 영화의 주인공 삼형제 중 큰형이자, 웨스 앤더슨의 모든 작품에 공동 집필자나 주인공으로 얼굴을 들이민 인물이자, 학창 시절부터 웨스 앤더슨과 친구였던 오언 윌슨이 자살을 기도한 때는 이 영화가 영화제 투어를 막 시작할 무렵인 8월 말이었다. 이미 <로얄 테넨바움>에서 루크 윌슨(오언의 동생이다)이 역할을 맡은 리치가 손목을 그었고, 이번 <다즐링 주식회사>에서는 오언 윌슨 자신이 연기한 인물이 과거에 자살을 시도했던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러한 반복 설정 탓에 영화는 오언 윌슨의 동기가 어딘가에 숨어 있는 암호문처럼 다가오고, 감독 웨스 앤더슨은 그것의 독해 실마리를 쥔 인물처럼 보인다.
<다즐링 주식회사>가 이전의 영화들처럼 불행을 경쾌하게 그리는 태도의 아이러니란, 병실에서 안정을 취하고 있는 희극배우 오언 윌슨의 현실 세계와 그리 다를 바가 없을 테다. 그게 이른바 웨스 앤더스 영화의 브랜드이기도 할 테고. 그를 꾸미는 수식어가 무엇이었든 그리고 그 수식어가 더이상 유효한지 아닌지를 떠나서, 웨스 앤더슨이 자기만의 템포와 온도로 아이러니를 다루는 건 여전히 반가운 일이다. 그의 전속 배우들은 이번에도 출석부에 이름을 올렸다. <로얄 테넨바움>의 콩가루 가족과 <스티브 지소와의 해저생활>의 밀폐 공간 여행이 결합했다고 보아도 큰 무리는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어쨌든 이번엔 ‘영적 순례’(Spritual Journey)를 거창하게 표방한 로드무비다. 여행지를 인도로 택하였기에 성미 급한 평자들은 벌써부터 오리엔탈리즘을 갖다 붙이기도 한다. 덕분에 첫 질문은 거기서 시작할 수 있었다(<다즐링 주식회사>는 12월13일 국내 개봉한다).
웨스 앤더슨 감독, 주연배우 에이드리언 브로디, 제이슨 슈왈츠먼 인터뷰
-왜 인도로 갔나.
=웨스 앤더슨: 일단은 기차 여행을 하는 삼형제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다. 그러다 예전에 장 르누아르 감독의 <강>에서 보았던 인도 이미지를 떠올리면서 인도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르누아르의 이미지를 찍을 생각은 아니었다. 시나리오 작업을 함께한 로만 코폴라와 제이슨 슈왈츠먼을 데리고 인도로 가서 무작정 기차를 탔다. 마음 내킬 때마다 내려서 그 주위를 둘러보고 이야깃거리를 찾고, 다시 기차에 오르고….
-전에 인도를 여행한 적이 있는가.
=에이드리언 브로디: 영화 찍기 일년 전쯤 친구들과 함께 다녀온 적이 있다. 그때에도 많은 것을 느끼고 신비로운 풍경들에 취했었는데, 촬영을 위해 다시 찾은 인도는 이전보다 더 많은 자극을 주었다. 촬영장 주변에 몰려든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열린 마음으로 대해주었다.
=제이슨 슈왈츠먼: 나는 이번이 처음이다. 웨스가 삼형제의 기차 여행 얘기를 꺼냈을 때 솔깃하긴 했는데 인도로 가겠다고 하니 그게 웬 뜬금없는 소리인가 했다. 로만 코폴라랑 함께 간다고들 하기에 안 낄 수 없었다. 이전까지 내가 가지고 있던 인도 이미지는 비틀스 다큐멘터리와 사진들을 통해 접한 2차원적 평면 이미지였다. 하지만 공항에 딱 내리는 순간 2차원이 3차원 입체감으로 확 바뀌었다. 음악 소리와 온갖 향내가 내 주위를 감싸면서 인도는 그렇게 평면에서 벗어나 입체적으로 나를 덮쳤다. 소름이 쫙 돋을 정도로 충격이었다. 도착했을 때만 해도 수염을 기르지 않았는데, 거기 머물면서 인도 사람들에게 동화되기 위해 수염을 길렀다. 그만큼 사람들이 친근하게 다가왔다.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돌아다닌 5주 동안의 여정은 마치 시간 여행 같았다.
-그런 특별한 인상들이 영화에 구체적으로 반영된 것이 있다면.
=제이슨 슈왈츠먼: 대사 중에 ‘이곳의 향기는 정말이지…’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그곳의 그 냄새는 사람을 쫓아내는 냄새가 아니라 발을 붙잡는 냄새였다. 그리고 가령 아이포드와 변압기의 관계 같은 것도 그러하다. 슈퍼 하이테크놀로지와 슈퍼 로테크놀로지가 공존하는 곳이 인도였다. 그런 불균형과 차이가 매력적이다.
-인도 여행은 정말 ‘영적’인 감흥을 주었는가.
=웨스 앤더슨: 물론이다. 거기서 만난 사람, 보는 풍경, 접하는 사건, 모든 게 정서적으로 충만한 경험이었다. 의식과 종교가 담고 있는 상징을 그대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영화제작이라는 구체적 상황 속에서 경험하다보니 내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충만해졌다. 그러고보니 시나리오를 쓰면서 떠났던 여행보다도 영화를 찍어나가는 과정이 더 즐거웠다고 할 수 있다. 기차를 이용해야 했기 때문에 사전에 관계 기관에 협조를 받아야 했는데 그때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어 마음을 졸였지만 항상 도전하는 긴장감을 주었다. 그뿐인가. 차도 빌려타고 배도 타고…. 말 그대로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뭔가를 찾아가는 식이었다.
=에이드리언 브로디: 로드무비를 표방한 영화들이라도 여행이라는 설정이 그저 촬영 과정에서 토막난 것들의 연속이어서 그다지 여행한 기분이 나지 않게 마련인데, 이 영화에서는 ‘실제 기차’를 타고 떠나는 ‘실제’ 여행에 가까웠다. 일반적인 영화제작 상황과는 달랐다. 여름캠프 같았다고 해야 하나. 촬영 중간 짬짬이 근처를 돌아볼 수 있었던 것처럼 구속받지 않은 자유로움이 있었다. 촬영을 해나갈수록 함께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도 늘어갔고.
-웨스 앤더슨과 첫 작업인데, 기존의 단골 멤버들과 호흡은 어땠는가.
=에이드리언 브로디: 기차 객실이라는 작은 공간에서 많은 촬영이 이루어지고, 일정이 영화 속 여정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어서 상대배우들과 상당히 밀착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어디 동료 연기자들뿐이었겠나. 인도의 고원 지대에서 고립되다시피 한 상황에서 며칠간 뒹굴며 먹고 자다보니 촬영 스탭들과도 모두 끈끈한 팀워크를 가질 수 있었다.
=웨스 앤더슨: 브로디라는 배우에 관심을 가진 건 훨씬 이전이었다. 소더버그의 <킹 오브 더 힐>에 나왔을 때도 그랬고, 배리 레빈슨의 <리버티 하이츠>랑 스파이크 리의 <썸머 오브 샘>에 나왔던 모습도 그렇고 배우로서의 이목구비뿐만 아니라 목소리에서도 매력을 느꼈다. 폴란스키의 <피아니스트>에서는 두말 할 것도 없고. 언제 꼭 한번 함께 영화를 찍고 싶었는데 이번에 이렇게 기회가 되었다. 처음 작업하는 배우들은 내 시나리오를 읽더라도 쉽게 감을 잡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브로디는 시나리오에 대한 집중력과 이해력이 뛰어날뿐더러 감독이 뭘 요구하는지도 척척 집어내더라. 내가 간섭도 심하고 자잘한 것까지 컨트롤하는 편인데 그런 면도 잘 참아주었다.
=에이드리언 브로디: 웨스 앤더슨이 나를 염두에 두고 인물을 설정하여 시나리오를 썼다고 했는데 완성된 영화를 보고서야 비로소 얼마나 그가 나를 잘 파악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나조차도 잘 모르고 있던 나의 면모를 그렇게 잘 끄집어냈으니.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의 내 모습이 영화에 드러나 있다.
=제이슨 슈왈츠먼: 나로서는 <러시모어> 이후 십년 만에 웨스 앤더슨과 함께한 작품이다. 그때만 해도 그저 서로를 알아가던 정도였는데 이후 쭉 친구로 지내왔다. 이번 영화의 계기도 내가 파리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를 찍고 있던 상황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웨스가 파리로 넘어와서 내 숙소에 함께 머물면서 매일 밤 어슬렁대면서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끼적댄 게 영화에 좀 들어가 있다. 물론 구체적인 것들은 모두 로만 코폴라와 함께 떠난 시나리오 여행 때 만들어졌지만.
=웨스 앤더슨: 제이슨은 10년 전에 비하면 정말 달라졌다. 그때도 의사소통하는 데 무리는 없었지만, 지금은 척하면 척이다. 누구보다 내 작품을 잘 이해할 것이다.
-단편 <호텔 슈발리에>도 파리에 머물던 그 당시에 만들어진 건가.
=웨스 앤더슨: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고 해야 할까. 비슷한 짧은 이야깃감은 갖고 있었는데 구체화시키지는 않았다. <호텔 슈발리에>는 <다즐링 주식회사>에 딱 맞물려 돌아가는 작품이라기보다는 일종의 프롤로그거나 번외편이라고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본 영화의 오프닝을 뭘로 잡을까 이런저런 장면들을 만들어보았는데, 굳이 본편 안에 넣지 않고도 작품 외부에서 내부 인물과의 관계를 보여줄 만한 장치로 그럴듯해보였다. 그러다보니 정작 단편 촬영 직전까지 꽉 짜인 시나리오가 나오지 않은 상태여서 부랴부랴 이것저것 급하게 넣고 빼면서 찍었다. 아이포드 음악이 들어간 것도 그 무렵이었다. 인물의 정서적 유대감을 살리기에는 유용한 설정일 것이다.
-실제 가족은 어떤 관계인가? 영화에서 다루는 인물들처럼 그렇게 ‘미친 가족’들인가.
=웨스 앤더슨: 평범한 가족이다. 영화에서처럼 그렇게 미쳐 돌아가진 않는다. 다만 영화 속 인물들도 내가 아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끌어낸 캐릭터들이다. 이번 영화의 주인공들처럼 나도 삼형제이고, 그중 둘째이다. 늘 많은 대화를 나누며 사는 사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서로 배려하고 보살피면서 산다. 내 영화를 보고 형과 동생이 이런저런 얘기를 해주니깐. 영화 속 삼형제 중 굳이 나를 닮은 인간을 꼽으라면 제이슨이 맡은 막내다.
=제이슨 슈왈츠먼: 나 또한 내가 맡은 막내 캐릭터가 전적으로 내 모습은 아니다. 내가 인물을 만들어낸 사람들 중 하나이긴 해도, 웨스 앤더슨, 로만 코폴라, 나의 각 면모가 영화 속 세 형제의 캐릭터에 골고루 나눠 들어가 있다.
-제작비 조달에 무리는 없었나.
=웨스 앤더슨: 이전 작품 <스티브 지소와의 해저생활> 때 워낙 크게 말아먹었던 터라, 하하, 그리고 그 작품은 제작사쪽에서 관심을 가졌던 것이어서…. <다즐링 주식회사>는 지난 제작비의 1/3 정도만 필요로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제작비의 반은 제작사에서, 나머지 반은 우리쪽에서 조달했다.
-로알드 달의 <판타스틱 미스터 폭스>를 원작으로 삼아 다음 작품을 계획 중이라 들었다. 남들이 안 하는 이야기를 즐겨 다루는 이제까지의 행적으로 보아 의외이다.
=웨스 앤더슨: 어렸을 때부터 형제들이랑 즐겨 읽었던 작품이다. 원작의 분량이 적기 때문에 오히려 내 색깔이 들어갈 부분이 훨씬 많을 것이다. 완성된 시나리오는 원작과 많이 달라질 수도 있을 테다. 이제껏 여러 감독들이 자기들의 방식으로 로알드 달의 원작을 다뤘듯이 웨스 앤더슨만의 로알드 달 이야기가 만들어지길 기대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