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울 월시와 앤서니 만이 찾아온다. 시네마테크 부산의 ‘라울 월시&앤서니 만 특별전’(11월28일∼12월16일)과 필름포럼의 ‘라울 월시 특별전’(12월4∼12일)은 웨스턴, 갱스터, 필름누아르 등의 할리우드 장르영화의 매력을 한껏 느낄 수 있는 기회이다. 앤서니 만의 작품은 7편, 라울 월시의 작품은 9편(부산에서는 <추적>을 제외한 8편이 상영된다)이 소개되는 이번 특별전에서 더 반가운 쪽은 라울 월시이다. 이는 누구를 더 선호하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누가 더 만날 기회가 없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적어도 앤서니 만은 지난해 열렸던 ‘웨스턴 특별전’에서 그의 대표작들을 선보이는 기회가 있었지만, 라울 월시는 몇몇 특별전에서 산발적으로 두세 작품이 소개되는 것이 전부였으니 말이다.
영화학자 앤드루 새리스가 존 포드와 하워드 혹스, 앨프리드 히치콕 등에게 작가의 칭호를 부여하며 ‘만신전’에 추대할 때, 라울 월시와 앤서니 만은 그 명단에서 빠져야 했다. 새리스는 자신만의 세계관을 통해 여러 기술적 문제를 극복했던 일련의 작가 감독들에 비해 라울 월시와 앤서니 만은 다소 부족하다고 보았고, 그러한 이유에서 이들은 만신전 아래의 카테고리인 ‘낙원의 저쪽’(The Far Side of Paradise)으로 밀려나야 했다. 이러한 새리스의 평가가 어느 정도 타당한 것은 사실이지만, 낙원의 저쪽에 위치한 감독들 대부분은 그 누구도 필적할 수 없는 자신만의 걸작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이들 작품만을 두고 말한다면 만신전의 감독들에 비해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 새뮤얼 풀러의 <충격의 복도>(1963), 니콜라스 레이의 <실물보다 큰>(1956), 라울 월시의 <포효하는 20년대>(1939)와 <화이트 히트>(1949), 앤서니 만의 <운명의 박차>(1953)와 <서부의 사나이>(1958)는 그 단적인 예이다. 다행스럽게도 이번 특별전에서는 라울 월시와 앤서니 만을 대표하는 이들 네 작품 모두가 상영된다.
질주하는 인물 속의 허약함
이번 특별전에서 소개되는 라울 월시의 작품은 총 9편이다. 130편이 넘는 작품들로 채워진 그의 필모그래피에 비하면 다소 초라한 숫자지만, <포효하는 20년대>, <그들은 밤에 달린다>(1940), <하이 시에라>(1941), <화이트 히트> 등을 만나는 것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다. 1887년에 태어나 1910년대 초반 무성영화 감독으로 데뷔하며 1960년대까지 작품 활동을 이어갔던 라울 월시의 영화 인생은 할리우드의 궤적과 거의 일치한다(세상을 떠난 건 1980년이다). 그리피스의 조감독 출신으로 <국가의 탄생>에는 배우로 참여했고, <바그다드 도둑>(1924, 미상영작) 같은 무성영화 시기의 걸작을 연출했던 그는 토키영화, 컬러영화, 와이드 스크린의 등장 등 할리우드의 모든 변화에 발을 맞춰나간 감독이었다. 또한 갱스터영화, 전쟁영화, 필름누아르, 웨스턴영화, 시대극 등 할리우드가 창작 영역을 확장가는 곳곳마다 월시는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장르를 종횡무진하며 오가는 월시의 능력은 <추적>(1947)과 <콜로라도 지역>(1949)에서 적절히 드러나는데, <추적>이 서로 대척점에 있는 두 장르, 광활한 자연을 배경으로 선과 악의 대립구도 속에 세계의 질서를 긍정하는 웨스턴과 폐쇄적인 도시 공간을 배경으로 도덕적 모호함과 편집증적 불안을 끄집어들이는 필름누아르의 모두를 수렴한 ‘누아르 웨스턴’의 대표작이라면, <콜로라도 지역>은 필름누아르풍의 범죄영화였던 <그들은 밤에 달린다>를 다시 각색하여 웨스턴으로 변주한 작품이다. 이처럼 월시는 두 장르를 혼합하거나, 장르를 또 다른 장르로 변환시킬 만큼 여러 장르를 섭렵한 감독이었지만, 그만의 진가는 남성적인 힘이 느껴지는 장르에서 빛을 발하곤 했다.
하지만 월시가 창조한 남성 인물은 일반적인 영웅상과는 다르다. 앤드루 새리스는 라울 월시 영화의 영웅과 존 포드, 하워드 혹스의 영웅을 비교하는데, 포드의 영웅이 전통에 의해 유지되고 혹스의 영웅이 프로의식에 의해 지탱된다면, 월시의 영웅은 어떤 (모험적인) 충동에 이끌린다고 지적한다. 또한 포드의 영웅이 방법은 모를지라도 왜 그것을 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고, 혹스의 영웅이 왜 해야 하는지는 몰라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 반면에, 월시의 영웅은 ‘왜’나 ‘어떻게’에는 좀처럼 관심이 없다. 월시의 영웅에게는 자신이 무언가를 한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이다. 폭주기관차처럼 무식하게 앞으로 질주하는 인물 유형인 <화이트 히트>의 코디 자렛(제임스 캐그니)은 단적인 예이다. 영화의 엔딩, 오이디푸스적인 집착에 빠져 있던 코디는 자신이 이루려 한 것을 성취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왜 자신이 목숨을 지불하면서까지 ‘세계 정상’에 오르려 했는지 말하지 않는다. 경찰에 쫓기던 코디가 “엄마! 세계의 정상이에요. 난 해냈어요”(Top of the world! Made it, Ma!)라고 외치며 자신의 몸을 화염 속에 날려버릴 때, 우리는 그저 자신이 이루려는 바를 향해 끝없이 질주했던 광적인 인간이 주는 숭고함에 압도당하고 만다. 그가 악인이라는 것도 잊은 채.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이상주의에 온몸을 던지는 미국 해병대를 다루는 <배틀 크라이>(Battle Cry, 1955, 미상영작)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월시의 인물들(특히 전쟁영화의 인물들)은 강인한 육체와 직선적인 감정으로 똘똘 뭉쳐 있다. 하지만 <포효하는 20년대>의 에디(제임스 캐그니)나 <하이 시에라>의 로이 얼(험프리 보가트)처럼 월시의 인물들이 마초 중의 마초라 하더라도, 어느 순간 여성과의 관계나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발생하는 정서적 비애나 약점이 등장하고, 그것이 단선적일 수 있는 인물에게 심리적인 깊이를 부여한다. 어머니에 대해서 소년적 정서로 광적인 집착을 보이는 <화이트 히트>의 코디는 말할 것도 없고, 육체적 강인함과 냉소적인 말투를 내세우지만 심리적 나약함을 감추지 못하는 <하이 시에라>의 로이 얼, 옛 연인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에디, 과거 기억을 추적하는 <추적>의 젭(로버트 미첨) 모두가 그러한 인물들이다. 달리 말해, 조 페시도 그 앞에 서면 귀엽게 느껴질 법한 제임스 캐그니를 어미의 품 안에서 응석부리는 아들로 만들 수 있는 감독이 바로 라울 월시인 것이다. 어쩌면, 라울 월시가 마초다움을 앞세우는 하드 보디 남성의 정신적 허약성을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자신이 그러한 남성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제임스 캐그니, 존 웨인, 험프리 보가트, 그리고 라울 월시
라울 월시에게 중요한 두 배우가 있다면, 제임스 캐그니와 험프리 보가트다. 갱스터 장르의 대표적인 배우였던 탓에 캐그니처럼 비장하게 자주 죽어야 했던 배우도 드문데, 관객의 기억 속에 영원히 살아 있을 그의 죽음이 등장하는 세편의 영화를 꼽는다면, 그중 두편이 라울 월시의 <포효하는 20년대>와 <화이트 히트>(나머지 한편은 <더렵혀진 얼굴의 천사>가 아닐까)일 것이다. <포효하는 20년대>에서 사늘하게 식은 에디를 안고 파나마(그래디스 조지)는 “그는 한때 대단한 사람이었지”(he used to be a big shot)라고 속삭인다. 라울 월시는 <공공의 적>을 통해 갱스터영화를 대표하는 배우로 성장한 캐그니에게 가장 숭고한 죽음을 선물함으로써, 단지 한 인물의 죽음이 아닌 점차 사라지고 있던 고전 갱스터영화를 애도하며 그 비명을 새기는 것이다.
캐그니에게 가장 캐그니다운 모습을 선물한 것은 <화이트 히트>였다고 하더라도, 월시를 만나기 이전부터 이미 캐그니는 유명한 스타 배우였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월시가 성공을 확신하며 키우려 했던 배우가 캐그니와 정반대 성향의 배우인 존 웨인이었다는 점이다. 라울 월시는 <빅 트레일>(1930, 미상영작)에서 존 웨인에게 생애 첫 주연 배역을 안겨준 인물이지만, 이 영화가 상업적으로 실패하면서 존 웨인을 발굴한 몫은 존 포드에게 넘어가고 만다. 존 웨인이 존 포드를 만나면서 일대 전환점을 맞이했다면, 험프리 보가트에게는 라울 월시가 그런 존재였다. 우리는 <말타의 매>와 <빅슬립>, 그리고 <카사블랑카>를 통해 하드보일드한 정서의 험프리 보가트를 기억하고 있지만, 월시가 <하이 시에라>의 주연을 맡기기 전까지 보가트는 배신을 일삼는 치졸한 악당 역에 만족해야 했다. 그런 보가트에게 월시는 구세주였다. 우리가 기억하는 하드 보일드한 감수성에 냉소적 말투의 험프리 보가트의 시작은 <말타의 매>가 아닌 <하이 시에라>였다.
앤서니 만의 고민하는 서부 사나이
라울 월시를 통해 제임스 캐그니가 그 캐릭터의 정점을 보여주고, 험프리 보가트가 자신의 스타 이미지를 부여받았다면, 제임스 스튜어트는 앤서니 만을 통해 진정한 배우로 재탄생할 수 있었다. 앤서니 만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은 ‘심리 웨스턴’, 혹은 ‘모던 웨스턴’이라는 표현이다. 웨스턴이라는 명칭 앞에 붙여진 ‘심리’, ‘모던’이라는 단어는 앤서니 만의 영화가 고전 웨스턴과 어떠한 차이를 지닌다는 것과 함께 이후 발생할 모던 시네마와 어떤 접점이 있음을 드러내는 표식이다.
앤드루 새리스는 혹스와 월시의 영웅을 비교했지만, 이러한 비교가 더 효과적이려면 혹스와 만을 비교하는 쪽이 훨씬 타당할 것이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혹스의 <리오 브라보>는 프레드 진네만의 <하이눈>에 대한 화답이었다. <하이눈>의 주인공 보안관처럼 주변의 도움을 청하기 위해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짓은 프로의식이 있는 서부의 사나이라면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고, 혹스는 진짜 서부 사나이를 보여주겠다는 듯, 도움을 주겠다는 주변 사람들을 만류하며 그 직업의식을 투철하게 사수하는 보안관의 캐릭터를 만들어낸다. 앤서니 만이 창조한 서부의 사나이를 혹스와 진네만의 사이 어딘가에 세워야 한다면, 만의 영웅은 진네만쪽에 가까이 있다. 만의 인물들은 뛰어난 능력을 지녔다 하더라도, 자신에 대한 신념을 잃고 깊은 회의에 휩싸여 있는 탓에 그 능력을 극대화할 수 없다.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인물들에게 어두운 과거는 끊임없이 되살아나며 현재의 도덕적 신념을 혼란스럽게 한다, 이는 한때 보안관이었지만 자신의 직업으로 인해 가족을 잃은 뒤 과거의 모든 신념을 버리고 현상금 사냥꾼으로 변모한 <틴스타>(1957)의 모그(헨리 폰다)를 상기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물론 이러한 인물 유형은 웨스턴영화가 아닌 필름누아르의 것이었다. 기억할 사실은 앤서니 만이 제임스 스튜어트를 내세우며 <윈체스터 73>(1950)을 통해 웨스턴 감독으로 변모하기 이전, 그의 필모그래피는 당시 할리우드를 지배한 어두운 시각적 스타일의 작품들로 채워져 있었다. 데뷔작이었던 <닥터 브로드웨이>(1942, 미상영작)에서부터, 그의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린 계기였던 <레일로디드>(1947)와 <티-멘>(1947, 미상영작) 등의 작품들은 필름누아르풍의 범죄영화였다. 앤서니 만은 도시에서 자연으로 그 배경을 전환시키지만, 불안에 시달리고 도덕적으로 모호한 누아르의 인물만큼은 그대로 남겨놓았다. 앤서니 만과 더불어 웨스턴 장르는 자기의 관습, 특히 사회적 역할과 주인공의 심리적 구성에 관한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공동체 전체의 가치에 충실한, 또는 충실해야만 하는 것이 존 웨인이 지지한 전통이었다면, 앤서니 만은 부패한 공동체 안에서의 갈등과 분열, 그리고 그 앞에서 명확한 입장을 세우지 못하는 인물들을 내세운다. 그의 영화에서 인물들 간의 갈등이 가족 관계와 맞물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윈체스터 73>이나 <서부의 사나이>처럼 공동체적 가치를 표상했던 가족은 이제 갈등의 원인이 된 것이다. 특히 2차 세계대전의 이후 냉정해진 사회 정치적 현실은 웨스턴 공동체의 이미지가 과거와 같을 수 없음을 알리면서, (심리 웨스터의 최고 걸작이자 앤서니 만의 마지막 웨스턴영화인 <서부의 사나이>(1958)가 알레고리적으로 드러내듯) 과거의 웨스턴은 이제 허상이나 유령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앤서니 만이 심리 웨스턴을 통해 죽이고자 한 것은 바로 이러한 허상의 웨스턴이었다.
(*앤서니 만의 개별 작품에 대한 설명은 <씨네21> 546호 홍성남의 “”을 참고하시길 바란다.)